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림 Jan 13. 2019

쓰고 싶은 것을 쓸 수 있다는 것

상처 받은 것들에 대한 기록





나는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글로 쓴다. 

얘기하고 싶은 건 많은 데 예전부터 나는 말솜씨가 없었다. 말로 하다 보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를 만큼 엉망진창이 되어 버릴 때가 있었다. 어쩔 때는 생각과 정 반대의 표현이 나와서 상대방이 내 뜻과 다르게 오해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난 다짐했다. 


‘당분간 말하지 말아야지.’


말하기가 어려웠던 이유는 내 생각과 딱 맞는 단어와 표현법이 머릿속에서 바로바로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글’은 무작정 생각나는 대로 적어 놓아도, 다시 지우거나 덧붙여서 마음에 드는 문장으로 바꿀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난 후에도 다시 꺼내어 읽어 볼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무엇보다 내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하나하나 찾고 고민하는 게 즐거웠다. 

그러다 내 생각과 꼭 맞는 단어를 발견하고 그것이 글로 표현되었을 때 큰 뿌듯함을 느꼈다.


하지만, 나에게 모든 글 쓰기가 즐거웠던 것은 아니다.


대학시절,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으로 교내 학보사에 들어가 일하게 되었다. 

들어간 순간부터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강했던 나는 예전부터 글로 써보고 싶어서 적어 두었던 몇 가지 주제들을 떠올렸다. 평소 끄적거리기만 하던 내 글이 신문에 실린 다니 얼른 제대로 된 글을 쓰고 싶었다. 


신입기자로 신문의 사회면을 맡아 글을 쓰게 되었고, 그렇게 쓴 글을 편집장에게 가져갔다. 

편집장에게 원고 검토를 받았는데, 예상치 못하게 많은 지적을 받았다. 사소하게는 어휘, 문법, 맞춤법 등 기본적인 글 교정부터 내용에 대한 지적까지 받았다. 

주제는 ‘동성결혼 합법화’였는데 편집장은 ‘이런 표현은 동성애를 더 혐오스럽게 만든다.’라며 ‘아무리 네 생각이 그렇다고 해도 여기 선, 중립성을 갖고 글을 써야 한다.’고 내게 지적했다. 난 편집장의 피드백에 따라 글을 지우고 다시 썼다. 


그리고 일주일 후 편집장의 두 번째 피드백을 받았고 다시 글을 고쳐 썼지만, 난 그 이후로도 몇 번의 피드백을 받아야 했다. 그렇게 수정에 수정을 걸쳐서 편집장 마음에 드는 글을 완성했고 드디어 교내신문에 실리게 되었다. 그러나 기대했던 것과 달리 신문에 실린 글을 보니 기쁘지 않았다. 정작 내 마음에 드는 글이 아니었다. 

내 생각이 이미 너무 많이 삭제된 글이었고, 말하고 싶은 메시지를 편집장의 지적에 따라 숨겨야 했기 때문이다.




매주 수요일엔 신문에 담을 주제를 정하는 아이디어 회의가 있었다.

각 분야별로 주제를 선정했는데, 사회면을 맡았던 나는 평소 궁금했던 ‘대학평가에 대한 진실’이란 내용을 주제로 잡았다. 


나: “우리 학교가 대학평가 1위라는데, 그게 어디서 온 자료이고 근거인지 그리고 평가조건이 무엇인지. 조사해보고 싶어요.”

선배: “그건, 총장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는 주제인 거 같은데?”

나: “궁금하지 않아요? 그 평가, 진짜인지 아닌지.”


궁금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학입시를 앞두고 여러 대학들이 고등학교로 와 입시설명회를 했었는데, 오는 대학 관계자마다 모두 “우리 학교는 작년 대학평가 몇 위를 했습니다.” 혹은 “작년, 우리 대학은 대학평가에서 우수한 점수를 받았습니다.” 등의 식으로 많은 대학들이 ‘대학평가’의 순위를 자랑스럽게 언급했고,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우리 대학 역시 매년 대학평가 몇 위를 했다는 얘기를 가지고 커다란 플래카드를 달고 연설을 했다. 그럴 때마다 난 속으로 생각했다. 


"그게 대체 뭔데?" 


누구라도 궁금해할 수 있는 주제라고 생각해 얘기했지만 내가 생각한 것과 회의 반응은 달랐다.


한 선배가 말했다.


“요즘 우리 학보사 지원금도 줄어들고 있는 판에, 그런 내용까지 실리면 안 좋을 것 같은데.”


옆에 있는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편집장은 잠시 고민하는 듯 나를 보더니, “그건, 다음에 기회가 생기면 쓰자.” 고 했다.


회의 분위기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한 명이 아이디어를 내면 그걸 주제로 삼을 건지 말건 지 다수결로 투표를 했고,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운이 안 좋으면 쓰고 싶은 글 몇 개를 포기해야 했다.  어느새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아졌고, 다수결로 정해진 주제를 가지고 글을 써야 했다. 

때문에, 쓰고 싶지 않은 주제로 글을 써야 할 때도 종종 있었다.


그러다 보니, 주제를 고민할 때마다 난 내가 쓰고 싶은 글이 무엇인지 생각하기보다 이번 회의에서 선배들에게 선택받을 수 있는 주제인지를 먼저 생각하게 되었다. 


어느 날은 아이디어조차 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더 이상 사회면을 맡는 게 힘들어졌고, 여행기나 인터뷰 같은 큰 이슈가 생기지 않을 만한 분야면에만 글을 썼다. 가끔은 글도 쓰지 않고, 편집만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누군가에게 선택을 받아야 글을 쓸 수 있다는 것.’ ‘글을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


내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은 계속 커졌지만, 반복되는 글에 대한 피드백과 주제 선정의 실패는 글을 형편없게 만들었다. 편집장에게 덜 지적받을 만한 단어를 골라 썼고, 예민한 주제는 암묵적으로 피했다. 서로가 쓴 글을 읽고 지적하며 좋은 글을 난장판으로 만들기도 했다.


자유롭게 생각 없이 줄줄 써 내려갔던 내 글이 점점 짧아졌다. 딱딱 해졌고, 인위적으로 변했다.

난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글로 표현했었는데, 이젠 글로도 표현하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대학시절의 반을 학보사에서 글을 쓰며 보냈지만, 그중에 정말 내 글이 있을까?

내 글이지만, 내 글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과정이 좋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한 필요한 하나의 작업이라는 것. 

나도 알지만, 완성도 높은 글을 위해 조금씩 내 생각을 버려야 하는 게 어려웠다. 


학보사를 나오고 대학교 4학년 때 마지막으로 학교에 원하는 글을 썼다. 학보사에서 쓰지 못했던

사회비판 반항심 가득 담긴 글을 썼고 ‘대자보’라고 쓰인 작은 종이를 학교 곳곳 게시판에 붙였다.

누가 떼면 다시 가서 붙였다.


어리고, 촌스러웠지만 처음으로 내 글이라고 느꼈다.


이 글이 내게 소중한 이유도 그렇다. 쓰고 싶은 걸 맘껏 쓴 내 글이기 때문에.



매거진의 이전글 팔리지 않는 노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