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와 거리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마딜레나 마소토
이건 무슨 색일까? 아주 예쁜 노란색에 제목과 지은이가 사다리꼴을 이루고 그 안에는 하얀색 자동차가 있다. 자동차 안에는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젊은 여자가 운전을 하고 있고 뒷자리에는 하얀 단발머리의 여자와 뾰족 머리의 남자아이가 타고 있다. 제목과 분위기로 짐작컨대 엄마와 아이와 엄마의 엄마가 아닐까 싶다. 제목부터 그림까지 재기 발랄함이 넘친다. 책을 펼치니 어쩜 책의 절반이 잘라져 있다. 책장의 아래위가 반절로 분리되어 따로따로 움직인다.
“이제 여행을 떠나자 “
세명의 얼굴엔 여행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는 듯 보인다. 그런데 그들의 여행은 뒤죽박죽이다. 가다가 길을 잃어 비상 깜빡이를 켜고 지도를 보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길을 잃기도 한다. 가는 길을 찾았나 싶었는데 길 한복판에 나무가 쓰러져 공사 중이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길에 타이어는 펑크가 난다. 그런데 이 사람들 아무도 짜증을 내거나 힘들어하지 않는다. 외려 할머니는 ‘여기가 어딘지 알면 깜짝 놀랄걸’이라고 누군가에게 자랑을 하듯 전화를 한다. 길가다가 예쁜 곳이 있으면 다 같이 내려서 그곳을 감상한다. 타이어가 펑크가 나도 괜찮다. 펑크 난 타이어를 고쳐줄 누군가가 올 동안 그곳을 즐긴다. 얼룩덜룩 더러워진 차를 타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다. 여행을 끝낸 그들은 세차를 한다. 그리고 '다음 여행 출발'하고 상큼하게 말한다.(그들의 표정이 아주 상큼하다.)
생애 처음 친구와 도쿄 여행을 갔을 때 지브리 박물관을 들렀었다. 지브리 박물관의 아기자기함과 그의 에니매이션을 구현해 놓은 것 같은 박물관의 정경이 정말 좋았다. 그러나, 우리는 지도를 보면서도 지브리 박물관을 가는 길에 있는 공원 안을 헤매었었다. 엄청 큰 공원 안에는 사람은 없었고 우리나라에서 자주 보던 까치의 두배는 되어 보이는 까마귀가 어마 무지하게 많았다. 우리에게는 유명인사였던 지브리의 박물관을 가는 길에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게 이상했기에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 의심이 들었다. 마침내 겨우 만난 1명의 일본분이 길을 알려주셨는데 그 공원은 지브리 박물관을 가는 지름길 같은 곳이었다. 박물관 앞에 다다르니 역시나 관광객들이 입장을 위해 줄을 서 있는 것을 보며 우리가 제대로 찾아왔음을 기뻐했다.
박물관을 관람하고 이제는 알게 된 아까 그 지름길 공원을 가로질러 지하철 역사로 향했다. 이제야 보이기 시작한 공원의 아름드리나무와 숲의 아름다운 정경에 마음을 빼앗겼다. 지브리 박물관의 아기자기함과 지브리의 습작들, 관련 물품을 구입하는 것도 좋았지만, 제대로 큰길로 갔다면 만날 수 없었을 이국적이면서 고요한 공원을 우리는 더 즐겼고 감탄했었다. 여행을 다녀온 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공원을 걸었던 기분이 나에게 남아 있다. 여행에서 목적지를 가는 것도 좋지만 그 목적지를 가기 위해 걸어가고 있는 그 길의 풍경을 음미하고 기억하는 일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목적지에 대한 초조함은 잠시 접어두고 내 마음이 끌리는 곳이 있다면 잠시 그곳을 만끽하는 것도 좋다. 여행에서 속도와 거리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이 중요하고 그 모든 순간을 진정으로 즐기는 일이 중요할 뿐이다.
책을 다시 처음부터 본다. 책은 하드커버의 표지와 속지를 지나서 본문이 시작되는 지점부터 전체가 정확히 가로로 반절이 나누어져 있다. 위의 장을 그대로 두고 아래의 장을 한 장씩 넘겨도 길은 계속 이어진다. 이 책이 알려주는 모든 길을 다 가면서 여행을 끝내려면 엄청나게 많은 경우의 수가 존재하는 것이다. 밀밭을 가다가 펑크가 날 수도 있고, 고속도로를 가다가 펑크가 날 수도 있다. 펑크가 났을 때 전화를 할 수도 있지만 전혀 다른 장소에서 ‘여기가 어딘지 알면 깜짝 놀랄걸’이라고 전화를 할 수도 있다. 나도 이 책을 펼치며 도로에서 펑크가 난 자동차를 만난 것처럼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서서히 내가 만들어 내는 다양한 길과 풍경을 즐기기 시작했다. 다 읽고 나서는 아이에게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알면 깜짝 놀랄걸'이라고 말했다. 이 책은 읽는 과정에서 조차 말하는 바가 정확하다.
어쨌든 살아남지 않았는가?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이 옆에 있고, 남 보기에는 보잘것없을지언정 평생을 들여 이룬 작은 성취가 있다. 인생과 여행은 그래서 신비롭다. 설령 우리가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고, 예상치 못한 실패와 시련, 좌절을 겪는다 해도 우리가 그 안에서 얼마든지 기쁨을 찾아내고 행복을 누리며 깊은 깨달음을 얻기 때문이다. p. 24(여행의 이유 김영하)
여행도, 책 읽기도, 삶도 속도와 거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어쩌면 목적지 조차도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가는 길을 못 찾아 헤매기도 하고, 장애물이 있어 돌아가야 할 때도 있고, 타이어가 펑크나 잠시 고칠 시간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포기하지 않고 그 길을 가다 보면 어딘가에 도착하게 된다. 그곳은 내가 원하던 목적지가 아니고 전혀 다른 곳일 수도 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기쁠 수도 실망할 수도 있고, 전혀 다른 곳에 도착해도 기쁠 수도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러고 나면, 우리는 또 여행을 떠나고 싶어 질지도 모른다.
목적지가 중요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연연해할 필요는 없다. 목적지만 바라보고 속도과 거리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보낸다면 내 곁을 지나가는 아름답고 소중한 사람들과 풍경이나 순간의 느낌들이 채 가져 보기도 전에 스르르 빠져나가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을 온몸으로 만끽하라고 실패와 새로운 여행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다시 여행을 준비하며 상큼한 표정을 짓는 주인공'들이 보여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