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 이별은 냉정하게 분열은 고요하게

상트페테르부르크. 리가. 탈린. 하바롭스크. 사할린.

by 문화통역가

유라시아 대륙 횡단. 마지막 혼돈의 특혜


1992년, 제국의 경계는 허물어졌지만 체제의 잔해는 혼돈으로 남았다. 당시 학생은 저렴한 내국인 요금 티켓을 구입할 수 있었다. 루블이 무너진 혼란속에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행 비행 요금 2달러, 하바롭스크 10달러, 아이러니하게도 공항에서 시내까지 택시비는 10달러 이상이었다. 국가는 공공요금을 컨트롤했지만 시장은 자신의 속도로 달렸다. 해체된 시스템의 잔재가 만든 기묘한 특혜는 불안정하고 과도기적인 시대의 역설이었다. 덕분에 가난한 유학생은 시대의 마지막 '혼돈의 특혜'에 올라타 러시아의 심장 상트페테르부르크, 서쪽의 경계 발트해에서 극동의 하바로프스크까지 유라시아 대륙의 양 끝단을 횡단하고 있었다.


레닌그라드, 이름의 종말


1992년 초여름. 6월의 눈을 바라보며 나는 네바 강변을 걷고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밤은 완전한 어둠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늘은 짙은 푸른빛과 엷은 진줏빛 사이의 모호한 경계, 백야(White Nights)의 입구에 서 있었다. 영롱한 빛의 틈새로, 계절을 잊은 듯 섬세하고 엷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70여 년간의 추위와 이제 막 도래한 새로운 자유가 뒤섞인 그 광경은, 도시가 짊어진 취약하면서도 숭고한 평화의 초상같았다. 평화란 어쩌면 이처럼 덧없이 아름답고 예측 불가능한 기적이리라! ​


제국 해체의 고통은 수도 모스크바를 넘어 혁명의 상징인 이 도시에 깊이 스며들었다. 소비에트 역사의 상징과도 같았던 레닌그라드(Leningrad)는 일년전 스스로의 이름을 지우고 공산주의 영웅 대신, 제정 러시아의 영광을 상징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로 돌아갔다. ​


도시의 이름은 곧 정체성이다. 이름이 바뀌는 순간, 도시는 과거를 짊어진 낡은 옷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미래를 입는다. 이름의 환원은 단순히 간판을 바꾸는 행위를 넘어, 70년간의 소비에트 역사를 부인하고 단절하는 처절한 몸부림이자, 제국이 내면에서부터 붕괴하고 있음을 알리는 상징적 의식이었다. ​역사의 단절은 시민들의 일상에 큰 혼란을 안겨주었고 그 과정은 고통스러웠다. 제국이 무너졌을 때, 사람들은 주머니 속 화폐의 가치뿐 아니라, 정신적인 고향과 역사적 좌표까지 동시에 잃었다.


이념의 흔적이 지워지는 동안에도, 도시는 황제의 웅장한 유산인 에르미타주 미술관과 네바 강변의 고전적 건축물을 조망하며 영원할 것 같은 백야의 빛 속에 조용히 빛났다.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스스로 정체성을 재확인한 도시는 과거 제국의 무거운 잔해와 새로운 시대의 불안한 희망을 동시에 짊어지고 서 있었다.


발트해의 독립, 냉정하고 치밀한 거리두기


발트해는 해방감이라는 낯선 향기로 가득했다. 비폭력 저항 독립 운동인 '노래하는 혁명'(Singing Revolution)을 치른 발트 3국에게 제국 붕괴는 독립이었다. 독립은 단순히 국경의 변화가 아니었다. 차갑고도 단호한 러시아와의 거리 두기였다. 유럽적 가치를 선택하며 소련 시스템에서 가장 먼저 이탈하고 새로운 질서를 찾아 나선 분해의 시발점. 과거에 어떤 미련도 없이, 서방 세계로의 편입만이 유일한 미래라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며 제국의 외투를 벗어 던진 새로운 세계였다.


바다의 눈물, 라트비아 리가


웅장한 아르누보 양식의 건물들과 거대한 다우가바강을 품은 '대륙의 기질을 가진 도시', 리가는 차가운 발트해의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강변을 따라 흐르는 새벽안개는 건물 외벽에 매달린 조각상들을 조심스레 어루만졌고, 희미한 햇살은 갓 독립을 맞이한 도시의 설익은 자유를 비추고 있었다.


동유럽과 러시아를 잇는 지정학적 요충지로 복잡한 정체성을 가진 리가는 러시아계 주민들과의 갈등이라는 무거운 숙제를 안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해방의 기쁨과 함께, 러시아계 주민과의 새로운 민족적 경계를 세워야 하는 복잡하고 냉정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정부는 잔류한 러시아군의 조속한 철수를 거세게 요구했고,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러시아계 주민들의 시민권 문제를 두고 배타적 민족주의가 고조되었다. 러시아의 그림자는 곧 '제거해야 할 침략의 흔적'이었다. 러시아어는 주변화되었고, 거리의 간판들은 빠르게 바뀌었다. 붉은 별이 사라진 자리에는 발트의 자존심이 세워졌다.


도시에는 자본주의가 가져온 혼돈과 내일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안개처럼 깔려 있었고, 올드타운은 수백 년간 이어져 온 한자 동맹의 유산을 복원하느라 분주했다. 도시의 낡은 상점의 쇼윈도에는 '바다의 눈물'이라 불리는 보석, 호박(Amber)이 저마다 황금빛 광채를 내뿜었다. 수천 년 전 소나무 수지가 바다 밑바닥에서 시간을 견딘 보석, 호박 안에는 작은 벌레와 발트해의 거친 파도와 고대의 태양이 함께 갇혀 있었다. 척박한 세월을 견디고 기어이 빛을 발하는 라트비아의 영혼같은 작은 호박 하나를 나도 주머니에 조심스레 넣었다.


중세의 외피를 두른 에스토니아 탈린


화려한 수식보다 절제된 여백이 어울리는 도시, 좁은 골목과 붉은 지붕이 빽빽하게 들어선 '오밀조밀한 중세의 보석상자', 탈린은 긴 잠에서 깨어난 중세의 성채였다. 핀란드만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은 지붕들을 훑고 지나가며, 도시에 옅은 소금기를 흩뿌렸다. 비탈진 골목마다 닳고 닳은 석벽들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며 담백한 미감을 드러냈고, 안개에 젖은 고딕 양식의 첨탑들은 하늘을 향해 날카롭지만 고요한 선을 그렸다.


북유럽 특유의 절제된 온기와 낮은 목소리. 사람들의 눈빛에는 오랜 억압 끝에 마주한 자유에 대한 조심스런 경외심이 담겨 있었다. 소련의 그늘에서 벗어나 북유럽의 일원이 되기를 갈망했던 탈린의 시선은 독립 첫해 이미 바다 건너 헬싱키와 북유럽을 향했다. 루블화를 버리고 자국 화폐인 '크론'을 도입하며 경제적 자립을 선언했고 북유럽 편입이라는 명확한 방향성을 보여주었다.


국경 근처 러시아군과의 긴장은 팽팽했고, 러시아계 주민들의 거주 자격 문제는 사회 밑바닥에 보이지 않는 균열을 만들었다. 급격한 서구식 자본주의 전환으로 익숙했던 안전망이 사라진 자리엔 경제적 빈곤이 공존했지만 거리에는 북유럽식 합리주의와 실용주의가 빠르게 스며들었다.


하바롭스크, 제국의 공백과 아시아의 그림자 ​


발트해 연안이 제국의 서쪽 관문이었다면 극동의 교두보 하바롭스크는 아무르 강을 끼고 중국과 마주한 제국의 동쪽 관문이었다. 극동은 유럽 인접지역과는 또 다른 탈출구를 찾고 있었다.


거칠고 광활한 적막 속에 낡은 제국의 옷을 벗어 던진 변방의 도시는 두꺼운 얼음장 아래 잠든 듯 침묵했다. 상점들은 텅 비었고, 낡은 소비에트 시설들은 빛바랜 향수만을 간직한 채 정체되었다. 얼어붙은 대지 위로 낡은 트램이 지나며 내지르는 비명은 이곳이 더 이상 제국의 견고한 요새가 아니라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새로운 출구라는 선언같았다.


침묵 속에도 미약한 변화의 조짐은 있었다. 붉은 군대의 위용이 서린 레닌 광장에는 승전 기념비 대신 보따리 장수들과 중고 일본차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았다. 모스크바의 지시가 흐릿해진 빈자리를 채운 것은 생존을 위한 투박한 자본주의였다.


아무르 강 물줄기가 싣고 온 대륙의 찬 공기가 철 지난 이념의 비릿함을 씻어내듯, 신흥 아시아 자본주의 물결은 러시아 경제의 숨통을 트이게 했다. 동시에 러시아의 국경 경제가 모스크바가 아닌 베이징과 도쿄의 영향력 아래 놓이리라는 불길한 전조 역시 붉은 노을처럼 번지고 있었다.


혼재된 역사의 변주. 사할린


얼어붙은 타타르 해협의 파도가 유배의 기억을 밀어 올리는 섬, 한때는 이념의 요새였으나 이제는 잊힌 변방이된 사할린의 낡은 항구에는 버려진 철길과 녹슨 크레인들이 제국의 끊어진 혈맥처럼 위태롭게 서 있었다. 사람들은 차가운 해무를 외투처럼 걸친 채 낯선 자유보다 더 차가운 생존의 허기를 묵묵히 견뎌내고 있었다.


하바롭스크의 경제가 제국이 비운 자리를 차지하려는 '역동적 혼돈'이었다면, 사할린은 거대한 시스템에서 떨어져 나간 파편이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정적인 생존'에 가까웠다. 그 생존의 거리에서 나는 2미터 정도 자기 몸집만한 살아있는 킹크랩을 어깨에 메고 가는 한 남자를 마주쳤다. 오오츠크해에서 건져낸 킹크랩의 무게는 제국의 몰락을 견뎌내며 당장의 생존이 절실한 가장의 고단한 삶만큼 무거워 보였다.

러시아 땅이지만 일본의 그림자와 고향을 잃은 한민족의 한이 교차하는 복잡한 지점. 지리적 위치 만큼이나 역사가 혼재된 사할린은 '냉전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섬'이었다. 해방 후에도 귀국하지 못했던 수많은 한인들의 역사가 땅 밑에 묻혀 있었다. 우연히 만난 고려인 아주머니는 마당에서 골뱅이가 가득한 바구니를 손질하며 역사의 한을 이야기했다. 수많은 고비를 넘어온 그녀의 강인하고도 서글픈 눈빛. 이념이 새긴 상흔이 얼마나 깊고 멀리까지 닿는지를, 이 모든 혼란의 가장자리에서 가장 소외받고 고통받는 이들이 누구인지를 목격하는 순간이었다.


사할린은 자원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힌 새로운 세계 질서의 축소판이기도 했다. 제국 붕괴 직후 파산 상태였던 러시아가 서방의 자본과 기술로 사할린 대륙붕의 석유와 가스를 개발하며 극동 지역에서 가장 빠르게 외부 자본의 영향을 받았다. '역사상 최대 에너지 협력 사업이자 극동의 지정학을 바꾼 경제 대전환' 사할린 프로젝트가 1992년 시동을 걸고 있었다.


텅 빈 지도를 채우는 새로운 정체성


대륙의 양 끝에서 내가 목격한 제국의 몰락은 광대하고 복잡한 현상이었다. 제국은 폭발적으로 무너진 것이 아니라, 내부의 통제력을 잃고 마치 거대한 풍선이 '바람이 빠지듯' 서서히 수축하고 있었다. 하나의 이름으로 묶여 있던 거대한 세계가 파편으로 쪼개져 텅 빈 지도 를 각자의 색으로 채워 나가던 분열의 시작.


유럽에서 찢어지고 아시아에서 '경제적 침투'를 허용하며 제국이 지탱할 힘을 잃고 길을 잃는 동안, 변방은 경제적 생존의 길을 모색하며 새로운 축을 형성하고 있었다. 발트해가 과거의 흔적을 지우며 차갑고 단호하게 유럽을 향해 문을 열었다면,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제국의 심장이라는 비대한 자부심과 빈곤 사이의 괴리에 신음했고, 극동은 중앙의 통제가 닿지 않는 거친 국경 너머에서 새로운 생존 방식을 고독하게 모색하고 있었다. 그 방향성의 차이는 명확했고 지리적 양 극단에는 경제적, 정치적 양극화가 자라고 있었다.



​세계사 산책


질서의 해체와 통합의 충돌


​1992년은 유럽에서 정반대의 흐름이 충돌하며 새로운 세계 질서를 그린 해였다. 서쪽은 통합을 서둘렀고, 동쪽은 해체의 고통 속에서 신음했다.


1. 유럽 연합(EU)의 공식 출범, 마스트리흐트 조약 체결(2월)


​경제를 넘어 정치적 통합까지 완성하며 단일 시장과 단일 통화라는 미래를 약속한 사건이었다. 이 조약은 발트 3국과 같은 동유럽 국가들이 간절히 열망하던 강력한 통합 질서가 서유럽에서 구축되었음을 의미하며, 안정과 번영을 향한 서유럽의 움직임을 확고히 했다. 그러나 이 통합은 동시에 통합에 속하지 못한 러시아와의 정치적·경제적 격차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으며, 유럽 내부에 새로운 분열선을 그었다.


2. ​옐친 정부. 급진적 시장 개혁 '쇼크 요법' 단행 (1월)


소련 경제를 단숨에 시장 경제로 전환시키려는 시도였으나, 결과는 재앙이었다. 극심한 하이퍼 인플레이션과 빈곤이 초래되어 저축은 휴지 조각이 되고, 광범위한 경제적 불안정이 러시아 대중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자유가 가져다준 것이 고통과 혼란이라는 인식이 대중의 마음에 깊이 박혔다. 이 경제적 분열은 훗날 강력한 통제력을 갈망하게 만드는 심리적 토양이 되었으며, 러시아 사회의 구심점 해체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3. ​발칸반도 유고슬라비아 해체. 보스니아 내전 발발(4월)


냉전의 이념 대결이 끝난 자리는 오랜 민족적, 종교적 증오가 채웠다. 분리 독립을 둘러싼 갈등은 전면적인 내전으로 비화했고, 유럽 한복판에서 '민족 청소(Ethnic Cleansing)'라는 야만적 분열이 현실화되었다. 이 사건은 억압된 민족적 증오가 얼마나 폭발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잔혹하게 보여주며, 새로운 형태의 분열이 시작되었음을 전 세계에 경고했다.


분열의 징후 3. 통합의 속도차. 양극화의 소외감

​광활한 대륙의 양 끝에서 발견한 분열의 징후는 바로 '통합의 속도차'가 낳은 지정학적 소외감이었다. ​발트 3국이 마스트리흐트 조약으로 상징되는 서유럽의 통합이라는 희망의 빛을 향해 필사적으로 달렸던 반면, 하바로프스크와 같은 러시아의 변방은 쇼크 요법의 충격파와 구체제의 잔재 속에 고립되어 고통받았다.


자본주의의 파도는 서쪽에는 번영의 기회를, 동쪽에는 빈곤과 극심한 혼돈이라는 파괴적인 결과를 남겼다. 내국인 요금이라는 기묘한 특혜로 극동을 여행할 수 있었던 것도, 국가의 시스템이 붕괴된 채 남긴 잔여물이 만들어낸 역설이었다.


​극단적인 경제적 양극화는 단순한 소득 격차를 넘어 러시아 대중의 심리적 분열을 심화시켰다. 개혁의 혜택을 받지 못한 국민들은 '우리는 서방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질서에 의해 버려졌다'는 깊은 피해 의식과 굴욕감을 갖기 시작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제국의 이름을 되찾았듯, 러시아는 서방의 통합 질서에 편입되기를 거부하고, 대신 독자적인 '강한 질서'와 제국적 영광을 추구하게 만드는 지정학적 분열의 씨앗을 품게 된 것이다.


​이 시기, 서방은 러시아의 고통을 안일하게 무시했다. 서방은 러시아의 고통을 '개혁의 필연적 과정'으로만 치부하며, 그들이 겪는 경제적, 심리적 좌절에 충분히 공감하고 포용하지 못했다. 러시아를 통합의 파트너가 아닌, 극복해야 할 후진적인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통합의 속도차'가 만든 심리적, 경제적 간극은 러시아가 서방에 대한 불신을 키우고 반서방 정서를 강화하는 토대가 되었다. 우리는 이때 버려진 자들의 소외감이 낳은 분열의 씨앗을 직시하지 못했다. 두 번째 냉전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가 간과한 분열의 징후, 평화의 기회를 놓친 또 하나의 단서였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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