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프로이트의 두가지 열망

by 리나

문제 : https://brunch.co.kr/@lilyofthevalley/111


각 해설의 아래에 [상식], [언어이해], [작업기억], [논리적 비약] 이라는 태그가 달려 있습니다.


[상식] 태그의 오류를 잡아내지 못 했다면, 기초 인문학 지식을 조금 쌓아보는 것이 좋습니다. 배경지식이 늘어나면 독해의 속도를 높여줍니다.


[언어이해] 태그의 오류를 잡아내지 못 했다면, 글을 너무 문자 그대로만 읽는 습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문장 사이의 행간과 뉘앙스를 파악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작업기억] 태그의 오류를 잡아내지 못 했다면, 앞의 내용을 금방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긴 글을 읽을 때 등장인물의 이름이나 연도에 신경을 써서 읽는 습관을 들여보세요.


[논리적 비약] 태그의 오류를 잡아내지 못 했다면, 당신은 가짜 뉴스나 과장된 광고에 쉽게 속아넘어갈 만큼 비판적 사고력이 부족하다는 의미입니다. 글의 흐름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세요.




로마에 대한 영원한 충성심[적개심]을 맹세

[상식] 역사적 사실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이 로마의 적이라는 것은 역사적 상식입니다.


그가 이루지 못한 ... 반종교적 정치운동을 조직하고자 하였습니다.

[논리적 비약]

프로이트가 한니발을 자신의 롤 모델로 삼았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비약하여 종교 및 정치 운동으로 비약시켜버렸습니다.


다수의 학생 틈에서 철저한 주류[비주류]로 남기를

[언어이해] 문맥 파악

뒤에 있는 문장에서 "침묵하는 다수에 속하지 않겠다"는 문맥상 주류로 남는다는 표현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고등학교 시절[대학 시절] 프로이트는 브뤼케 교수의

[작업기억] 단기 작업기억 유지

앞 문단의 "1873년 대학에 발을 디뎠다"는 정보를 유지하고 있어야 오류를 잡을 수 있습니다.


브뢰헬[브뤼케]이 강조한 '관찰, 발견, 이론'이라는

[작업기억] 인물의 발음의 유사성

앞서 언급된 스승의 이름 '브뤼케'를 기억하고 있어야, 유사한 발음의 '브뢰헬'을 걸러낼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생리학자/신경학자]의 길을 포기하고

[작업기억] 단기 작업기억 유지 및 연구분야에 대한 상식

앞 문단에서 그가 '신경계통 해부생리학'을 연구했다는 정보를 기억해야 '심리학자'가 틀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새로운 길로 우유부단하게[단호하게] 방향을 선회

[언어이해] 문맥 파악

결혼과 생계를 위해 진로를 바꾼 행동은 맥락상 결단에 해당하며, 우유부단이란 표현과 결단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는 매일 약혼녀 마타하리[마르타]에게

[작업기억] 단기 작업기억 유지

앞서 등장한 프로이트의 약혼녀의 이름 '마르타'를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행동주의 심리학[정신분석학]의 태동은

[상식] 심리학 상식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라는 것은 기초 교양 지식입니다. 행동주의 심리학의 유명한 학자로는 파블로프나, 스키너가 있습니다.


한니발을 증오[흠모/동경]하던 소년의 투쟁심

[언어이해] 문맥 파악

앞의 문단에서 신화적 영웅이라고 하였고, 그의 행적을 따라하고 싶어 했으므로, 문맥상 증오라는 감정 단어는 어색합니다.




카르타고의 위대한 장군 한니발은 어린 시절 아버지 하밀카르에게 로마에 대한 영원한 적개심을 맹세했습니다. 그는 평생을 로마 공화정과 싸우며 코끼리를 이끌고 알프스산맥을 넘는 기적을 연출했지만, 정작 그토록 갈망하던 로마 땅은 끝내 밟지 못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비운의 영웅은 훗날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신화적 우상이 되었습니다. 사춘기 시절의 프로이트에게 한니발과 로마의 대립은 단순한 역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의 끈질긴 투쟁과 가톨릭 조직체의 완고함을 상징하는 거울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에 만연했던 반유대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프로이트는 한니발의 끈기와 고집을 자신의 삶의 지표로 삼으며 승리의 깃발을 들고 로마로 입성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1873년, 빈에서는 제국의 위기를 감추고 근대의 장밋빛 미래를 선전하기 위해 만국박람회가 화려하게 개최되었습니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가 도시를 감싸고 축제의 열기가 가득 찼던 그해, 프로이트는 대학이라는 지식의 요람으로 발을 디뎠습니다. 그는 부유하고 보수적인 다수의 학생 틈에서 철저한 비주류로 남기를 선택했습니다. 이는 침묵하는 다수에 속하지 않겠다는 본질적인 확신이자, 앞으로 그가 겪게 될 비난과 고립을 예고하는 전조이기도 했습니다.


대학 시절 프로이트는 브뤼케 교수의 지도 아래 1876년부터 1882년까지 신경계통 해부생리학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그는 춥고 축축한 실험실에서 뱀장어와 가재를 수없이 관찰하며 과학적 엄밀성을 체득했습니다. 브뤼케가 강조한 "관찰, 발견, 이론"이라는 세 단계 원칙을 고집스러울 정도로 충실히 따르며 2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의 목표는 신경질환의 치유가 아닌, 순수한 신경세포 연구 그 자체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견고했던 학자로서의 길을 획기적으로 튼 계기는 다름 아닌 사랑과 현실이었습니다. 현미경 속의 미시적 세계에 빠져 있던 프로이트를 현실 세계로 끌어낸 인물은 바로 마르타 베르나이스였습니다. 함부르크 출신의 유대인 지식인 집안 딸이었던 그녀는 스무 살의 풋풋함으로 프로이트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습니다. 프로이트는 그녀에게 정복당했음을 인정했고, 그녀와 가정을 꾸리기로 결심했습니다.


결혼이라는 현실적 목표를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고, 자신의 이름을 건 병원 명패가 필요했습니다. 결국 그는 유망했던 생리학자의 길을 포기하고, 임상 의학이라는 새로운 길로 단호하게 방향을 선회했습니다. 1882년 6월 약혼을 하고 1886년 9월 결혼식을 올리기까지, 연구와 기다림으로 점철된 4년 동안 그는 매일 약혼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신분석학의 태동은 거창한 학문적 야심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니발을 흠모하던 소년의 투쟁심, 그리고 한 여인을 사랑하여 가정을 지키고자 했던 한 청년의 절실한 현실 감각이 결합하여 만들어낸 결과물입니다. 프라이베르크에서 시작되어 빈에서 꽃피운 그의 여정은 고립되어 있었으나 결코 외롭지 않았으며, 그 끝에는 인간 정신의 심연을 탐구하는 위대한 발견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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