외할머니를 생각한다. 우리 엄마를 생각한다.
몇 십년 동안 가족의 먹거리를 책임졌던 집 앞 마당 텃밭에서 캐낸 채소들을 이고 버스를 타면 30분 쯤 걸리는 전주 시장 마당에서 품삯을 벌었던 외할머니. 외할머니는 그렇게 번 돈 100만원을 엄마에게 줬다.
“손주 딸 아가 피아노나 좀 사줘라”.
엄마는 누나에게 피아노를 사주지 않았다. 그 때 갚아야 할 빚을 갚았더래나, 누나가 피아노 학원 1년을 다녔지만 별로 흥미가 없었다고 한다.
엄마는 외할머니가 평생 고생했다고 말했다. 맨날 집에서 일만 하다가, 맛있는 것도 제대로 먹어보지 못하고 가셨다고. 외할머니는 언젠가 전주에 엄마를 찾아와 칼국수를 먹고 싶다고 했더랜다. 베테랑칼국수, 전주의 명물. 그렇게 맛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외할머니는 그렇게 칼국수를 먹자고 해놓고는 본인이 칼국수를 샀다고 했다. 말을 하는 엄마의 눈에 눈물이 약간 비쳤다.
엄마는 7남매의 막내다. 외할머니가 45살쯤, 엄마를 낳았다. 내 조카가 나보다 나이가 많을 만큼 엄마는 어린시절을 다른 먼저 돈을 벌러 일찍 집을 나간 언니 오빠들과 동떨어져 자랐다. 엄마는 외할머니의 가사 일을 돕고는 했다. “옥도야 산에 가서 솔잎좀 모아와라”. 중인초등학교에서 돌아온 어린 시절의 엄마는 옆 집의 친구를 불러 같이 동네 산에 갔다. 엄마는 내 앞에서 자신이 솔잎을 어떻게 캤는지를 생생하게, 이야기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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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가쪽이 돈을 좀 밝히는게 있지”
엄마는 이미 오래전 이혼한 아빠 가족쪽이 유교적인 문화가 너무 강하다고 말했다. 균형을 잡기 위해 외가에 대한 나의 판단을 이야기했다. 매번 아빠 욕을 들어주고 친가 뒷담을 계속 말없이 들어준 것에 대한 나름의 복수다. 그 복수에 엄마는 이렇게 답했다.
“이모들이 좀 그렇지? 어릴 때 없이 살아서 그래”
2023년 현재 세대간의 갈등, 현재 청년들의 불안과 외로움에 대한 나의 견해를 밝히겠다.
나는 우리 엄마 아빠 세대가 자기가 어렸을 때 받은 것은 우리에게 하나도 물려주지 않고, 자기들에게 부족한 것만 물려주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세대는 물질적으로 그들보다 훨씬 풍요로워도, 그들만큼 행복하지 않다. 그들보다 불행하다. 그들이 어릴 때 받았던 것, 시골에서의 전원 생활, 형제 자매 남매들과의 우애, 동네 사람들 동네 친구들과의 결속감 같은 것들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 세대에게 그것을 줘야한단 생각조차 못한 것이다. 인간 생존에 있어서 어찌보면 필수적인 것들을 디딛고 자라 성인이 되어 그들 눈 앞에 보인 것은, 자신들의 물질적 부족이었다. 육십이 다 되서도 고향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 어린 시절의 추억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들은 그 추억 가득한 어린 시절이 부족했던 과거라고 말한다. 자기자신에 대한 ‘부족함’의 견해를 자기 자식들에게 물려줬다. 요즘 세대 우리들은 그 부족함을 채우는 것만이 삶의 전부인 것만 같다.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당연하게 갖춘 것을 하나도 갖추지 않은 우리에게 그들은 “요즘 애들은 왜 그러냐며” 꼰대같은 견해만 늘어놓는다.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 채 너무 멀리 와버려서 서로 헤매고 있다.
나는 대학교에 들어가고 난 후 외할머니를 찾아간 적이 없다. 엄마아빠가 이혼 한 뒤 외가 쪽과 적극적인 연락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리화할 수도 있겠지만. 이 합리화를 하기 전까지는 나는 꽤 큰 후회감을 마음 속에 안고 살았다.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서울대를 가기 위해 공부한다는 핑계로, 혹은 내 가족을 내가 성공해서 살린다는 핑계로 외할머니를 마음 속에서 외면했다. 외할머니는 내게 유일하게 무조건적인 사랑의 기억을 줬던 사람 같은데. 아유 우리 똥강아지. 꼬추 얼마나 자랐나 보자. 외할머니와 있을 때는 걸림이 없었다. 어딜 놀러간다고 했을 때 ‘다녀와라’ 말 외에 더 핀잔을 주는 경우가 없었다. 돌아오면 맛있는 음식을 ‘아나’하며 챙겨줬다. 저녘 밤 마루에서 외할머니가 해주시는 옛날 이야기를 친구와 함께 들었던 기억도 있다. 진정한 존중은 여타저타 복잡한 지식과 말들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는 것을 그 기억들로부터 어렴풋이 느낀다.
그렇게 3년 쯤 외할머니를 보지 않았을 때, 외할머니는 돌아가셨다. 그 당시의 나를 나는 매우 흐릿하게 살던 나로 기억한다. 슬퍼하지도 못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을 정도의 불필요한 책임감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 후에도 나는 나 자신을 더 가혹한 평가의 늪으로 떠밀었던 것 같다.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내 마음 속에 묻혀져 있었다.
베테랑칼국수와 피아노를 살 100만원, 그 이야기 뒤 엄마의 슬퍼보이는 눈을 보고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그 시절에 도시 가서 이것저것 맛있는 것 먹었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어딨어. 그리고 그거도 한 두 번이지, 어차피 그 사람들은 그런다고 행복하지도 않을거야. 다 그러더라. 할머니 할아버지들 나이 들어서도 밭일 절대 못 놓는다고. 그 분들에겐 그게 행복인거지. 낙인거고. 그니까 외할머니가 돈도 써보지도 못하고 맛있는 거 못 먹고 돌아가셨다고 해서 외할머니가 불행하게 살았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어.“
그러자 엄마는 10년 넘게 아픈 몸으로 시골 집을 떠나 이모의 보살핌을 받았던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1-2년 전 했던 말을 되내인다. 옥도야. 중인리에 가서 같이 나랑 살자. 중인리 가서 살고 싶다. 그러나 그 때는 집이 다 허물어지고 팔릴 준비를 마친 다음이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중인리의 집과 땅은 지금 시세보다 절반 좀 더 되는 가격으로 팔렸다.
엄마가 다녔던 중인초등학교를 엄마와 구경하고 나왔다. 외할머니 집 터에 새 집이 지어졌댄다. 그 집을 구경해보러 갈까 말까. 마당있는 집 짓고 사는게 꿈인 엄마는 그 때 자기가 외할머니 집을 샀어야 했다면서, 그 아쉬움에 가지 말자고 했다. 그 아쉬움은 어떤 아쉬움이었을까.
_2023/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