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오트는 아일랜드 시골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넷째 아이다. 아버지는 강압적이고 어머니는 무기력하며 형제자매들과는 어울리지 못한다. 가족들의 무관심과 방치 속에서 코오트는 내성적인 성격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여름. 엄마가 막내를 임신하자 코오트는 방학 동안 먼 친척의 집에 맡겨진다.
에이블린과 그녀의 남편 션은 이웃들에게 덕망이 높은 부부다. 그들의 집은 적당히 크고 깨끗하며 식탁에는 식사다운 식사가 있다. 에이블린은 코오트에게 집안일을 알려준다. 두 사람은 샘터로 향한다. 집 근처의 샘터는 여태껏 마른 적이 없다고 한다. 물을 길어오고 음식 재료를 다듬으며 코오트는 이 집안의 사람이 되어간다. 션 역시 코오트에게 서서히 마음을 연다. 무뚝뚝한 시골 농부지만 작은 과자 하나를 건네주며 미안함을 표현하기도 한다. 션은 코오트가 마음껏 뛸 수 있도록 우체통에서 편지를 가져오는 일을 맡기기도 한다. 이렇게 사소한 일상들이 쌓여 말이 없던 소녀는 사랑의 말을 배우게 된다.
출처 : 네이버영화
원작 소설의 제목은 <맡겨진 소녀>다. 맡겨진다는 의미가 코오트의 상실된 주체성을 뜻한다면, 말이 없다는 의미는 코오트가 스스로 선택해 온 삶의 방식을 뜻한다. 가족의 방치 속에서 침묵함으로써 자신을 지켜내던 코오트는 에이블린과 션의 집에서도 여전히 조용하지만 그 의미는 달라진다. 이곳에서 코오트는 말을 삼키는 아이가 아니라, 신중하게 말을 골라 내뱉는 아이로 해석된다. 코오트의 주체성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원작의 제목보다 영화의 제목이 더 확장된 의미를 담고 있다.
코오트가 에이블린과 션의 집에서 가장 처음 마주하는 이미지는 샘물이다. 마르지 않는 샘물은 그 자체로 에이블린과 션의 무한한 사랑을 뜻한다. 이 사랑은 먼 친척 아이인 코오트에 대한 다정함 뿐만 아니라, 이웃 일에 발 벗고 나서는 친절함으로도 이어진다. 지금 이 시대에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어른들이 얼마나 소중한가 돌아보게 되는 작품이다.
나에게도 어른이 있었다. 학교 밖 청소년 시절 서예학원에 다녔다. 어느 초등학교 앞에 위치한 곳이었다. 학원에는 주로 부모님이 퇴근할 때까지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이 왔다. 무턱대고 찾아온 내게 원장님은 붓으로 획을 긋는 것부터 알려줬다. 나는 아이들이 한자를 외우는 걸 도와주며 원장님의 일을 거들었다. 원장님은 늘 내게 따뜻한 차를 내줬고 이따금 식사를 차려줬다. 나는 그곳에서 원장님의 친구들을 만났고 스님을 만났고 세상을 만났다. 18살의 나는 어른도 아이도 아닌 방황하는 청춘이었다. 원장님의 돌봄은 나라는 사람을 단단히 붙잡아주었다. 어느 날 대뜸 나타난 청소년에게 그런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어른이 몇이나 될까. <말없는 소녀>의 코오트처럼 나 역시도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어른이 있었기에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따뜻한 색감과 1980년대 아일랜드 시골의 풍경 그리고 다정한 어른들과 한 소녀의 성장이 담긴 이 영화는 웨이브와 네이버시리즈온에서 만날 수 있다.
<말없는 소녀> The Quiet Girl 감독 : 콤 바이레드 주연 : 캐서린 클린치, 캐리 크로울리, 앤드류 배넷 장르 : 드라마 러닝타임 : 95분 연령등급 : 전체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