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지금부터 열심히 달릴 수밖에
면접을 보고 결과를 기다린 심리학과 대학원에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 별로 큰 충격을 받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나보다. 불합격 통지를 받은 날 도통 잠이 오지 않았고. 잠을 자고나서도 3번인가 강렬한 꿈을 꾸다가 깼다. 가장 불안한 요인은 내가 현재 김해에 집까지 구해서 살고 있는 당위를 가족들에게 어떻게 설득할지였다. 사실 불합격 통지 이전의 삶이 만족스럽다고 느끼고 있었다. 도보배달이 가장 잘 잡히는 상가 밀집 지역에 있는 스터디카페 100시간 이용권을 구입해 스터디카페에서 공부를 하다가 쿠팡이츠 도보배달이 잡히면 돈을 벌었다. 도보배달을 하면서 이어폰을 꽂고 자유롭게 공부하고싶었던 노르웨이어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면접을 본 1월 8일부터 결과 발표일인 1월 30일까지 3주 정도의 붕 뜬 시간을 채우기 위해 구약성경을 읽으며 동시에 노르웨이어 성경 오디오북을 들었다. 차라리 대학원에 붙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내 발 밑에 지지할 게 아무것도 없다고 느꼈었는데, 이제는 발 밑을 든든하게 지지하는 받침대가 생기고 있었다.
다행히(?)도 불합격 통지를 받은 그 날은 가족 모임 바로 전날이었다. 면접을 5분밖에 보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아빠는 '대학원 놈들 미리 다 뽑을 사람 정해놓고 너 들러리 세웠네' 라며 나를 위로해줬다. 그리고 오히려 이 불합격이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 있다며, 자신이 아는 친구가 한 신문사 부사장인데 한 번 소개시켜줄까 라는 제안도 건넸다. 상혁이가 글 쓰는 걸 되게 잘한다면서. 아빠도 내 글을 봤나보다. 이제 내가 한국사회에서 발디딜 곳이 없어지는 것 같단 위기감을 느꼈던 나는 그 제안에 솔깃했다. 아니 그보다 예전같았으면 원래 나의 계획을 믿고 바로 거절했을 아빠의 그 제안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열어두고 싶었다. 하지만 아빠와 헤어지고 난 뒤, 아빠에게 나도 계획이 있으니 뭘 알아봐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을 했다.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한다. 심리학과를 가서 공부하겠다는 뜻은 내가 죽기 전에 꼭 공부해보고 싶었던 심리학 공부를 훨씬 앞당겨 온 것이었으므로. 불합격했다는 건 이젠 내가 좀 더 지금 나에게 더 어울리는 목표와 길을 위해 노력할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전화위복이라도 그 복은 이제 내가 스스로 만들어내야만 했다.
나의 목표는 3년 후에 노르웨이에 가서 대학원 박사공부를 하는 것이다. 그 목표를 위해 더 어울리는 대학과 학과가 있었다. 불합격을 직면한 내 안에서 절박함이 떠올랐다. 지금까지는 이거 안되면 저거 하면 되지. 라는 약간의 안일함이 있었다. 불합격 통지를 받고 가장 반성했던 건 그 부분이었다. 선택지를 여러개 놓고 있는 안일함. 달리기를 해서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길이 있음에도 굳이 걸어갈 수 있는 길을 옅보고 있었다. 절박함이 마음 안에 떠오르자. 황급히 그 더 어울리는 대학과 학과의 교수님께 메일을 썼다. 황급하게 쓴 그 내용이 어떻게 보일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냥 당장 떠오른 그 절박함을 꾹꾹 눌러 담았다. 그리고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답장이 오지 않을까 조마조마했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그 길로 죽을 힘을 다해 달리지 않으면 더 이상 내게 희망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그 절박함의 크기에 비하면 써놓은 메일이 어떻게 보여질지는 크게 중요한 요소는 아닌 것처럼 보였다. 다만 지금부터 열심히 달릴 수밖에.
가족과 헤어지고 다시 스터디카페에 가서 구약성경을 노르웨이어와 함께 읽었다. 머지 않아 도보배달 배달 알림이 울려 밖에 나갔다. 원래같으면 신약성경 노르웨이어를 들었을 거다. 그런데 예전에 시골에 살 때 매일 달리기를 할 때마다 해리포터 마법사의 돌 4장 노르웨이어를 들은 기억이 났다. 오랜만에 다시 그 챕터 오디오북을 켰다. 예전보다 훨씬 노르웨이어가 잘 들렸다. 성경도 좋지만. 해리포터를 노르웨이어로 전부 읽고 들어봐야겠다. 신발끈을 질끈 매듯이 다짐했다. 첫번째 배달을 마치고 다시 도보배달 알림이 울렸다. 스마트폰을 보며 식당 위치를 확인하는데, 메일이 하나 와있는게 보였다. 3월쯤에 면담을 해보자는 교수님의 답장이었다. 메일을 읽고 질끈 더 다짐했다. 해리포터를 노르웨이어로 전부 읽고 들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