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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혜영 Jan 15. 2023

일신상의 변화는 없지?

최근 내 생일날, 직장에서 분기별 평가 결과 발표를 앞두고 상사와의 개인 면담이 있었다.

상사의 첫 질문은

“일신상에 변화는 없지?”였다.

나는 바로 “네”라고 대답했다.

내 대답 끝이 씁쓸하긴 했지만 공적인 일이 강한 직장에서 너무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에 말을 줄였다.


대답 이후 짧은 순간이지만 이런 생각을 했다. 요즘 지내기는 괜찮냐고 물어본 것이라면 나는 정말 괜찮은가? 과연 괜찮다고 말할 수 있을까? 변화 없이 잔잔한 일상을 보통의 힘을 들여 살고 있는 것이 맞나?

사실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긴 했다. 공적인 일도 사적인 일도 사람도 상황도 한 고비 지나면 또 한고비가 나와서 속도 많이 끓였다. 겉으로는 덤덤하게 지내는 것 같았다는 말을 들었는데 내 속으로는 타들어가는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직장 상사에게 많이 고생했다는 소리를 들었고 작년에는 내년부터 고생 안 시키는다는 약속도 두 번이나 받았었다. “네 수고를 안다”라는 말도 들었다. 나는 정말 많이 참고 있었는데 그게 티가 난 건지 인내심이 있다는 말도 들었다. 이번 평가에서는 저번과 같이 가장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했다. 이 정도면 꽤나 잘한 것 같은 사회생활 같은데 신이 안 났다. 분명 기분이 좋아야 할 말인데 들뜨지 않았다. 감사하고 다행이라는 안도감, 오히려 어딘가 슬펐다. 감사하면 기뻐야 하는데 이 감정은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면담하기 5일 전에 다녀온 심장 정기검진과 엄마 4차 항암 일정으로 새해에 며칠간 병원에서 엄마의 고통을 본 것 때문에 감정이 약간 가라앉았던 것이겠지 했다. 엄마는 힘겹지만 씩씩하게 치료를 받고 있고, 내 심장은 작년보다 조금 더 나빠졌지만 여전히 잘 뛰어주고 있었고 지금 당장 급사를 한다거나 오늘내일 수술을 해야 하는 상태는 아니었다. 지금 당장 내 일신상에 큰 변화는 없었다. 평가 결과를 들은 날 엄마와 통화로 소식을 전했다. “엄마 나 오늘 일등 했다”하고 밝게 말했지만 전화를 끊고 나서는 한없이 가라앉는 기분의 원인을 어디서 찾아 없애야 할지 몰랐다.


몰두할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심장 수술을 받게 되면 내가 먹을 수도 있는 약을 찾아보았다. 약의 임상시험 자료와 관련 논문, 허가 당시 자료들과 허가 문서 등을 찾아서 읽어보았다. 여러 약들이 있지만 다 먹고 싶지 않은 약들이었다. 이렇게 열심히도 만든 약들이 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있는 것을 보면서 대단함과 경이감을 느끼는 동시에 이런 약을 먹으면서 불편한 일상을 살아갈 환자들에 대한 안타까움도 느꼈다. 그리고 내가 그중 한 사람이 될 수 있는 막연하고 깊은 두려움까지 함께 느꼈다. 수술 종류에 따라서 약을 일정기간만 먹거나 평생 먹어야 하는 그런 상황이 싫었다. 지금 먹는 약을 포함해서 수술을 조금 늦춰본다면 심장에 부담을 줄여주기 위하여 먹을 약도 찾아보았다. 몇 년 전 이 약을 가지고 연구를 해보겠다고 찾아간 연구실에서의 나날이 문득 떠올랐다. 그땐 어떤 의미를 찾으려고 그렇게 발버둥을 쳤을까 싶었다. 그리고 지금은 또 무슨 의미를 찾기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금 내 질문은 “내가 과연 수술 이후 재수술받게 되는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최선인가?‘였다. 어떤 시기에 어떤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까? 얼마나 살아야 이만하면 미련 없이 잘 살았다가 될까?


예전에 병원 초음파실에서 만난 환자는 판막질환을 가진 50대였는데 수술할 상태임에도 약도 수술도 모두 거부했다. 그냥 이렇게 살다가 자연스럽게 죽음을 받아들이겠다고, 가슴뼈를 열어서 수술받는 것을 견딜 만큼 더 살고 싶지 않다며 생에 더는 미련이 없다고 했다. 당시 19살이었던 나는 그 대답이 이해가 잘 가지 않았았다. 그런데 이후 내가 그 사람과 같은 판막 질환 진단을 받고 나니 그 사람의 말과 기분과 생각 끝에 내린 선택이 하나하나 되짚어볼수록 이해가 갔다. 나도 만약 50대가 되어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나 역시 비슷한 선택을 할 수도 있겠다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심장 기능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을 따져본다. 주치의 선생님의 말대로 기름칠을 해가며 몇 년 좀 더 쓴다면? 3-4년 이상. 그래서 조금 더 후하게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5-6년의 시간이 남았을 것이다. 그 안에 나는 수술을 받아야 하고 수술 이후에 재발을 한다면 재수술을 받아야 하니 최대한 오래오래 내 심장을 써서 수술을 뒤로 미뤄야 한다. 하지만 그 선택을 버리고 심장 초음파를 받고 나오면서 엉엉 울던 그 환자처럼 나도 그냥 받아들인다면?


처음 판막에 문제가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 얼마나 더 쓰다가 수술을 받아야 하냐는 내 질문에 10-15년?이라고 답한 의사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20대 초반이 지나갔다. 받아들이고 담담했던 20대 중반을 지나고 어느덧 편한 자리에서는 자연스럽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20대 후반을 지나 30살이 되었다.


진단받은 이후 대략 10년이 흘렀다. 남자였다면 지금 수술을 해도 무방하다고 하니 일신상에 변화가 생겨서 잠시 내 일상에 off를 해야 한다는 말을 전할 날이 몇 년 남지 않은 것이다. 그럼 이 시점에 나는 무엇에 몰두해서 시간을 보내야 할까?


받아들이고 잊어버리기 위해 무리하고 혹사했던 20대를 지나왔다. 이제 받아들였으니 더는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하루하루 아주 재미있으면서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결말을 미리 봐버린 책을 읽는 것처럼 한 장 한 장 넘기기 지루한 책을 읽고 있는 기분이다. 책 한 장에 책 한 문단에 책 한 줄에 채워갈 내 이야기가 내가 써야만 하는 내 인생의 이야기가 있다.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백지위에 펜을 들고 무심하게 바라보며 주저앉은 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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