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동남아시아는 휴양이나 여행을 목적으로 방문한다. 때문에 필리핀 어학연수 또한 이런 휴양지 호텔의 컨디션을 기대하고 오는 분들이 간혹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5성급 호텔에 방문했다고 해서 한국 모든 집의 퀄리티가 그와 같을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되듯이, 필리핀 어학원 기숙사 퀄리티 역시 휴양지의 새 호텔들과는 거리가 좀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글로벌 체인 호텔이라면 깔끔하게 도배나 페인팅이 되어 있겠지만, 내가 머무는 기숙사 숙소는 기존의 오래된 호텔을 리모델링한 곳임에도 로비를 제외하고는 그냥 콘크리트벽으로 되어 있는 면적이 상당하고 바닥 역시 깔끔한 타일이나 마루가 아니라 정말 생 콘크리트다. 건물을 짓다 마무리 안하고 놔둔건가? 싶은 생각이 들 수 있다.
기숙사 내 방에 그려져 있는 벽화
한국에서 숙소 사진을 먼저 보았을 때는 나름 디자인 호텔다운 독특한 벽화들이 눈에 띄어서 "오! 생각보다 퀄리티가 좋은 숙소네?"라고 생각했었지만 실제로 와서 보니 오래되고 낡은 느낌, 깔끔하지 못한 마감, 아귀가 맞지 않는 옷장과 서랍, 오래되어 빛바랜 수전과 칠이 벗겨진 샤워호스 등이 눈에 들어와 괴리감을 느낀 것이 사실이었다. 한국의 리모델링은 거의 새 건물처럼 다시 태어나는 수준이지만, 이 곳은 리모델링한 호텔이라 할지라도 한국처럼 완벽하게 깔끔한 수준은 아닌 것이다.
기숙사 방 콘크리트 천장
세부에 올 땐 밤비행기를 타고 늦게 도착하다 보니 불이 침침해서 방 안을 샅샅이 볼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니 한 구석에 하얀 콘크리트 가루먼지가 수북하고 커텐은 떨어져 있어서 뜨거운 직사광선이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알고 보니 새 에어컨을 달아놓느라 커텐을 떼어놓고, 에어컨 설치도 아직 완료되지 않은 상태이며 청소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묵게 된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메인터넌스에 이야기하니 즉시 커텐을 달아주고 청소를 해 주었다. 에어컨 설치는 2일 더 있다가 마무리되었다. 에어컨 설치에 며칠이나 걸리다니, 빨리빨리가 당연한 한국인들은 답답할 만하다.
한국에서는 만약 누수가 발생하면 그야말로 큰 일이 난다. 우리 집도 윗집 싱크대 수전의 물이 우리 집 천장으로 새서 천장을 다 뜯어 새로 도배를 하고 한바탕 난리를 치룬 적이 있었다. 하지만 세부 숙소에서 머문지 이틀차, 갑자기 숙소 방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에어컨에서 샌 것도 아니고, 무려 천장 한 가운데 3개의 스팟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침대 위로, 바닥 위로 고이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라 우선 침대를 물이 떨어지지 않는 곳으로 밀어놓고, 미안하지만 너무 놀랐기에 한국인 매니저에게 이른 아침임에도 카톡을 보냈다. 하지만 의외로 한국인 매니저는 "출근하면 메인터넌스에 이야기하겠다"며 별로 놀라지 않은 반응이었다. 그 때 깨달았다. '아, 이 정도 누수는 필리핀에서는 별 일 아니구나'라는 것을.
로비에 내려가 메인터넌스에 이야기하고 정신없이 이곳 저곳 돌아다니다 다시 방에 와 보니 어느새 떨어지던 물은 그쳐 있었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고쳐진 것이다. 원인은 아직도 모른다. 바닥도 천장도 목공이나 도배 따위는 없기 때문에 물은 그냥 닦고 말리면 끝이다. 잔고장이 많지만 이야기하면 또 빠르게 고쳐준다는 것은 장점이다. 그래서 크게 걱정이 되진 않는다. 한국이라면 엄청난 컴플레인거리일 수 있지만, 모든 시설이 다 낡아 있고 뭔가 허술해 보이다 보니 이 정도는 그러려니 넘기게 된다.
사실 이 정도 컨디션이면 장족의 발전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내가 2007년도에 머물렀던 세부 숙소는 지금 숙소보다 훨씬 낡아있었고, 어느 날 에어컨이 고장나 고쳐달라고 부탁했더니 에어컨을 떼어간 자리 벽에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 있어서 깜짝 놀랐던 기억도 있다. 밖은 바로 도로인데, 얇은 천으로 구멍만 살짝 막아두고 에어컨을 들고 간 것이다. 샤워를 할 때면 머리 위 천장에서 쥐떼들이 다다다다 달려가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다행히 내 눈 앞에 나타난 적은 없었기에 그냥 두 달을 살았다. 비가 많이 왔을 때는 당시 기숙사 1층 바닥에 물이 찰랑거리기도 했다.
지금 숙소는 에어컨도 새것으로 달아줬고, 쥐가 달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심지어 수영장까지 있으니 기준이 2007년 세부인 나로서는 그저 감지덕지다.
어제 오랜만에 외식을 하면서 다른 어머님들과 이야기하는데, 오리엔테이션 당시 "숙소에 수건은 있나요? 헤어 드라이어는 있겠죠?"하고 물었더니 직원이 "어머님, 기숙사는 호텔이 아니예요"라고 대답했다며 깔깔 웃었다. 지금은 모두들 적응해서 함께 즐겁게 지내고 있기에 당시에 했던 생각들이 얼마나 멋모르는 환상이었는지 웃어넘길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새로 오신 어머님들 가운데는 이 곳과 연계해준 유학원에 전화해 컴플레인을 하는 분도 계셨다. 직접 와 보니 사진으로 봤던 것과 너무 다르지 않냐며 많은 부분에 불만을 토로하신다. 하지만 내 경험상 우리 숙소도 내가 보기엔 세부에서 꽤나 고급스러운 기숙사이고 위치도 굉장히 좋은 편이다. 처음 세부를 온다면, 그것도 기숙사에서 생활할 것이라면 반드시 많은 부분을 내려놓고 오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한국처럼 먼지 한 톨 없는 마룻바닥 생활이나 호텔처럼 럭셔리하고 쾌적한 생활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우리 아이도 처음 숙소 방에 들어서자마자 당황하며 "이건 호텔이 아니잖아"라고 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말이 "집에 가자"였다. 7살 평생 깨끗하게 리모델링된 집, 깔끔한 호텔만 경험했다 보니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적응하게 되면 오히려 한국 가기 싫어질 것이라고, 또 조금은 불편한 환경에서도 살아보아야 배우는 것도 많아지고 커서 어떤 환경에서도 잘 살아갈 수 있게 된다고 달래고 또 달랬다. 점점 친구들과 선생님들에 익숙해지고 수영이라는 커다란 이점을 누리면서 이제는 한국 집에 가자는 말이 쏙 들어갔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얼른 아침먹으러 식당 가서 친구 만나야 한다고, 좋아하는 선생님 수업 들어가야 한다고, 빨리 수영해야 한다고 하루종일 바쁘게 종종거린다.
기숙사 내 방의 도로뷰
물론 아침에 일어나 상쾌하게 환기하려 창문을 열었을 때 들어오는 매캐한 매연과 밤새도록 이어지는 오토바이 소리, 자동차 소리가 썩 유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부 생활에는 그런 자잘한 불편함들을 상쇄하고도 남을 많은 이점들이 있다. 세부에 머무는 동안에,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지만 최대한 생생하게 세부 생활을 기록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