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심이라는 이름의 오만

by 고은아


최근 남편한테 들었던 말 중에 제일 달콤했던 거, 뭔지 알아?


“내가 돈 많이 벌게. 자기는 일 안 해도 돼. 내가 다 책임질게.”


사실 난 일 욕심도 많고, 애 낳고도 계속 내 일하고 싶은 사람이거든. 근데 참 이상하지. 그 말을 듣는데 마음이 툭 내려앉으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거야. ‘나 일하고 싶은 사람인데, 왜 이 말이 이렇게 안심이 되지?’ 약간 혼란스러웠지.


그러다 얼마 전 남편이 첫 월급을 받았어. 이민 초기 리모델링 하느라 직장 못 구하고, 집은 어수선하고, 미국 시스템은 느려터졌고, 모아둔 돈은 계속 빠져나가고, 우리 꽤나 맘고생 했거든. 근데 남편이 이제 직장을 잡고, 첫 월급을 받은 거지!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받는 것에 남편이 진짜 뿌듯해했어!


그런데 바로 그날, 통장에서 숫자들이 숭숭 빠져나가는 거지. 이민 초기라 정착하느라 큰돈 나갈 데가 수두룩하잖아. 신났던 남편이 축 처진 강아지처럼 의기소침해져가지고는 그러더라.


"아, 아무래도 자기도 일해야겠다. 여기 물가 진짜 장난 아니네."


와, 그 순간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거야. 난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돈 버는 것도 즐기는 사람인데! 왜 이 말이 배신감처럼 느껴질까? 난 그때까지도 내 마음을 알지 못했어.


며칠에 걸쳐 화가 가라앉고, 그 자리에 시커먼 불안함이랑 조급함이 파도처럼 밀려오더라. 온몸의 근육이 꽉 조여지면서 숨이 턱 막히는 그 기분... 두려움 안녕?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사실 얼마 전 내가 '한국에서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잘 컨트롤하지 못해서 후회된다.'라고 썼거든. 그 똑같은 감각이 찾아온 거야.)


장소가 바뀌어도 똑같은 감각이라면... 이거 분명 내 안에 원인이 있겠다 싶었어.


내 몸은 동트기 전 일찍 깨어나졌고, 난 그 몸을 데리고 'I'm not the body, I'm not even the mind' 되뇌며 찬팅을 했어. 내 몸 안에서 울리는 진동에 집중하면서 이 불편한 감각을 멀리 떨어뜨려놓고 바라보려 노력했지.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눈물이 터졌어.


남편의 그 말이 나에게는 이렇게 들렸던 거야.


"너 이제 미국 정착 끝났으니까, 지금부터는 혼자 다 알아서 해."


이건 남편의 본심이 전혀 아니라는 걸 알아. 하지만 내 안의 에고가 그렇게 굳게 믿고 있었던 거지. 그러면서 깨달았어.


아, 내 두려움의 뿌리는 ‘나 혼자 다 해내야 한다’는 지독한 압박감이었구나.


그 즉시 옛날 기억들이 실타래 풀리듯 마구 떠오르더라고. 내가 인생에서 바닥을 쳤을 때, 나를 끌어올려 준 건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의 도움이었거든. 그때마다 난 숨을 돌릴 수 있었어. 당시엔 내가 잘나서 버틴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난 한 번도 혼자인 적이 없었어.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난 늘 누군가의 사랑과 보호 아래 있었던 거야. (물론 그때마다 '살고자 했던 나의 의지'도 분명히 있었어)


이민 과정도 똑같았어. 여기까지 오면서 내 힘으로만 한 게 단 하나라도 있을까? 없지.


마침 지난 주일 교회에서 들었던 말씀도 떠오르더라. "혼자 다 한다는 생각은 오만이다.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내가 다 계획하고 해결하고 드는 것은 오만이라는 말씀이 계속 마음에 남아있었거든. 그리고 오늘 명상하며, '혼자 다 책임져야 한다는 믿음이 내 두려움의 씨앗'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지 뭐야.


내게 너무 소중한 깨달음이라 메모하려고 감사 저널을 폈는데, 세상에. 오늘의 주제도 똑같은 거야. 신비로운 동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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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는 삶을 대하는 가장 진실한 태도다. 우린 스스로를 만든 적도, 스스로 태어난 적도 없다. 삶은 결국 주고받는 과정이다. 우린 타인의 도움과 선물, 그 다정함에 기대어 살아가는 존재일 뿐이다.


참, 수호천사는 이렇게 또 메시지를 보내주시네.


맞아. 우린 결코 혼자가 아니야. 늘 보호받고 있고, 가야 할 길로 세심하게 인도받고 있어. 다만 내 마음이 좁아지면 그 따뜻한 손길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을 뿐이지.


물론 사람들은 살아가며 서로 상처를 줘. 그래서 우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나 혼자 해야 해, 더 독립적이어야 해’라는 단단한 벽을 쌓게 된 걸지도 몰라. 생각해 보면 독립적이라는 건 정말 양날의 검이야. 세상을 씩씩하게 살아갈 힘을 주기도 하지만, 자칫하면 타인의 도움과 세상의 사랑을 밀어내고 스스로 고립을 자처하게 만드니까.


남편의 말이 내 심장을 쿡 찔렀던 건, 실은 남편도 나만큼이나 ‘혼자 다 책임져야 한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이제 알겠어. 서로 보고 싶지 않았던 연약한 부분이 맞부딪힌 거지.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이제는 내가 조금 더 넓어져서 덜덜 떨고 있는 남편의 그 어린 마음까지 따뜻하게 보듬어주고 싶어.


사실 지금 난 불안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어. 신은 계속해서 사람들을 통해, 또 이런 메시지들을 통해 내게 길을 보여주고 계시거든. 내 곁에는 이미 도움을 주는 고마운 존재들이 정말 많아. 이 글을 읽어주는 너희도 그중 하나이고.


아, 난 이미 혼자가 아니었구나. 모든 걸 혼자 책임지고 있지 않았구나. 그 사실을 오롯이 받아들이니 마음이 너무나도 편안해져.


우리 각자가 나아가는 길 위에는 이미 수많은 존재가 미소 지으며 길을 안내하고 있어. 우리 그걸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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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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