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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라이세이 Sep 13. 2021

충전하시겠습니까? 소모하시겠습니까?

문 닫고 집으로 향하는 시간의 힘.

문 닫고 집으로 향하는 시간에는 힘이 있다. 이 힘은 남들보다 하루를 일찍 시작한다는 뿌듯함을 원료로 쓰는 ‘미라클 모닝’에 못지않은데, 그 배경이나 원인이 어디냐에 따라 힘의 발현이 다르다.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는 ‘문 닫고 집으로 향하는 시간의 힘’은 본인 스스로의 의지로 끝까지 남아 문을 닫고 집으로 향할 때와 어쩔 수 없이 남겨져서 문을 닫을 때로 나뉜다. 전자는 자신감의 원천이 되지만, 후자는 남아 있던 에너지마저 빼앗는 일이다. 전자는 ‘충전의 시간’이지만, 후자는 ‘소모의 시간’이다. 전자는 스스로 채우는 시간이지만, 후자는 자신을 소모하는 일이다.


학생 때는 줄곧 자신감이 충만했다. 그 이면엔 ‘문 닫고 집으로 향하는 시간’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3년 내내 정독실에 남아 경비 아저씨가 순찰을 돌 때까지 공부를 하던 일, 마무리 정리를 하고 자물쇠를 잠그던 일. 그리고 친구들이 모두 빠진 학교 운동장을 터덜터덜 걸어 나오던 일. 이 시간을 모두 엮어 수험생활을 마무리했다. 원하던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문 닫고 집으로 향하는 시간’을 누렸다. 저학년 때는 ‘섹방(섹션방)’이라 부르던 과방을 지켰고, 고학년이 되어서는 학과 건물에 생긴 휴게실을 지켰다. 책을 읽기도, 친구들과 수다를 떨기도 했다. 기타를 칠 때도, 소파에서 쪽잠을 잘 때도 있었다. 시간이 흘러 취업준비생이 되었을 땐 휴게실 조교 자리를 지키며 자기소개서를 썼다. 하루치 자기소개서를 마무리하는 시간은 ADT캡스 경비직원이 문을 닫으러 올 때였다. 그 덕에 60 곳이 넘는 회사에 원서를 썼다. 25살. 첫 취업 시즌에 덜컥 3곳의 회사에 합격했다. 무작정 회사원이 되었다. ‘문 닫고 집으로 향하는 시간의 힘’으로 무리 없이, 무사히 NEXT STEP을 밟았다.


회사원이 된 이후엔 상황이 달랐다. 출근한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은 시점부터 밤늦게까지 회사에 남겨졌다. 인수인계받지 못한 일을 처리해야 했다. 다른 팀이 실수한 것을 바로 잡아야 했다. 그마저도 몇 개월 치를 처리하고 나니 바뀐 회계시스템을 알려주지 않았다며 처음부터 다시 결재 올릴 것을 요구했다. 1년 넘게 회사에 남겨졌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사무실을 떠났다. 그 공허한 공간에서 밤 11시, 12시가 되어서야 문을 닫고 집으로 향했다. 나를 갉아먹는 시간이었다.


그런 시간에 노출된 시간이 많아져서 일까. 문을 닫고 집으로 향하는 대신 곧장 집으로 향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스스로 남아 무언가 채우는 시간은 사치였다. 그동안 채워온 것들이 고갈 중이라는 사실은 관심 밖이었다. 그저 집으로 향해 시간 죽이기 여념 없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고갈되고 고갈되고 고갈되어 더 이상 고갈되면 더 이상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미도 없고, 보람도 없고, 월급만 있는 곳에서 죽을 때까지 시간을 보낸다는 상상은 일견 편해 보였다. 굳이 나를 더 채울 필요도, 굳이 무언가를 고민할 필요도 없다. 그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려는 내 모습에 그만 깜짝 놀랐다. 해서 예전을 생각했다. 전에 나는 어떻게 했었지?


그때 나는 ‘문을 닫고 집으로 향했다.’ 문을 닫는 그 시간까지 무언가를 채웠다. 무언가를 끄적였다. 무언가를 생각했다. 그런 뒤에 문을 닫고 집으로 향하는 시간은 후련했다. 씻고 곧장 잠들 여유만 남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회사에 어쩔 수 없이 남겨진 뒤늦은 밤에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과는 달랐다. 해서 ‘문 닫고 집으로 향하는 시간의 힘’을 다시 채우려 한다. 그러고자 작업실을 구했다. 24시간 운영되는 코워킹 공간이라 진짜 문을 닫고 나올 순 없지만, 내 시간으로 나를 채우는 일을 할 순 있다. 매일, 꾸준히, 조금씩, 자리를 지키면서 나를 채워보려 한다. 문을 닫고 집으로 향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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