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가는 길

내 오랜 친구들

by 노마드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러 뉴욕에 간다. 프린스턴 다니는 녀석은 2년 만, 그새 졸업해 뉴욕에서 직장 생활하는 친구는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오랜만에 본다. 시간이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이제 와 껄끄러움 따위는 없겠지만, 셋이서 볼 사이까지는 아닌 것 같고, 그보다는 각자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하고파, 조금 귀찮아도 내가 부지런히 주를 하나 건너 닿는 수밖에 없겠다. (말은 이리 해도 고작 차로 1시간 30분 거리다.)




프린스턴 다니는 A와는 중국어 수업을 계기로 친해졌다. 계기라고 하기엔 거창하고, 다른 친구 C와 정치적인 성향이 맞아 친해졌다 하는 게 맞겠다. 이유를 찾자니 어려운데, 굳이 정의하자면, 영화 ‘신세계’에서 ”어이, 브로“ 외치는 정청과 이자성 같은 담배맛 우정, “네가 여자였으면 너랑 결혼했으리라. “ 뇌까리는 이류, 아니 삼류 브로맨스겠다.


내 기억에 저장된 A의 마지막 이미지는 담배 연기를 뿜으며 수리철학을 논하던 모습이다. 자욱이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며, 지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내가 이미 포기한 길을 걷고 있는 녀석이 부럽고 대견하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집을 따로 구해 산다는 녀석이 외로워 보였고.


돌이켜 보면, 둘이서 모였을 때 하는 말의 절반이 헛소리였다. 그래서 즐거웠다.


카뮈의 사상에 경도돼, 저서를 독파했고, 열정과 반항이란 결론은 나약하고 논리가 결여되어 있다 주장했다. 공허한 외침이어도 좋았다. 종극에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 “는 자명한 명제로부터 출발해 논문 비스무리한 것을 써보려 노력했다.


이제 와 밝히자면, 감사하게도 지도교사를 맡아주신 당시의 담임선생님께서는 나를 따로 불러 ”채현아, A는 못 알아들을 끼니까 내 니한테만 말한다. 다 부질없는 짓이여. 공부를 해여지. 뭐 하는 기고. 느그가 저 똑똑한 사람들도 못한 걸 할 수는 있겠제. 하지먼 지금은 아니다. “라 하셨다.


거기다 대고 나는 ”그게 다 젋은 날의 낭만 아니겠습니까. 함 해보는 거죠. “라 답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답답하셨겠지만, 답도 안 나오는 문제들로 두 세 시간씩 지껄이던 그때가 참 좋았다.


이별하고 길에서 까무러친 D에게 위로랍시고,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건네었던 일, C가 더러워 도저히 룸메이트를 못하겠다며 하소연하던 일, 매번 뒤뚱거리는 하체를 이끌고 재미난 것이라도 찾았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걸어오던 모습 등을 떠올리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당시엔, A와 C 둘 다 똑같이 더러웠다. 방이 조금만 덜 돼지우리 같았어도 룸메를 고려했을 텐데. 위생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친구들이 몇 있었다.)


< 전주 동락원 >


졸업 후엔 여행도 같이 갔다. 이름하여 ‘국내일주‘. 안양에서 시작해 태안, 광주, 전주, 대전, 목포, 여수, 남해, 담양, 보성, 공주 등지를 쏘다녔다.


‘박쥐‘를 보며 김옥빈에 반했다고 다음 날 아침에도 한참이고 떠들어 댔던 일, 갈치를 한 입 베어 물고 눈이 땡그래졌던 일, 낮의 공산성이 인상 싶어 밤에 다시 찾아 거닐었던 일 모두가 아름다운 추억이다. 대전에서 투숙 연령 문제로 (이 나라는 음주는 1월 1일 기준, 숙박은 생일 기준이다) 차에서도 자고, 심한 감기몸살이 걸려 하루를 꼬박 앓기도 했지만 떠올리면 웃음뿐인 순간들.


이후, 동생 고등학교가 공주 근처라 나를 제외한 가족들이 공주에서 우리가 갔던 식당을 찾았다고 들었는데, 내가 극찬하던 그 정도의 맛은 아니었다 입을 모아 얘기했다. 그만큼 그때의 우리는 행복했고, 70개국을 여행한 지금 와서도 그 해의 여름은 가장 기억에 남는 시간 중 하나로 남아있다.


추가로, 당시의 나는 상식이 부족해 차를 운전하던 친구 녀석에게 기름값도 n빵을 하자는 몰염치한 제안을 했다. 미안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언젠가 사과하면 되겠지 생각하면서도 갱상도 사람답게 함 여행 같이 가서 풀코스로 대접하는 게 낫겠다는 어리고 간사한 마음이 아직도 있다.


요약하자면, 고등학교 친구지만 부랄 친구 같고, 절반의 헛소리를 기대하며 떠난다 즈음되겠다.




A와 주중에 친했다면, B와는 주말에 친했다. 꽃이 지고야 봄인 듯 알 듯, 같이 서너 시간 노래 부를 사람 찾는 게 그리 어려울 줄 몰랐으니. 입시철 우리는 주말 저녁이면 외출증을 끊고 나가 노래방에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내 기억에 저장된 B의 마지막 이미지는 졸업 후 만난 노래방에서 어울리지 않게 ”이거, 안 올라갈 수도 있어. “라며 쭈뼛거리며 곡을 고르던 모습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고음으로 도배된 곡은 목 상태에 따라 피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색한 건지, 멋쩍은 건지, 선곡하고 결국 고음 구간에서 낮춰 불러, 얘도 늙긴 늙었구나 생각했더랬다.


그리 보면, 취향이란 색을 덧입혀줘 참 고마운 친구다. ‘비긴 어게인‘을 처음 소개해줬고, 노래 실력도 덕분에 일취월장했다. 더불어,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도 군대에 있을 때도 떠나겠노라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을 유일하게 알아차린 사람이기도 하다.


B는 지금도 그렇지만 예뻤다.


B를 생각하면 외모가 먼저 떠오르는 건, 실제로 예뻐서도 있겠지만, 친해진 계기가 사진이어서 그런 것도 있다.


정말 예쁜데 예쁜 만큼 사진을 못 찍었다. 사진을 꽤 잘 찍게 된 지금의 시선으로 봐도, 잘 쳐줘도 평균 이상이었던 당시의 시선으로 봐도, 충격적인 실력이었다. 대칭과 균형이라고는 씨알도 찾아볼 수 없어 생일에 책을 관련된 한 권 선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모의유엔을 하며, 다른 친구와 내게 고민을 상담하러 왔고, 그때 솔로몬 얘기를 들을 정도로 괜찮은 조언을 건네줬다. 이후 꽤 친해졌다.



2학년인가 3학년 여름, 인턴십을 하러 부산에 내려왔었는데, 그 해 함께 보낸 시간들도 참 좋았다.


아버지께 배웠다며 국밥에 깍두기 국물 부어 먹는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다. 듣기만 했지, 부은 건 처음이라. 순대를 좋아했지, 국밥은 선호가 없던 내게, 정구지는 몰라도 깍두기 국물을 부으며 핀잔주던, 젓가락질 좀 고쳐보라며 성질내던 서울 사람은 새로웠다. 야망도 넘쳐, 회 먹으러 갔던 날, 학교를 지어 교육에 이바지하겠다며 택시에서 내리던 게 어제 같은데, 정작 난 맞장구치던 그때와 펀이하게 다른 사람이라 말이 통할지 걱정이다. 그러나 그것도 그런대로 재미지지 않을까.


B에게도 마음의 빚이 있다. 원하던 대학에서 떨어진 후, 그 사실을 내게 처음으로 털어놓았는데, 당시 제대로 위로해주지 못했다. 어디를 가도 잘할 사람인데 너무 슬퍼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표현하지 못한 마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후 제대로 축하도 위로도 해주지 못한 것 같아, 이번에는 그때 울던 소녀가 이제는 어른이 됐다고. 그간 고생 많았다고 - 행복해 보인다면 그래 보여서 너무 좋다고, 기쁘다고 - 얘기해주고 싶다.



일상을 털어놓을 수는 있어도 더 이상 공감할 수 없다는 건, 어른이란 멍에를 짊어진 우정의 비극이겠다.


그럼에도 동시에 그만큼 우리가 자라나 서로의 삶을 가꾸고 있다는 얘기도 되겠다.


지나간 과거에 웃을 수 있고, 희망찬 미래를 그릴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서로의 일상에 서로가 자리하는 시간은 쪼그라들다 못해 사라졌지만, 다시 볼 때마다 이야기 한 보따리 꾸려 부푼 마음 안고 찾아갈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기쁨이겠다.


먼저 박대치만 않는다면, 언제고 찾아가 어울리고픈 소중한 사람들이라 자주 봤으면 싶고, 그래서 찾아간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비행기로 1시간 30분,

애틀란타에서 뉴욕까지 비행기로 1시간 30분.


A와는 트라파니에서의 통화 - “예전에는 말 한마디를 더 하기 위해 서로의 말을 끊었어야 했는데, 이제는 한 마디 뒤에 겨우 두 마디를 이어 붙인다.” 썼던 - 가 마지막이었고,


B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은 건 재작년 봄 유럽으로 떠나며, “군에 있을 때, 그렇게 떠나겠다 노래를 부르더니, 결국 떠났네.” 짚어내던 통화여서,


그간의 공백을 확인하기가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다.


그럼에도 1시간 30분의 비행 동안 글을 쓰며, 드디어 A와 B 생각을 하니 입가에 미소가 절로 번져온다.


공항으로 가는 길, 같이 사는 친구와 잠시 걸었는데, 그 친구는 내가


“그 어느 때보다 활짝 웃고” 있다고 말했다.


오늘도 비행기는 어김없이 연착되었고, 그에 따라 프린스턴에서의 시간 역시 조금은, 뉴욕에서의 시간 역시 조금은 짧아지겠지만, 그럼에도 설레는 출발이다. 오랜 친구들 보러 뉴욕 가는 길은.


비행기에서 내려 뉴어크 공항을 걸어간다. 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 정션에서 기차를 바꿔 탄다. 프린스턴 역에 멈추면 거기 나의 오랜 친구가 나를 기다리고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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