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53일 만에 채워진 포송줄

수갑차고 마주한 서울의 아침

by 임래청
첫 공판의 기적


서울구치소에 발을 들인지 정확히 53일째 되는 날이 밝았다. 갇힌 자의 시간으로는 무한대와 같았던 기다림의 끝이었다. 아침 식사 후 오전 9시경, 6호실 방문 앞에 간수의 외침이 칼날처럼 날아들었다.

"2887번 김매균 나와!"

그 순간, 좁은 방 안에 무거운 정적만이 흘렀다. 첫 재판을 받으러 가는 길. 나는 침묵 속에서 교도관을 따라나섰다. 육중한 28동의 문 앞에 섰다. 신원이 확인되자 쇠로 된 철문이 '컹컹' 소리를 내며 열렸고, 넓은 복도에는 이미 푸른 수의복을 입은 여러 재소자가 흰 고무신을 신은 채 줄을 서 있었다.


우리는 일렬로 서서 "오른발, 왼발" 구령에 맞춰 포폭(步幅)을 맞추며 걸었다. 28동 건물을 완전히 벗어난 후, 처음 신체검사를 받았던 장소로 다시 모였다. 그곳에는 12명의 재소자가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신원을 확인하고, 양 손목에 차가운 수갑이 채워졌다. 그리고 만약을 위해 포승줄이 한 번 더 양팔과 몸통을 감싸 뒤에서 단단히 매듭지어졌다. 포승줄에 묶인 그 모습은 경제범이든, 강간범이든, 모두를 영락없는 '큰 죄인'으로 보이게 했다. 구치소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바깥세상에 나가는 이 과정은 53일간의 고통을 함축하듯 복잡하고 굴욕적이었으며, 나는 남아있던 자존심과 수치심을 모두 내려놓아야 했다


호송차의 딜레마와 증오의 파도


수갑과 포승줄에 묶인 12명의 재소자는 호송차에 올라탔다. 푸른 수의복을 입고 서울의 도심을 가로지르자니, 어쩌다가 내가 TV에서만 보던 이 절망적인 장면을 재현하고 있는지 깊은 서글픔이 밀려왔다. 호송차는 교대역 근처에 다가섰고, 출근하는 사람들이 총총걸음으로, 혹은 늦었는지 급하게 뛰는 모습이 보였다. 빨강 신호등에 멈춰 선 호송차 안에서는 밖을 선명히 볼 수 있었지만, 바깥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갑자기 양복을 입고 당당하게 사업을 한다며 이 거리를 부지런히 다니던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거리를 지나가는 저 수많은 사람이 나의 행복과 우리 가정의 평화마저도 갈기갈기 찢어서 나눠 가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순간 격렬한 증오심이 복받쳤다. 사회가 원망스러웠고,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싫었다.


'그래, 오직 내 가족만이 나를 이해하고 사랑해 주리라. 내가 기댈 곳은 오직 그들뿐이다.‘


나는 스스로 되물었다. '만약 오늘 재판에서 10개월을 받으면, 이제 2개월 정도 살았으니 8개월만 더 견디면 된다.‘


"매균이 형님, 형님은 딱 10개월입니다."

문득 방에서 만났던 여호와 증인 신자의 말이 귓가에 울렸다. 그는 자신의 예언은 99% 맞았다며, 언젠가 나에게 장담했었다. "만약 매균이 형님이 10개월 이하로 형을 받으면, 내 손가락을 잘라 국을 끓여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렇게까지 장담했으니 맞을 거야.' 나는 불안한 희망을 붙잡고 법원 쪽을 바라보았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자 호송차는 움직여 법원 정문으로 진입했고, TV에서만 보았던 그 장소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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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차례대로 호송차에서 내려 교도관의 안내를 받으며 수갑을 찬 채 이동했다. 법원 복도에 도착하자 한쪽 벽에 기대어 대기하게 되었다.

“아, 씨발 오늘 판결이 잘 나와야 출소해서 그년을 요절낼 것인데.” 하면서 눈빛이 날카로운 재소자가 우리가 들리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모두 조용히 하세요, 지금부터 개인행동을 하면 안 되고 재판장 앞에서 기다립니다. 그리고 화장실 갈 사람은 교도관에게 얘기하고 가야 합니다. 자기 이름을 부르면 재판정에 들러갑니다. 알겠나요?”

“교도관님, 시간은 얼마나 걸리나요?” 누군가 물었다.

“그건 우리도 모릅니다. 아마 오늘 12명이니 마지막 사람까지 재판 판결을 받으려면 오후 늦게까지 할 것입니다. 그러나 판사님들도 퇴근 시간이 있으니 6시는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웅성거렸다.

대구에서 사업을 하던 60이 넘은 영감은 자신은 당좌수표 부도가 4천 4백만 원이기 때문에 오늘 풀려날 것이라고 장담을 하는 모습이 여유로웠다. 나는 9천 5백만 원이었다. 그러니 10개월을 맞을 것이다. 그 외 오늘은 모두 경제사범이었는데 대부분 2억~5억을 부도낸 사람들이었다.


12명 중 첫 번째로 이름을 불렀다. 그가 재판정에 들어간 지 약 30분이 지났는데 머리를 숙이고 나왔다. 교도관이 물었다. “얼마 받았소?”

“2년 6개월입니다.” 그의 대답 속에는 실망이 엿보였다. 다음 사람이 들어갔다. 우리는 자신의 형량보다 다른 사람들의 형량에 더 관심이 많았다.

나이가 조금 많은 사람이 나에게 물었다. “당신은 얼마요?”

“아, 네 9천 5백입니다.” 내가 대답하자마자 “ 10개월 아니면 1년이구먼”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6개월이면 지금 오늘로 치면 4개월만 지내면 집에 돌아가는데.’ 하고 희망을 품으려고 애썼다.


포승줄 도시락과 불안한 기도

점심시간이 되어 휴정에 들어가면서 우리에게 도시락이 나왔다. 밥을 먹는데, 포승줄이라도 풀어주면 좋으련만 묶인 채 먹어야 했다. 묶인 손으로 플라스틱 숟가락을 들어 밥을 입에 밀어 넣는 행위는 또 다른 형태의 굴욕이었다.

오후가 되어서 재판이 다시 시작되었다. 재판정에 들어가서 나오는 사람마다 하나같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깊은 실망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들이었다.


"당신은 얼마 받았습니까?" 무리 중 한 사람이 또 다른 재소자에게 물었다.

"3년 6개월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고, 그 절망이 대기실 전체를 잠식했다.

저녁 4시가 다 되도록 내 이름 부르는 소리는 없었다. 매도 먼저 맞는 놈이 마음 편하다고 했는데, 나의 마음은 점점 타들어 갔다. 지금까지 재판을 받은 재소자들이 모두 가혹한 실형을 받고 나오자 불안감은 공포로 변했다.

나는 수갑을 찬 채 눈을 감고 간절히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반복했다.

"이 모든 일이 내가 잘못하여 벌어진 일입니다. 저 나쁜 놈입니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 가족들에게 죄를 갚고 싶습니다. 그것뿐입니다.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그렇게 집에 가고 싶니?" 하고 나 자신에게 묻는 듯한 평온하고 온화한 내면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포와 불안이 씻겨 내려가고 마음이 너무나 평온해지는 순간, "김매균!" 하면서 나의 이름을 불렀다.

내가 마지막 재판이었다. 11명의 재소자가 나를 응원하는 것인지 걱정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한 마디를 뚝 던졌다.

"잘 받고 오세요."

그 소리를 뒤로하고 육중한 재판정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