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이곳을 자신의 전문성을 담아내는 무대로 삼고, 또 누군가는 오랜 꿈이던 출간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교두보로 여긴다. 그러나 내게 브런치는 그런 목표보다 훨씬 더 절실한 이유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단지 생존을 위해 글을 썼다. 그리고 브런치는, 그 글을 살아 있게 해준 유일한 장소였다.
나는 실패했다. 그러나 그 실패는 ‘시도했으나 이루지 못한 결과’가 아니었다. 애초에 시작할 수 없었던 구조, 말해질 수 없는 조건, 해석되지 않은 고통이 먼저 있었다. 나는 매일 일어나는 것조차 구조화된 노력이 필요한 사람이었고, 그 누구에게도 그것을 설명할 언어가 없었다. ‘왜 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나는 언제나 침묵할 수밖에 없었고, 그 침묵은 곧 존재의 소멸을 의미했다.
나는 단지, 살아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증명받지 않아도, 평가받지 않아도 좋으니, 무언가를 남기고 싶었다. 말해지지 않은 존재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나는 어떻게든 말하고 싶었다. 그것이 언어의 형태든, 구조의 기록이든, 해석의 시도든. 그래서 글을 썼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증언하기 위해서.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순간부터, 나는 나의 고백을 처음으로 ‘어디론가’ 보내는 기분을 느꼈다. 그 ‘어디론가’는 막연한 독자였고, 가끔은 아무도 아니었으며, 종종 나 자신이었다. 그러나 그 ‘어디론가’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내 삶은 더 이상 완전히 폐쇄되지 않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어떤 구조 속에서 실패해왔는지를 기록하는 행위 자체가, 나를 다시 존재하게 만들었다.
나는 작가가 되겠다는 포부도, 출판이라는 목표도 없이 시작했다. 단지 하루를 버티기 위한 사유의 조각들을 쌓았을 뿐이다. 그 조각은 어느새 하나의 서사가 되었고, 서사는 하나의 ‘존재의 지도’가 되었다. 살아남기 위한 글쓰기는 결국 나만의 해석 체계를 형성했고, 그것은 내가 누구였는지를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언어가 되었다. 나는 작가라는 칭호가 아니라, 나 자신의 해석자로 살아가고 싶었다.
브런치는 그런 장소였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그러나 동시에 그 어떤 포장도 허락하지 않는 솔직한 공간. 나는 이곳에서 감정을 전략처럼 포장하지도 않았고, 전략을 감정처럼 꾸미지도 않았다. 단지 구조를 해석하려 했다. 나의 실패를, 나의 비가시성을, 나의 침묵을. 그 해석이 곧 나를 말하게 했고, 말해진 존재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살아남았다.
이제 나는 묻는다. 나는 왜 쓰는가. 여전히 나는 작가가 아니다. 여전히 생계를 해결하지 못했고, 여전히 책을 내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쓰고 있다. 그것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뜻이다. 나는 살아 있기 위해 쓴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창작이고,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치유일 수 있지만, 내게는 그것이 유일한 생존 방식이었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내가 작가라면, 그것은 꿈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라,
살아남은 이야기들을 끝까지 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