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황금빛 시간과 강남의 큰 손

멈추지 않을 것 같던 시계, 위태로운 시한부의 유예

by 임래청

런던 시계와 마지막 비행


11월, 런던의 늦은 오후 햇살은 하이드 파크의 토요일 상점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40대의 나는 삶의 정점에서 다음 단계를 계획하며 거리로 나와 하이드 파크 쪽으로 걸었다. 간밤에 영국인들과 맥줏집에서 과음한 탓인지 아직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는 출장 때마다 찾는 작은 호텔에 머물렀다. 영국에서의 비즈니스 미팅은 성공적이었다. 세상은 내 손바닥 안에 있는 것 같았고, 내가 내딛는 모든 발걸음은 승리로 향하는 이정표처럼 보였다.


벼룩시장을 구경 삼아 걸었지만, 마음은 이미 한국에 가 있었다. 수많은 물건 중 내 발을 붙잡은 것은 골동품 노점의 작은 코너였다. 미니 벽시계 하나와 기계 부품으로 만든 액자와 영국 시골 풍경이 그려진 유화 미니 액자였다. 시계의 추가 좌우로 움직이는 모습이 참 귀여웠다. 골동품 시계를 샀을 때, 그 시계가 내는 '째깍'거리는소리가 마치 나에게 박수를 보내는 소리 같았다. 그 소리에 맞춰 내 심장도 뛰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시작할 새로운 프로젝트, 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 그리고 내가 일군 이 견고한 성이 영원할 것이라는 오만한 확신이 나를 감싸 안았다


턱수염이 덥수룩한 60대로 보이는 영국인 주인에게 묻지도 않고 가격표대로 계산하고 세 가지 물건을 샀다.

팔목에 찬 시계는 이제 막 시작될 나의 새로운 시간을 축하하는 기념품처럼 느껴졌다. '이 시계가 멈추는 일은 없을 거야. 앞으로의 20년은 이 황금빛 시간처럼 흘러가겠지.' 그 순간 나는 알지 못했다. 이 시계가 앞으로 내가 마주하게 될 세상의 모든 절망과 혼돈에 대비되는 마지막 프레임이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런던 공원 근처 벼룩시장



생명줄을 쥔 강남의 큰 손


나는 이미 강남의 큰손 회장님이 나의 생명줄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발행하는 당좌수표는 누구에게 발행하든지, 최종적으로는 그 회장님 손에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회장님이 이제 그만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내 수표는 그저 종이에 불과했다. 가장 어려웠던 시기, 박 사장과 함께 회장님과 약속을 하고 사무실로 찾아갔다. 사실 우리 같은 사람은 만날 수 없는 분이었지만, 다급해서 만난 것이다.

"김매곤 사장은 이제 힘든데…." 회전의자에 앉은 회장은 조용히 나를 보며 한 마디 던졌다. 회장의 얼굴은 눈이 날카로우면서도 체격은 강말랐다. 살짝 눈꼬리를 올리며 웃는 모습이 징그럽게 보였다.


젠장, 남의 피를 빨아 처먹고 사는 인간이란…….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박 사장이 나서서 사정했고, 회장은 서랍을 열어 내가 발행한 수표를 보여주었다. 나는 속으로 무서움을 느꼈다. 내가 지금까지 발행한 수표가 회장 손에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내가 사업상 거래처에 발행하면 그 수표가 돌고 돌아 강남의 큰 손에 들어온다는 사실을 눈으로 본 것이다. 두려움에 그를 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럼 딱 한 번이야. 알겠지?" 회장은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당신 사업이 잘되어야 나도 좋은 일이니 꼭 성공하라고." 나는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이렇게 딱 한 번의 유예를 얻었지만, 그 시한이 이제 끝나가고 있었다.

이전 01화1화. 프롤로그: 런던에 날아든 마지막 수표 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