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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ly Jan 03. 2025

아이다호 (1991)




인생의 영화를 꼽으라면 언제나 <아이다호>를 꼽곤 했다. 열여섯 살에 처음 본 뒤로 이 영화를 넘어서는 영화들도 있었지만 어쩐지 그 뒤로는 이 영화가 인생의 영화로 굳어져 버렸다. 개봉 당시에는 이 영화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었다. 검열로 여기저기가 잘려나간 탓에 내용을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흥행에도 참패했다고 들었다. 십 대였던 내가 19금 딱지를 무시하고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주인공을 맡은 리버 피닉스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


재미가 없거나 지루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당시 한국에 이런 장르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관객에 따라서는 생소하다고 느낄 수 있을 법한 영화였다.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어린 나로서는 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이 영화를 처음 본 순간 지금까지 봤던 모든 영화는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삼 개월, 육 개월 넘게 자려고 누울 때마다 이 영화가 생각났다. 무엇이 나를 사로잡은 것인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꿈속에서까지 영화가 계속 재생되고 있었다. 지평선을 가득 메운 끝없는 하늘과 황무지 사이에 길게 뻗은 도로. 길 위에서 리버 피닉스는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길 모양만 보면 내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어. 분명히 와본 적이 있거든. 이렇게 생긴 길은 아무 데도 없어. 하나밖에 없는 사람 얼굴처럼. 


늘어진 테이프에서 나는 것 같은 몽롱한 선율이 흐르는 동안 리버 피닉스는 경련을 일으키면서 도로 위로 쓰러진다. 사지가 굳어 발작하고 있는 그의 몸 위로 ‘기면 발작증 - 갑자기 깊은 수면에 빠짐’이라는 자막이 떠오른다.


리버 피닉스는 1993년 22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반전 운동, 채식주의, 사랑과 평화를 내세우며 히피 생활을 한 부모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강물이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영화를 촬영하던 당시 리버 피닉스는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머리를 파묻고 있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1991년 영화가 개봉된 뒤에는 베니스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마이크(리버 피닉스가 맡았던 배역)는 쓰러져서 부들부들 떨다가 대평원 한가운데 외따로 떨어져 있는 통나무집 위로 구름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는 환영을 본다. 통나무집 앞에서 어머니가 그를 무릎에 앉혀놓고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 시애틀


시애틀에서 마이크는 중년 남성에게 몸을 팔았다. 몸을 팔아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것이 그의 생존 방식이었다. 손님을 구하지 못하는 날에는 노숙을 해야 했다. 마이크의 친구인 스콧(배우는 키아누 리브스)도 마이크처럼 남창 노릇을 하며 길거리 생활을 전전하고 있었다. 스콧은 마이크가 손님 방에서 발작을 일으켜서 쫓겨나면 안전한 장소로 데려가 주는 등 마이크를 돌봐주기도 했다.



 

- 포틀랜드


갈 곳 없는 스콧과 마이크는 손님의 차를 얻어타고 포틀랜드로 돌아온다. 거리의 소년들은 패스트푸드점에 앉아 남창 노릇을 하면서 겪었던 경험담들을 공유한다. 이 장면은 왠지 다큐멘터리 속의 한 장면 같은데 감독 자신도 LGBT 문화와 약물과 밴드 음악, 독립영화 같은 하위문화에 익숙하기 때문인 것 같다. 거스 밴 센트 감독은 성소수자이면서 직접 언더그라운드 밴드를 조직한 적이 있었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태평양 연안 미국 서부 도시들에서는 당시 너바나, 앨리스 인 체인스, 펄 잼 등이 주축이 된 ‘시애틀 그런지’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이 영화가 상업 영화와 독립영화의 경계 어딘가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도 서브컬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 듯하다.



포틀랜드의 어느 건물 옥상에서 노숙을 하고 깨어난 두 사람은 머리를 산발한 밥이 ‘나는 본 적이 없다네 나무처럼 사랑스러운 시를’이라는 시 구절을 읊으면서 걸어오는 모습을 본다. 거리의 청년들은 ‘사기꾼 밥, 뚱땡이, 떠벌이, 산타할아버지’라고 놀려대며 밥을 반긴다. 밥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남자로 거리의 청년들에게는 정신적 지주 노릇을 하고 있었다. 밥이 머물고 있는 하숙집은 부랑아들의 성지이자 아지트였다. 스콧은 학교에서보다 밥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배웠고 밥이야말로 자신의 진정한 아버지라고 말한다. 스콧이 돌아온 것을 보고 밥은 기세 좋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스콧, 네가 날 타락시켰어. 널 만나기 전에는 나도 순수했었는데. 이제 사악해지는 것만 겨우 면했어. 전에는 성인군자였는데. 욕은 좀 했어도. 도박은 일주일에 일곱 번밖에 안 했고 아이들도 몇 달에 한 번밖에 안 건드렸잖아. 내 아이들이 나를 타락하게 만들다니. 교회가 어떻게 생겼는지 까먹었다면 나도 벌 받았을 거야.

당신도 변했구만. 이제 도둑질이 아니라 설교를 하네?

도둑질은 내 직업이야. 자기 직업에 충실한 건 죄가 안 되지.


스콧이 밥의 무리와 어울려 다니면서 사고를 치고 다닌다는 소문은 스콧 아버지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스콧의 아버지는 포틀랜드의 시장이었다. 스콧은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부유한 상류층 가문의 자제였다. 스콧의 아버지는 아들의 행방을 수소문하여 그를 불러들였다. 아버지의 질타에도 스콧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기 때문에 지병이 생겨 힘들어하는 아버지를 보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콧이 부친에 대한 반항심에서 일탈을 이어간다면 마이크는 삶의 고단함에 지쳐 어머니를 그리워하게 된다. 기면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마이크는 어머니가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는 듯한 환영에 사로잡히곤 했다. 힘든 삶을 버텨내는 사람들에게 어머니는 유일한 안식처이기 때문이다. 마이크는 어릴 때 이후로 행방이 묘연해진 어머니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한다. 마이크의 형 리처드가 아직 고향인 아이다호주에 살고 있었다. 마이크와 스콧은 영화 첫 장면에 나왔던 드넓은 하늘과 들판뿐인 국도로 들어섰다.




- 아이다호


오토바이가 고장 나는 바람에 두 사람은 황무지의 동굴 근처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밤을 보내게 되었다. 스콧이 말했다.


떠날 때 가정부가 어디 가느냐고 묻더군. 그래서 대답했지. 어디서 뭘 하든지 간에 좋은 하루 보내라고(Wherever, whatever, have a nice day). 


이 대사는 <아이다호> 팬들 사이에서는 전설이 되어버린 문장이다. 단순한 인사말 같지만 인생이라는 길고 지난한 길 위에서 관조적인 위로 한 마디를 툭 던지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마이크는 모닥불을 바라보면서 스콧과 진솔한 이야기, 진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말한다. 


나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어. 돈을 받지 않고도….



(부모를 포함하여)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마이크는 언제나 남자를 상대로 몸을 팔아왔다. 젊은 남자의 몸을 찾는 사람들 대부분이 중년 남자들이기 때문이다. 병아리가 처음 품어준 사람을 엄마라고 여기고 쫓아가듯이 마이크는 자연스럽게 자신을 돌보아준 스콧을 사랑하게 되었다. 돈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금전 거래를 통해서만 타인과 친밀한 접촉을 할 수 있었던 마이크가 건넬 수 있는 유일한 사랑 고백이었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마이크에게 스콧은 세상과도 같았다. 물론 스콧의 처지는 그것과는 달랐다. 그는 마이크 말고도 가진 게 많고, 돌아갈 곳도 있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스타와 팬의 관계 비슷해 보인다. 팬이 스타에게 갖는 마음과 스타가 무명 팬에게 갖는 마음이 같을 수는 없다. 일시적으로 우정과 교류가 싹 틀 수는 있지만 팬이 스타에게 헌신하는 것 같은 그런 헌신을 스타가 팬 개인에게 쏟아주는 일은 결코 없다. 마이크 역시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스콧은 마이크에게 가끔 연민을 느끼고 우정을 느끼지만 마이크처럼 통째로 뿌리 뽑힌 삶의 조건을 경험해본 적은 없다.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해할 수도 없다. 마이크가 스콧을 사랑하는 것 같은, 존재를 다 바쳐서 헌신하는 그런 사랑을 스콧은 마이크에게 줄 수 없다. 



리처드는 아직 아이다호의 고향집에 살고 있었다. 형과 재회한 마이크는 어렸을 때부터 항상 의심해왔던 대로 리처드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게 된다. 마이크는 친형인 리처드와 어머니의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자식이었다. 마이크는 충격을 받고 발작을 일으키면서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오열한다. 그 모습을 본 리처드는 마이크에게 엽서 한 장을 건네주었다. 로마에서 어머니가 보내온 엽서였다. 어머니는 로마의 한 식당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고 있었다. 마이크는 기어이 어머니를 찾아가 보기로 하고 스콧도 마이크를 따라나선다. 



 - 로마



어머니가 엽서를 보내온 곳은 로마에서도 차를 타고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목가적인 시골 마을이었다.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풑밭 너머 돌로 지은 오래된 집 한 채가 서 있었다.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집주인의 조카라는 소녀가 마이크의 어머니는 오래전에 이곳을 떠났다고 말해주었다. 마이크는 이곳에서 어머니의 마지막 남은 발자취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집주인의 조카라는 소녀는 자신을 카르밀라라고 소개했다. 스콧은 카르밀라의 여성스럽고 순수한 분위기에 한눈에 반해버렸다. 어린 카르밀라 역시 무모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콧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두 사람이 옆방에서 사랑을 나누는 소리를 들으면서 마이크는 잠을 설친다. 다음 날 아침 마이크는 나무 아래 앉아 울고 있는 카르밀라를 보았다. 마이크는 카르밀라를 마음 깊이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스콧은 이제부터는 개인적인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말한다.

 

언젠가 우연히 만나게 되겠지.

 

미국으로 돌아갈 여비 몇 푼을 마이크의 손에 쥐어주고 스콧은 카르밀라와 떠나버렸다.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서 카르밀라와 새 삶을 살아갈 작정이었다. 



 - 포틀랜드



미국으로 돌아온 마이크는 다시 길거리에서 몸을 팔면서 밥 일당과 합류한다. 모두가 모여 있을 때 정장을 빼입고 수행원들에게 둘러 쌓인 스콧과 카르밀라가 차에서 내렸다. 바로 그 전날 스콧의 아버지가 사망하는 바람에 스콧은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아 매우 부유해져 있었다. 밥은 스콧과 카르밀라가 들어간 연회장으로 따라 들어간다.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은 누더기나 다를 바 없는 옷을 걸친 밥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밥은 사람들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스콧에게 농담을 던졌다. 당연히 자신을 환대해 주리라 믿었던 것이었다. 스콧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렇게 말한다.


난 당신을 몰라요. 그러니 날 좀 내버려 둬요. 한때 당신이 나한테 나쁜 일을 가르친 적도 있었지만. 그때부터 난 계획을 세웠어요. 당신이 필요한 때가 있었던 거예요. 당신을 사랑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요. 그러니 다시는 내게 접근하지 말아요.




충격을 받은 밥은 아지트로 돌아와 잠을 자던 중에 심장마비를 일으킨다. 소년들은 스콧이 밥을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스콧 아버지의 장례식이 열리는 곳 바로 옆에서 밥의 장례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두 장례식은 초대된 사람의 면면이나 분위기로 봤을 때 정반대에 가까웠다. 스콧 아버지의 장례식에는 검은 정장을 갖춰 입은 사람들이 목사의 주재하에 경건하고 엄숙하게 장례를 치르고 있었다. 밥의 장례식에서는 그를 사랑했던 거리의 청년들이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한 바탕 난리를 부린다. 아이들 중의 누군가가 밥, 밥, 밥을 외치기 시작했다. 소년들은 어느새 원시 부족의 캠프파이어처럼 밥이라는 리듬에 맞춰 절규하고, 껴안고, 물건을 때려 부순다. 스콧 아버지의 장례식에 모여 있던 사람들도 소란을 눈치 채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스콧과 마이크,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영원과도 같았던 그 순간, 두 사람은 서로가 지향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스콧에게 친아버지는 육신의 아버지인 동시에 이 세상의 아버지였다. 밥은 정신적 지주이자 영혼의 아버지다. 친아버지가 주류 세계와 힘과 질서를 상징한다면 밥은 비주류로 이루어진 세계, 무질서와 저항을 상징한다. 두 사람의 장례식이 나란히 치러지는 동안 스콧은 밥의 세계를 통과하여 친아버지의 세계로 나아간다.


 

- 아이다호



마이크는 다시 아이다호로 가는 길 위에 서 있다. 첫 장면에 나왔던 그 텅빈 길이다.


나는 길의 감식자. 평생 길을 맛보며 살아가겠지.
이 길은 끝나지 않아. 세상 어디까지라도 갈 수 있어.


추위나 비를 피할 방 한 칸도, 가족이나 기댈 곳도 없는 마이크를 변함없이 받아주는 것은 길밖에 없다. 마이크는 길바닥에서 잠을 자고 몸을 팔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는 언제나 길을 맛보는 사람, 길 위의 순례자로 살아갈 것이다.



 

발작을 일으킨 마이크는 길바닥 한가운데에 쓰러진다. 트럭 한 대가 다가와 멈춰 섰다. 운전자는 마이크의 지갑과 점퍼, 신발을 훔쳐 달아나 버린다. 엔딩 자막이 올라올 때쯤 다시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길바닥 위에 쓰러져 있는 마이크를 싣고 간다. 무슨 목적으로 싣고 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장기 밀매범이나 인신매매범이나 남색가들일 수도 있다) 이대로 끝나면 너무 신파 같아 보일까 봐 그런 결말로 처리한 것 같았다.


영화 OST 중에 에디 아놀드의 ‘캐틀 콜’이라는 곡이 있었다. '캐틀 콜'은 목동들이 소를 불러들일 때 부르던 요들송이다. 요들송이 어울리는 영화도 흔치 않겠지만 이 영화의 아프고 쓸쓸하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을 불러 일으키는 정서에 딱 어울리는 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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