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집

척하는 모습,

by 글임

#장면집


문득 한참 그림을 그리던 때가 생각납니다. 심심한 느낌이 얼굴을 불쑥 내밀 때면, 여지없이 아이패드와 펜을 잡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내 머릿속 어느 부위에서 저런 그림이 나왔을까, 상담심리학을 공부하는 탓에 뇌 그림을 접할 기회가 많은 요즘은, 이 그림이 어느 신경을 타고 손가락까지 왔을까 생각해 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나름의 우주가 담겨있다고 하던데, 그 시기에는 참 보암직한 우주를 꺼내왔다 싶습니다.


최근 '흑백요리사'에서 최강록 셰프님이 우승할 때, 저는 난데없이 소리를 지르며 두 손을 번쩍 하늘로 치켜세웠습니다. 셰프님이 말하는 진심에 여러 번 마음이 동한 탓입니다. 무엇보다 ‘조림을 잘하는 척’해왔다는 셰프님의 말에, 골똘한 고민이 생겼습니다. 저분은 참 어김없이 진실하다는 생각을 하면서요.


그림을 그릴 때, 사실 저는 포옹하는 그림을 썩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좋아하는 척’ 했었지요.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하지만 ‘잘 그리는 척’ 해왔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상황이 내 그림을 보고 좋아해 주는 사람들을 만나면 은근한 낯섦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척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펜을 내려놓았습니다.


이후로는 어떤 척도 하고 싶지 않아서 고민이 되더라고요. 그 고민을 갖고 있던 사이에, 저는 잘 다니던 회사도 이직하고, 학교를 하나 마쳤습니다. 결혼을 하고, 종국에는 새로운 일도 그만두고 사장이 되었다가, 지금은 글을 읽고, 문장을 쓰고, 말을 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4년이 지났습니다.


4년이 지난 우리네 오늘에는 재미있는 문화가 하나 생겼습니다. 중고 거래 앱에서 동네 어른들끼리 모여 ‘경찰과 도둑’을 하는 문화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경찰인 척하는 사람과 도둑인 척하는 사람이 잡고 도망치는 놀이입니다. ‘경찰과 도둑’이라는 놀이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처럼, 오늘날의 이 문화도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우리는 모두 ‘척하는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 봅니다. 힘든 일을 겪어도 아무렇지 않은 척, 뛰어놀고 싶어도 어른이니까 차분한 척, 말을 잘하는 척, 전문가인 척, 다 알고 있는 척 말입니다.


때로 우리는 ‘척하는 모습’을 벗어놓을 용기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어른인 척, 엄마인 척, 아빠인 척, 전문가인 척, 괜찮은 척하지 않을 용기 말입니다. 어쩌면 그런 용기가 우리를 뛰어놀게 하지 않을까요? 어린 날 잃어버린 티 없는 웃음을 지으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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