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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무 Jul 21. 2023

关于张影影小妹妹(장영영씨에 관하여)

꿈이 같은 사람들은 서로 닮아간다

요즘 한국에는 장마전선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습기가 무겁게 드리웠어. 나는 아침마다 샌들을 신고 도서관 뒤편의 흙길을 밟으면서 풀 위에 앉은 습기 냄새를 맡고 있어. 길을 걷다가 발이 지저분해진 것 같을 땐 흔들그네에 앉아 나뭇잎들이 전해주는 바람소리를 듣곤 해. 비가 올 예정이라 낮이지만 하늘은 곧 밤이 될 것 마냥 어두웠어. 그때 마침 익숙한 습기의 냄새가 나를 어디론가 데려갔는데, 그곳은 2017년 쑤저우대학교 본부 근처에 있는 카페였어. 나는 그 카페에서 나의 중국친구 영영이와 함께 '啃老族(캥거루족, 중국에서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의존하며 사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에 관한 말하기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어. 나무 테이블과 의자 덕에 숲에 있는 편안함을 주던 그곳, 커피보다 유자차가 유독 맛있었던 그 카페는 2019년 여름에 다시 쑤저우를 찾았을 땐 사라져 있었어. 올해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된 아침, 울창한 나무들로 드리워진 도서관의 뒷동산은 2017년도에 영영이를 만나 이야기했던 그 카페를 떠올리게 했지.


2017년 가을 쑤저우대학교 한국어학과 학생들과의 见面会(만남의 자리)를 통해 신입생 친구들을 알게 되었어. 만남의 자리 당일엔 영영이가 없었지만, 그날 알게 된 한국어학과 친구들 덕에 영영이를 만날 수 있었어. 그 해 한국어학과에 입학했고, 같은 기숙사 방을 쓴다는 어린 중국친구들 6명을 데리고 혼자 한국어를 가르쳐주고 아온 저녁이 있었어. 심한 감기몸살 때문에 음식 냄새를 맡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지만, 그날 밤 나는 행복해죽을 거 같다고, 중국에 온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는 글을 남겼어.


여러 명의 한국어학과 신입생들 중에서 영영이는 유독 튀는 친구였어. 나는 영영이의 영특함이 눈에 들어와서 왠지 이 친구와 나는 깊은 관계가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지. 당시 웨이신(微信, 중국의 카카오톡)에 익명으로 메시지 남기는 게 유행이었는데, 누군가 나에게 이런 메시지를 남겼더라고.

"언니很漂亮!而且是个大学霸!很开心认识你!希望以后也能保持联系~^_^(언니, 너무 예뻐요! 게다가 공부도 엄청 잘해! 언니를 알게 되어서 너무 기뻐요! 앞으로도 계속 연락했으면 좋겠어요~^_^)


나는 이 메시지를 보고 단번에 영영이라는 걸 알았어. 내가 왜 영영이가 똑똑한 친구라고 생각했는지 알아? 그 당시 한국어 공부를 하는 여러 중화권 친구들을 만나봤지만, 영영이만큼 을/를 발음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어. 한국인들이 중국어를 배울 때 r과 l 발음 구분을 어려워하는 것처럼, 얼화 때문에 많은 중국 친구들이 을/를 발음을 어려워했어. 근데 마침 영영이는 발음 교정이 굉장히 잘 되어있었던 거야. 내 기대처럼 영영이는 중간고사에서 한국어 시험을 100점을 받았대.  기분은 마치 나의 자녀가 처음으로 받아쓰기 100점을 받아왔을 때의 기쁨 같았어.


영영이와의 함께한 모든 순간은 언어 교환이고 세상 공부였어. 쑤저우대학교 본부 근처의 카페에서 내가 중국어 공부를 할 때 영영이는 한국어 공부를 했는데, 그때 영영이는 노트에 아이유의 '팔레트'라는 곡의 가사를 적어왔어. 당시 한국에서 막 발표된 아이유의 새 앨범곡이었는데, 한국어를 배우는 초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영이는 가사를 거의 이해했더라고. 어느 날은 영영이가 고등학교 시절 혼자 공부한 한국어 교재 사진을 보내왔는데, 음성 파일이 내가 좋아하는 배우 이준기가 녹음한 것이었어. 나도 그전 해에 드라마 '달의 연인 보보경심:려'를 봤거든. 나처럼 영영이도 이준기, 아이유를 무척 좋아하다 보니 우린 외국어 공부 외에도 할 얘기가 많았어.


짧은 유학 생활을 마치기 전 나는 운남성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영영이와 꿈을 교환하기 시작했어. 나는 쑤저우의 큰 서점에서 중국어로 된 운남성 여행책을 구매했고, 책을 들고 영영이와 쑤저우대학교 동캠퍼스 앞에 있는 美好广场(미호광장)의 어느 플라워 카페에 갔어. 음료를 한잔씩 시킨 후 함께 여행책을 봤는데, 온통 중국어로 되어있다 보니 영영이는 어려워하는 부분을 대신 읽어주며 설명해 줬어. 그날 영영이는 나에게 朗读者(낭독자) 라는 책을 선물했어. 朗读者는 당시 중국에서 유명한 사람들이 나와 문학작품을 낭독하고 이야기하는 방송이었는데, 어플을 설치하고 방송캡처화면을 스캔하면 영상버전을 볼 수 있었어. 한국으로 돌아온 후 서정적인 문학표현으로 가득해 어려웠던 그 책을 꾸역꾸역 읽었어. 그 책을 읽으며 꼭 중국어를 사용하는 일을 해보자며 꿈을 부여잡았지.


너도 비슷한 경험을 해봤을까? 어떤 친구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거. 한국으로 돌아와 취업준비를 하던 2018년은 나에게 지독한 한 해였어. 취업준비가 순탄하지 않을 때마다 나의 인스타그램 계정은 생겼다 없어졌다를 반복했거든. 마치 열등감에 찌든 나의 현재, 불안정한 미래가 '깜빡, 깜빡' 거리는 것처럼. 누가 SNS를 하든 말든 무시하면 되는데 영영이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어. 내 마음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챈 거야. 영영이는 걱정과 위로, 응원이 담긴 마음을 메모장에 짧게 편지로 쓴 후 웨이씬으로 보내왔어. 그 메모를 읽고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참느라 머리가 얼마나 아팠는지 몰라. 그로부터 1년이 지났어. 나는 취업을 했고, 돈도 모았고, 쑤저우로 영영이를 보러 갔어.  쑤저우의 중심 꽌치엔졔에서 다음 학기에 같이 이화여대로 교환학생을 올 영영이와 또 다른 친구 예가와 함께 밥을 먹었고, 상해로 돌아가는 기차 시간 전까지 습기와 열기에 갇힌 쑤저우를 신나게 돌아다닐 수 있었어.


그해 가을, 영특한 영영이는 이화여대로 교환학생 생활을 하러 왔어. 2019년 하반기에 그 친구와 여러 번 조우했지. 한 번은 가족들 눈치 보느라 학창 시절에도 집에 친구를 잘 데려오지 못했는데, 영영이와 예가를 나의 일산집에 초대할 수 있었어. 게다가, 영영이에게 내 고장 고양시를 제대로 소개해주기 위해 고양 시티투어로 DMZ까지 다녀왔어. 그런데 하필 영영이가 여권을 가지고 오지 않아서 내가 신원보증서에 사인을 해야 했지 뭐야. 엄격하게 우리를 지켜보는 헌병들이 무서웠지만 그래도 재밌었어. 영영이는 그저 한국 연예인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 한국의 역사에도 관심이 참 많아. 그래서 나는 영영이를 꼭 DMZ에 데려가고 싶었거든. 분명 영영이는 그곳에서 알아서 배울 아이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그 이후론 우리 둘 다 바쁘게 살았고, 코로나19로 해외여행이 어려워지면서 다시 볼 날을 기약하지 못했어. 코로나에 걸려 고열에 시달리며 자가 격리로 심각한 무기력증과 답답함을 느끼던 올 초, 나는 갑자기 영영이와 대화를 하고 싶었어. 영영이는 상해외국어대학교에서 한국어 통번역 대학원 과정을 밟고 있었어. 곧 퇴사를 앞두고 있던 나는 가슴 설레는 일을 고민하고 있었지. 그때 영영이와 꿈에 해 얘기했어. 첫 번째 직장에서 딱딱한 번역만 하느라 중국어가 싫어질 정도로 번역 업무가 지쳤다고. 그래도 언젠가 번역을 제대로 해보자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통역과 번역 중 어느 걸 선택할지 고민된다고. 대학원 진학도 꼭 해야 하냐고. 영영이에게 많은 고민을 털어놓았어. 영영이 또한 통번역으로 진로를 고민 중이라 우린 길고 진지한 대화를 나눴어. 그 순간 난 집에 갇혀 있었지만 다시 살아 움직이는 기분이었어. 마음은 꿈을 찾아 어느 먼 곳으로 향하고 있었어.


불과 얼마 전, 영영이와 또 다른 깊은 대화를 했어. 나는 영영이에게 속상한 내 마음을 털어놓았는데, 이 어린 친구가 또 나에게 마음의 안정을 주더라고.


어떤 결정을 하든 언니의 감정이 최우선이었으면 좋겠어.


있잖아, 영영이와 얘기할 때마다 자꾸만 눈이 동그래지고 가슴이 뛰는 거 있지?


2년의 시간이 흐른 어느 여름날, 영영이가 한국으로 출장을 올 것만 같아. 비즈니스 미팅을 가기 전 우린 근처 카페에 앉아 통창에 흘러내리는 비를 같이 바라보고 있을 거야.


"어? 쑤저우대학교 근처에 있던 그 카페 같다. 같이 말하기 시험 준비했던 곳."


영영이와 함께하는 미래를 감히 상상하는 이유는, 꿈이 닮은 사람들은 같이 걸을 수 있는 길이 길기 때문이야.


그땐 영영이와 '사랑'에 관해 대화하고 싶어. 다시 만나기 전까지 와 나의 삶에 사랑이 넘쳐흘러서, 이 이야기들을 나누느라 시간이 부족하길 바라.(23.07.21.)

2019년 12월, 포천의 허브아일랜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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