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는 그물처럼 짜인 겹눈으로 세상을 본다. 겹눈이란 수천 개의 광수 용기 단위의 낱눈이 모여 생긴 눈을 말한다. 겹눈으로부터 얻은 영상은 각각의 낱눈으로부터 얻은 이미지의 조합으로 얻어진다. 하나의 상으로 사물을 보는 인간의 눈과 달리, 파리의 눈은 마치 볼록렌즈 수십 개를 이어 붙여 놓은 것처럼 울퉁불퉁하게 사물을 인식한다. 아무튼 인간이 보는 세상과 파리의 시야는 확실히 다른 모양이다.
<똥파리>에서 상훈(양익준)은 상대방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인 폭력을 가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상훈이 아버지를 처음 구타하는 장면은 불투명한 유리문으로 가려진다. 상훈을 직접 연기한 양익준 감독은 아마도 이 장면을 연출할 때 파리의 눈에서 아이디어를 착안한 듯하다. 이 장면 외에도 지나칠 정도로 근접하게 촬영된 클로즈 업과 흔들리는 카메라 움직임은 관객으로 하여금 마치 곤충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카프카의 <변신>은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한 그레고르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폭행을 저지를 때마다 상훈은 인간성을 모조리 포기한 채, 마치 한 마리의 해충으로 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시야는 극도로 좁아지거나, 분산되고 때로는 모자이크 처리된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시야는 자신이 폭력을 행하는 상대방이 인간이라는 사실조차 잊게 만드는 듯하다.
상훈은 빌린 돈을 받기 위해 채무자를 협박하는 일을 하는 ‘용역깡패’이다. 가족을 때리고 있는 남자에게 상훈은 ‘때리는 놈은 언젠가 자기가 맞게 될 날이 온다는 걸 모른다’라고 말하며,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남자를 폭행한다. 이 대사는 영화의 결말에 대한 일종의 복선이다. 어릴 적 아버지에게 당한 폭력을 타인에게 되갚고, 그것이 돌고 돌아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다. 이렇듯 폭력은 전염성을 갖는다. 또한 감독은 피해자가 가해자로 변하는 지점들을 매우 모호하게 표현한다. 폭력의 순간들은 매 순간 충동적이라기보다 그 뿌리가 생각보다 깊은 것이다.
상훈은 종종 인간성에 대한 갈망을 드러낸다. 그의 배다른 누나와 조카를 대할 때 그는 마치 그가 어린 시절 원했던 아버지의 모습처럼 행동한다. 또한 길에서 우연히 (역시 폭력사건을 계기로) 알게 된 여고생 연희를 대할 때 그는 마치 어린 시절 일찍 세상을 떠난 여동생을 대하듯이 행동한다. 오랜 친구인 만식을 누나에게 소개해주려고 하거나 자해를 시도한 아버지를 보며 결국에는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그가 여전히 인간성을 지닌 존재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영화는 그의 일말의 인간성이 폭력으로 얼룩진 그의 삶의 면죄부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그의 최후는 폭력이 쉽게 정당화될 수 없음을 말해주는 감독의 마지막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