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그리고 '마지막' 스튜
조금은 멍청해도, 솜털로 뒤덮인 발은 앙증맞고,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당근을 오물거리는 깜찍함의 결정체 토끼를 먹는 건 개구리 뒷다리 스테이크를 먹는 것과는 사뭇 다른 일이다. 나는 나의 첫, 그리고 아마 마지막이 될, 토끼를 몰타에서 먹었다. 유쾌하지만은 않은 기억이다. 토끼를 먹게 된 계기마저 별것 아니어서, 2023년 7월 1일 혹은 2일 오후 5시 12분 무렵에 하얀 식탁보 위에 깔려 나온 토끼의 맛을 떠올리면 기분이 괜히 불쾌하달까.
몰타의 천연 풀장 가르 시에 다녀와 잠시 낮잠을 청한 후 일어나니 오후 4시. 비행기 연착의 여파로 공항에서 못 잔 잠을 정신없이 보충하고 의식을 차리니, 호스텔 사람들의 면면이 바뀌어 있었다. 좋지 못한 쪽으로.
7월 초 발레타의 날씨는 지중해에 접해 있음에도 습하지 않았다. 폭포 옆 바위에서 맞는 청량한 바람 같은 바닷바람이 얼굴을 간질였다. 석회암을 깎아 올려 세운 도시의 아이보리 벽들이 습기를 머금기라도 한 것일까. 한낮의 태양은 따가웠지만, 망루에 서면 땀 흘러내리는 옆머리를 눕히는 바람이 성벽을 타고 불어왔다.
다만 아무리 바람이 땀을 말려도 그 냄새는 쉬이 가시지 않았다. 수년 전 바르셀로나에서 하룻밤을 보냈을 때 "도대체 호스텔에 왜 연령제한이 있는 거지?"라는 궁금해했던 나의 의문이 이곳 몰타로 떠나와 풀렸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쓰러지듯 호스텔의 침대에 누웠을 때는 자각하지 못했다. 다만 일어나 보니 코가 시큰거렸다.
손을 씻고, 간이부엌의 수전에서 수돗물을 받아 병을 채우고 다시 방으로 돌아오니 원인이 분명해졌다. 2층 침대가 세 개였던 방의 방문과 창문은 모두 열려 있고, 문 옆 벽 위의 에어컨이 쉴 새 없이 냉기를 뿜어대고 있음에도, 방을 가득 메운 건 중장년 남성 셋의 코 찌르는 땀냄새와 체취였다. 다행히 코는 금방 마비되었고, 밤에 훈련소보다 더한 코골이에 시달리겠다는 직감이 나를 강타했으나 나는 애써 불길한 예감을 밀어냈다. 보통 이런 류의 불길한 예감은 예감이라기보다는 예언의 성격을 띠어 불행하게도 틀리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
그렇게 나가기 위해 분주히 짐을 싸던 중, 냄새가 나지 않으며, 개중 가장 제일 젊어 보이는 터키계 독일인 아흐멧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잠시 나갈래?"
"좋지. 잠시 여권만 챙기고." 내가 답했다.
짐을 대충 챙긴 후, 방을 나서며, 내가 물었다. "쉽지 않지?"
아흐멧은 "예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쉽지 않아."
별달리 당기는 것도, 꼭 여기까지 와서 먹어봐야겠다 하는 것도 없었던 우리는 거리의 식당가를 잠시 거닐었다. 벽과 건물 사이에 식당들이 늘어서 있고, 노상 테이블들은 반대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이보리 벽과 하얀 차양 아래의 하얀 테이블들이 꽤 괜찮은 조화를 이뤘다. 오후 5시, 몰타의 거리는 맨발로 걸으면 여전히 돌바닥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적당히 달궈져 있었으나, 가끔 불어오는 바람은 선선했다. 그럼에도 계속 걸어 다니면 땀이 날 정도의 기온.
"적당한 데 찾아서 앉을까?" 추가적인 샤워는 피하고 싶었던 나는 먼저 말을 던졌다.
아흐멧은 어깨를 들썩이고 손을 펼쳤다. "어디든".
나는 "테이블이 두 개 정도 비어 있는 식당이 맛있지 않을까? 만석이면 맛은 있겠지만 기다리고 싶지는 않으니."라며,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식당에 앉았고, 메뉴판을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독일인답게 아흐멧의 선택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우선은 맥주. 나라고 뭐 다를까. 일단은 맥주 한 잔. 맛있으면 두 잔. 아니 세 잔. 사실 네 잔도 괜찮다. 다른 테이블을 슬쩍 곁눈질해 보니 CISK라는 로고가 적힌 맥주잔이 여럿 눈에 띄어 맥주는 CISK로 결정. 라거라니 기대해도 좋을 것만 같았다.
음식을 기다리며, 서로 대화를 주고받다 할 말이 떨어질 때 즈음 맥주가 나왔다. 달콤하지도 그렇다 한들 쌉싸름하지도 않은 끝맛은 쓴 꿀과 단 칡을 물에 탄 것 같았고, 다 떠나서 라거라 칭하기에는 묵직한 바디감이 전무했다. 한국처럼 바다에 접한 나라들 맥주는 다 이리 밍밍한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며, 물통을 꺼내 입을 헹궜다. 더 볼 필요도 없이 최악이었다.
물론 실패로 돌아갔지만 메뉴판에 맥주가 있음을 발견하고, 여러 테이블을 훑고 무엇을 마실지 결정하기까지는 찰나의 순간이면 충분했다. 반면, 메인 디쉬를 정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다. 저렴한 게 가금류다 보니 닭, 오리 등은 이미 질릴 대로 질려 끌리지 않았고, 소고기는 어디서나 너무 비쌌다. 그렇게 내 눈에 들어온 "Traditional Maltese Rabbit Stew". Stuffat tal-Fenek(스투팟 탈-페넥). 몰타까지 왔으니 현지 전통 음식을 한 번 경험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호기심이 나를 충동질했다.
토끼 스튜가 유명해진 배경도 흥미로웠다. 음식이 도무지 나올 기미를 안 보이자 자연스레 우리의 시선은 휴대폰에 갔다. 나는 검색을 통해 1999년 발간된 한 논문 'Tax Xiber, 몰타의 토종 토끼'를 읽었는데, 몰타 토끼가 대중화된 배경이 담겨 있어 흥미로웠다.
몰타 토끼 클럽, 가죽 및 깃털 연합, 토끼 선별 센터에 적을 두고 있으며, 논문을 작성한 J. 가우치-마이스트르는 1530년대에 성 요한 구호 기사단, 즉 몰타 기사단이 도착하기 불과 4개월 전인 1530년 6월에 한 칙령이 내려졌다고 밝힌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중세 암흑기는 몰타의 토끼 역사에 있어서도 어두운 시기였다.".
칙령의 내용은 바로 특권층을 제외하는 모든 사람에게 섬 전역에서의 야생 토끼뿐만 아니라 산토끼 및 자고새(꿩과 유사한 유럽의 새)의 사냥을 금지하는 것. 이 칙령은 여러 대수도사들을 거쳐 유지되었으며, 동시에 토끼 사냥에 대한 처벌 역시 강화되었다고 한다.
그 처벌의 수위가 어느 정도인가 하니, '남성에게는 최대 5년 동안 노를 젓는 갤리선의 노역형과 여성과 청소년에게는 태형과 추방형'이 내려졌다고...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사냥의 허용 역시 본의 아니게 대수도사 중 하나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프란체스코 시메네스 데 텍사다(Francesco Ximenes de Texada) 대수도사는 당시 지나치게 비싸진 빵을 대체할 식량 자원으로 토끼에 주목하고, 국고를 채우고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수입원으로써의 토끼를 고려했다고 한다.
그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사냥을 전면적으로 금지하고 토끼 수를 늘리는 게 계획의 1단계. 일종의 선순환, 즉 토끼가 번식하여 개체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 고기 공급도 폭증해 가격의 감소가 일어나고, 서민층도 빵 대신 토끼를 사 먹을 수 있는 구조적 변화를 꾀했다. 다만, 탁상 행정가답게 그 정도의 토끼가 번식하려면 그보다 더 많은 농작물을 먹어치워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해 버렸다.
당연히 토끼들은 마구잡이로 농작물을 먹어치웠고, 이에 농민들의 불만과 사회적 불안이 격화돼, 사제들의 봉기로까지 이어졌다고. 물론 겨우 18명이 나타나 세인트 엘모 요새의 화약고 폭파를 거론했던 9월의 봉기는 단기간에 끝났지만, 긴축 재정을 도입한 대수도사에 대한 여론은 좋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여론으로 인해 사냥 금지 조치는 1776년 5월 19일의 칙령으로 철회되었고, 이후 사유지에서 모든 무기나 장비를 사용한 토끼 사용이 허용되었다고 한다.
다만 이후의 토끼 가격은 시메네스 대수도사의 의도처럼 떨어져, 다시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식재료로 거듭났고, 공급이 과잉됨으로써 결국 3세기를 지나 만리타향 한국에서 나고 자란 여행자에게 토끼 스튜라는 선택지를 제공하고 있었다.
전통적인 요리답게 페넥은 조리법도 꽤 복잡했다. 먼저 토막 낸 토끼 고기를 레드 와인, 마늘, 월계수 잎과 함께 하루 동안 재워두고, 이를 다음 날 노릇하게 구워낸다. 토마토 페이스트를 기본으로, 재워뒀던 와인 마리네이드 액체, 치킨 육수, 그리고 월계수 잎, 오레가노, 타임, 육두구 같은 다양한 향신료를 넣고 섞어 소스에 깊은 맛을 더하며, 마지막으로 스튜를 2시간에서 3시간 정도 푹 끓여 토끼 고기가 뼈에서 쉽게 떨어질 정도로 부드러워질 때 끓이면 완성이라고.
다만 결과적으로 나는 기대를 너무 키워버림으로써 실망하는 우를 범했다. 잡내가 조금 났고, 고기는 단단하고 담백했다. 소스는 우스터소스에 와인을 섞은 맛이라 특별할 게 없었다. 이미 맥주로 버린 혀에 미안했고, 22유로라는 거액이 빠져나간 지갑에 미안했으며, 마지막으로 토끼에 미안했다. 맛이 그저 그랬을 줄 알았다면 다른 고기를 먹었을 텐데...
그도 그럴 것이, 애완 소, 애완 지 (작은 돼지들은 있지만), 애완 개구리는 없지만, 애완 토끼는 버젓이 존재하지 않는가. 서양인들은 가끔 개고기를 먹는다고 한국인을 비난하는데, 개고기에 토끼고기까지 먹은 나는 도무지 변명을 떠올릴 자리가 없었다. 맛이라도 있었다면...
어정쩡하게 식사를 마친 후 아흐멧과 나는 1560년 축조된 성 베드로 바오로 요새(St. Peter and Paul Bastion)로 발걸음을 옮겼다. 요새는 상단부와 하단부로 나뉘어 있었다. Saluting Battery (환영 포대)로 알려진 하단부에는 크루즈 등이 기항했을 때 축포를 쏠 수 있도록 포가 몇 문 놓여 있었다. 다만 이날은 이미 오후 4시 즈음에 포를 발사해 직접 발포하는 장면은 보지 못했다. 상단부의 어퍼 바라카 가든(Upper Barraca Garden)은 환상적인 파노라마 뷰를 제공했다.
짙푸른 바다 아래로 노란 몰타의 건물들, 그랜드 하버와 쓰리 시티즈(Three Cities)가 펼쳐졌다.
정원은 아름다웠지만 머리를 스친 한 가지 의문은 바로 석주 위의 지붕이 다 어디 갔냐는 것.
아흐멧은 "이런 건 지붕 있는 게 더 보기 힘들지. 그래도 예쁘잖아?"라고 말했지만, 궁금한 건 알아봐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숙소에 가 확인해 봐야겠다는 다짐을 굳혔다.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고 해 질 녘 그리고 일출에 다시 오자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우리는 다시 호스텔로 돌아왔다. 돌아와 찾아보니, 원래 정원에 있었던 지붕은 1775년 사제들의 봉기로 날아간 모양. 토끼가 이렇게 무섭다.
이후 잠을 조금 자야겠다는 아흐멧을 뒤로하고 일몰을 눈에 담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일주일 동안 몰타에 머무를 그와 달리, 며칠 전 그림 하나 보겠다고 배낭 하나 달랑 챙겨 떠나온 내게 허락된 노을은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한쪽에는 이미 달이 떠 지는 해를 배웅하고 있었다. 나는 도시의 방문객을 맞이하는 시티 게이트 왼편의 정원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어퍼 바라카 가든이 나온다) 노을을 맞았다.
낮의 도시가 저물고 밤의 도시가 깨어나기까지. 한참을 돌벽에 앉아 해가 지고, 붉은 구름이 앉고, 다시 건물들이 빛나기까지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무엇이라 표현해야 할지 모를 노란빛을 비춰내는 석회암의 물결로 명멸하는 도시에서 숙소로 돌아기기 전 우습게도 마지막으로 든 생각은.
달 토끼. 달 토끼. 절구 찧으며 반죽 치대는 달 토끼와 달리, 정교하게 빚어낸 도시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나는 알람을 5시에 맞춰놓고 같은 방의 아저씨들이 코를 골기 전 잽싸게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