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렴하는 인생
‘나라는 인생도 저따위로 수렴하겠구나.’
2년 남짓한 시간 동안, 공항에서 보내는 서른 번째 밤이다. 끝날 기미 없는 지난한 공항 노숙의 반복이다.
오늘도 나는 본의 아니게 공항에 일찍 도착했다. 프론티어 항공(Frontier Airlines)의 모바일 체크인은 오늘도 말썽이었다. 매번 이런 식이다. 매번 말썽이어서 나는 가슴 졸이며, 마지막 비행편의 체크인 시간 전까지 공항으로 달려간다. 애틀랜타 공항은 오후 9시면 보안 검색대의 문을 걸어 잠가, 오전 6시 비행기에 맞춰 최소한의 수면 시간을 확보하려면 집을 일찍 나설 수밖에 없다.
6시 18분.
집을 떠나고 역에 도착하니 50분쯤. 그부터 나라는 존재의 추락을 실감한다.
지하철 티켓 발권기 네 대가 모두 먹통이다. 잠시 망설이다 잽싸게 사람 뒤로 따라붙어 요금을 내지 않고 전철에 올라탄다.
"한국이었다면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어 계좌 이체라도 했을 텐데."
변명해 보지만, 스친 진심은 다르다.
"2.5불 굳었네."
한심했다. 인심은 곳간에서 나온다는데, 쭉정이만 쌓인 이 곳간은 박정하다.
지하철 안에서는 흑인 남자 셋이 폴댄스라도 발명한 듯 봉을 잡고 흔들며 쿵쾅거린다. 눈꼴이 사납다.
"가방 끈이 짧아, 공공장소에서의 예의범절 따위는 배운 적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이것도 내가 이해하기를 포기한 미국 문화의 하나뿐일까."
나는 편견에 사로잡혀 그들을 재단한다.
"불우한 가정환경 탓일까, 아니면 차를 살 돈도 탈 돈도 없는 형편 탓일까."
하지만 나 역시 차를 살 돈도, 탈 돈도 없는 처지다.
그러나, 그저 흥이 조금 많은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사실 아무도 모를 일이다. 피상적인 수박 겉핥기 식의 관찰로 본질을 음흉하게 재단하는 나보다 그들은 적어도 진실하지 않은가.
"한심한 인생이 넷이다."
스무 살 무렵 즈음부터 사람 탓을 하지 않기로 했다. 어떠한 환경에서 어떻게 자라온 것인지에 대한 판단 없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에 대한 이해 없이, 막무가내식의 재단은 아무래도 불공평하다 생각했다.
몽골을 여행하며 고등학교 동창과 농담으로 지껄였듯, 가정교육을 제대로 혹은 전혀 못 받았다 생각하는 게 아무래도 편했다. 그러나 대학에서 교육까지 받으며, 기본적인 예의는 지킬 것을 종용하던 가정에서 자란 나의 변명은 어디 있는가.
궁색해 쥐구멍을 찾다 여기까지 떨어졌다. 대마 냄새 가득한 애틀랜타의 지하철, 공항의 돌바닥이라는 종착지까지.
배낭에 공간이 없으면 돈을 더 낼 생각은 하지도 않고 배때기에 노트북을 숨기고 타고, 시식코너에서 하나라도 악착 같이 더 주워 먹으며, 2.5불이 아까워 그저 무임승차하는. 이 거지근성은 어디서 근원 하는가. 자본주의를 악용하면서도 돈은 벌고 싶어 하는 괘씸한 인간이 나였다.
7시 30분
공항에 도착했다. 출국 게이트 뒤 원형 의자에 드리운 그림자는 추레한 인생의 어스름한 자취만 같다.
애용하는 노숙 장소가 하나둘씩 늘어난다는 사실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요금 아끼겠다고 슬리퍼를 옷 속에 감춘 채 비행기를 탈 준비하던 하급 인생은 이제 곤두박질치기 직전이다.
정상적인 경제 여건에 있는 사람이라면 공항에서 노숙할 일을 만들지 않는다. 아직은 젊음과 절약이라는 변명으로 나를 속여 넘기고 있으나 언제까지나 가능하지는 않겠다 생각한다.
대자로 뻗은 최하급 인생과 허리 굽은 하급 인생 사이, 눕지도 기대지도 못한 채 어정쩡히 스크롤만 내리고 있다.
그때 한 흑인 남자가 말을 건다.
"이봐."
고개를 끄덕이니.
"야."
밑도 끝도 없이 대뜸 묻는다.
"몇 시까지 공항에 가야 하지?"
"공항이 아니라 게이트로 가야 하는 거겠죠. 비행기가 몇 시이신데요?"
"10시."
어이가 없어, 잠시 말문이 막혔다.
"게이트가 어디냐고. 시발."
"9시면 문을 닫을 텐데요. 저 쪽에 있으니 지금이라도 뛰어가보세요."
그는 투덜거리며 떠난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눈을 흘기며. 무례하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무식하다.
"비행기 한 번 타보지 않은 인생은 있을 수 있겠지만, 공항에 와서 게이트에 대해 묻는 인생은 또 어떤 한심한 인생인가. 쥐가 들끓는 곳간인가."
찾아볼 생각도 없고, 물어볼 사람도 없어, 한껏 거들먹거리며 질문도 아닌 질문을 던져대는 밑바닥 인생 옆에, 내가 앉아 있다.
그 남자 떠나고, 수염 자국 거뭇하고 눈 풀린 백인 남자 하나가 나타난다. 동공이 초점을 못 맞춰대고, 가상의 인물과 통화를 하며 욕설을 퍼붓는다.
"야 시발, 넷플릭스 계정 있어?"
처음에는 나에게 하는 말인 줄도 몰랐다.
"나한테 하는 말인가요?"
"너 말고 시발 여기 누가 있는데?"
순간 넷플릭스를 지우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없습니다.”
대답이 또 없다. 무례하고 무식한 것들.
다시 책에 집중하려는데, 이번에는 툭툭 치며 묻는다.
"시발. 마이크 타이슨의 경기를 볼 건데. 시발. 이어폰을 끼는 게 나을까? 시발 대답해."
그나마 공중도덕에 대한 최소한의 인식은 있는 것 같아, 반사적으로 답한다.
"그래주시면 정말 고맙죠."
"당연하지."
"재밌게 보십시오."
내가 틀렸다. 대관절 이어폰이 무슨 소용인가. 경기 중계소리보다 시끄럽게
"좋았어. 그렇게 씨발 쳐야지. 씨발. 씨발 것들이 씨발. 씨발. 씨발."
욕을 퍼붓는데. 잠을 자기는커녕 책 한 줄에 집중할 수도 없다.
그런 밑바닥 인생 옆에 나는 여전히 - 잠을 잘 수 있는 곳이라곤 거기밖에 없어서 - 앉아 있다.
환경이 중요하다던데...
"너는 왜 그 따위로 여행하냐."
고등학교 동창 녀석의 말을 곱씹어본다.
떠났음에도 추후의 떠남을 기약하기 위해 절약해 왔던 근간이 밑바닥 인생들 옆에서 흔들린다.
칸쿤에서조차 15불짜리 호스텔에 묵고, 타코 이외의 식사는 사치일 게 뻔해 100페소 미만의 식당을 쥐 잡듯 뒤져 찾아내고, 그러다 의지가 약해 호스텔 바에서 맥주 한 잔이나 마실 하급 인생이다. 호스텔, 값싼 식사, 노숙, 궁기. 무엇보다도 나는 돈에 대한 존중이 부족한 위선자다. 오늘만큼은 수많은 갈림길에서 하급 인생으로 수렴해 가는 무력한 밑바닥 인생이다.
힙합의 고장, 애틀랜타의 공항에는 어울리지 않게 재즈가 나온다.
스깟뚜비두, 선율에 맞춰 낙하하는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