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내 인생은 생각보다 드라마틱하지 않다. 드라마는 선을 벗어나 끝없이 추락하는 불행이나 예상치도 못한 천운을 그리지만, 내 인생은 선 바깥의 일들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극히 평범한 나에게 대부분의 날은 평범하게 잊힐 일들의 연속이다.
“영민이 진짜 멋있는 것 같아. 그렇지 않아 한경아?”
두 팔 아래, 버스 좌석에 앉아 대화를 나누던 정원이는 비밀을 조심스럽게 알려주는 것처럼 다른 녀석의 이름을 이야기했다.
“뭐, 그치. 공부도 잘하고, 운동신경도 좋고... 인기도 많고.”
등신. 여자애 앞에서 딴 남자애 잘났다고 치켜세워주고 있다. 가만 보면 내 인생은 드라마보다 레전드라는 단어에 더 어울린다. 등신 같은 내 인생 레전드.
“맞아 맞아. 저번에 체육대회 때도 진짜… 여자애들이 다 영민이 이야기했어.”
“근데 정원이 너도 그때 되게 멋있었어. 허들 넘는 거 보니까 선수 같더라.”
그러면 그렇지. 내 인생이 그렇지. 웬일로 ‘그’ 정원이가 뜬금없이 버스 정류장에서 나에게 다가오나 했다. 왜 굳이 같이 기다리던 여자애를 내팽개쳐두고 나랑 같이 버스를 기다리나 했다. 왜 같이 타고, 왜 계속 옆에 서고, 왜 운 좋게 자리가 나서 내 앞에 앉아 있게 되나 했다.
와, 진짜 상황에 취해서 이상한 소리 했으면 18년 인생 조질 뻔.
“진짜? 고마워. 그때 이야기들 많이 하더라. 그냥 한 건데…”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대단한 능력을 뽐내는 게 정원이의 매력이자 캐릭터이긴 했다. 그 때문에 여자애들 사이에선 잘 어울리지 못하고 나 같은 학교의 조연들하고도 어울리게 되는 거긴 하겠지만.
그래도 같은 반 여자애 중 유일하게 문예 창작 동아리 축제 때 와서 나한테 방명록도 남겨주고… 그래서 난 뭔가 불씨라도 있는 줄 알았지. 그 불꽃이 바로 오늘 타오르는 줄 알았지 뭐야.
“나는 진짜 너 무슨 장애물 달리기 선수인 줄 알았어. 스포츠 뉴스 시작할 때 뜨는 자료화면 같은 거 있잖아.”
“자료화면이래.”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은지 정원이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 작은 몸짓이 참 고왔다.
내일 학교 가서 정원이가 너한테 관심 있는 거 같다고 알려주면 영민이 그 녀석은 행복하겠네. 이런 애랑 잘 될 수 있어서.
잠깐 입을 다물고 있었다. 너무 주절거리는 애로 보이고 싶지 않은 것도 있고, 풍선처럼 하늘로 붕 떠 올랐던 기분을 지상으로 열심히 끌어내릴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정원이는 곧 그 어색함이 불편했는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 그러고 보니 한경이 너 글 쓰는 거 좋아하잖아. 요즘에도 계속 써?”
“응, 계속 쓰지. 시험 기간에도 쓰고, 수업 시간에도 쓰고.”
버스가 많이 흔들거린다. 덜컹덜컹.
“어떤 거 많이 써? 시? 소설?”
“주로 소설 써. 학교에서 뭐 할 때는 대부분 시 써내라 하지만.”
“소설가네. 재밌겠다. 뭐 구상하는 이야기 있어?”
이야기해야 하나 고민하면서 창밖을 한번 쳐다봤다. 버스는 우리의 시간처럼 빠르게 달리고 있었고, 스쳐 가는 창밖의 어두운 풍경 위로 가만히 서서 목적지로 실려 가는 내 모습과 표정을 알 수 없는 여자아이의 옆모습이 반사되어 보였다. 정말 말을 해야 하나.
“하나 있어. 써볼까 하는 게.”
“어떤 이야긴데? 스토리가 뭐야?”
“신데렐라 있지. 신데렐라 유리 구두에 금이 가서, 그걸 수선하기 위해 무도회장 가던 길을 되돌아가고… 그 와중에 호박 마차 바퀴는 빠져서 시간은 흐르고… 간신히 도착해 보니 시간은 열한 시 반. 왕자는 이미 다른 여자의 손을 잡고 있고, 낙심한 신데렐라를 달래 다음 무도회를 노리는 이야기야. 신데렐라를 열심히 달래기 위해서 언니들 몰래 도시락 싸 들고 멀리 나들이 가는 게 주 내용.”
“비극적인 신데렐라야? 거기 나오는 마녀는 뭐 해?”
정원이는 킥킥 웃으며 말했다.
“마녀는 출장 중, 희극이야. 호박 마차의 수행원이 주인공이거든.”
“어? 그럼… 로맨스? 독특하겠네.”
“그치, 수행원 같은 캐릭터도 감정이 있을 수 있으니까. “
“헤르만 헤세의 별 같아.”
“그래? 별보다는 주인공이 좀 더 주변인일 거 같지만.”
“신데렐라가 조금 안쓰럽긴 하다. 상황이… 나중에 신데렐라는 어떻게 돼?”
“해피엔딩으로 그릴 거야. 모두의 해피엔딩. 신데렐라는 다음 무도회에 가고. 수행원은… 으음… 아직 모르겠다. 어쨌든, 해피엔딩.”
“기대된다.”
정원이는 손을 들어 하차벨을 눌렀다. 난 알아서 정원이가 들고 있던 가방을 다시 들었고, 정원이는 옷매무새를 추스르며 내릴 준비를 했다.
“앉을래?”
“아니, 나도 곧 내리는데 뭐.”
정원이는 일어나 내 옆에 섰다. 나보다 한 뼘 정도 작은 키, 조금 긴 단발머리, 추위에 불그스름한 콧잔등과 볼. 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렸다.
“다음에 그 소설 다 쓰면 나한테도 보여줘. 갈게. 내일 봐.”
“그래, 읽어주면 고맙지. 내일 봐.”
끼이익. 버스가 멈추고, 내리는 문이 열렸다. 두어 발짝 멀어지려던 정원이는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작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나는 뭐에 홀린 것처럼 그녀를 돌아봤고, 우리는 눈을 마주쳤다. 정원이는 내 눈동자를 읽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거 제목은 ‘멈추지 않는 호박마차’ 어때?”
그 말을 그대로 곱씹으며 읊었다.
“멈추지 않는 호박마차?”
“응, 호박마차. 귀엽잖아. 진짜 갈게. 안녕!”
“어어, 조심히 가.”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는 그 소녀를 창 밖으로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버스가 다시 출발하기까지의 그 길고 긴 시간 동안.
직감적으로 이날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을 알았다. 내 인생은 별로 드라마틱하지 않지만, 잊히기 쉬운 일들의 반복이지만, 가끔은 예상치 못했던 몇 마디의 말과 행동이 일상의 선 바깥을 알게 해 준다는 걸, 어느 하루가 아무도 기억 못 할 나만의 드라마가 될 거라는 걸.
안녕, 신데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