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반도 얄타 & 소치. 모스크바
벨벳 시즌의 달콤함, 러시아 흑해 소치
1993년 9월 말, 흑해 연안 소치는 뜨거운 무더위가 가신 뒤 찾아오는 부드러운 햇살과 따뜻한 바다가 마치 벨벳처럼 피부를 감싸는 황금 휴양기, '벨벳 시즌(바르하트니 시즌)'의 찬란한 평화 속에 잠겨 있었다. 해변에는 거인이 남긴 쓸쓸한 유산, 텅 빈 대형 리조트와 낡은 건물들이 끈적한 노스탤지어를 드리운 채 서 있었다.
구소련 엘리트들이 휴가를 즐기던 '붉은 휴양지'. 모스크바의 권력 투쟁이 정점으로 치닫던 당시, 소치는 옐친 대통령이 휴양을 빌미로 정적들을 타도할 강경책을 구상하던 '서슬 퍼런 권력의 사령부'이자, 러시아의 새로운 지배 질서가 잉태되던 '정치적 용광로'였다.
그 해변, 흑해의 아름다운 풍경 아래, 한껏 휴양지의 멋을 내고 바다 냄새와 따뜻한 햇빛을 즐기던 내가, 터키식 모래 커피 만드는 모습을 보며 환하게 웃음짓던 내가, 빈티지풍의 사진으로 박제되어, 거기에 서 있다.
거리에서 사람들은 루블화 뭉치와 불안정한 미래를 이야기했지만 햇빛 아래서 만큼은 과거의 평온했던 시절을 추억하려 애쓰는 듯했다.
소치 벨벳 시즌의 부드럽고 화사한 바다향을 음미하며 즐기는 달콤한 휴식은 격변하는 역사 속에서 잠시 허락된 마지막 평화처럼 느껴졌다. 내일을 모르던 격랑의 시절이었다. 며칠후 옐친이 소치에서 구상한 피의 10월 쿠데타 사건이 터졌다.
겨울의 얄타. 크림반도 우크라이나
1993년 연초에 방문했던 크림반도의 얄타. 유명한 얄타회담에서 1945년 전후 질서를 결정했던 역사적인 장소였다. 역시 구소련 시절의 대표적 휴양지로 우크라이나 땅이었지만, 거리를 가득 메운 것은 러시아 민족주의의 정서였다. 사람들은 우크라이나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말을 공공연히 내뱉었다.
눈 덮인 해안가 '제비의 성'이 역사 속 동화처럼 고고하게 서 있던 얄타는'제국의 영광이 빠져나간 뒤의 서늘한 폐허' 같았다. 흑해 함대의 소유권을 두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날 선 대립을 이어가던 '회색빛 분쟁의 전초기지'이기도 했다.
얄타의 거리를 취재하던 미국인 기자를 우연히 만나 대화를 나눴다. 아마도 얄타의 복잡하고 혼돈스런 상황을 기록하고 있었으리라. 어쩌면 크림반도에는 생뚱맞던 동양인 유학생과의 대화도 그의 기사 한줄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언젠가 더 큰 충돌의 불씨가 될 수 있는 지정학적 분열의 긴장을 묻어 둔 채 나는 얄타를 떠났다. 그 기자도 어디선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쟁을 보고 있겠지. 나처럼 과거의 흔적을 기억하며!
공동낙원의 다른 운명
두 흑해 도시는 한때 소비에트의 공동 낙원이었으나, 이제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국경이라는 새로운 갈등의 그림자를 품고 조용히 대치하고 있었다.
소치가 제국의 혼란을 끝내기 위해 "누가 주인인가"를 결정짓는 결단의 공간이었다면, 얄타는 제국이 무너진 뒤 "우리는 이제 누구인가"를 묻는 상실의 공간이었다. 소치가 화려한 아열대 식물들과 옐친의 강인한 의지의 대조였다면 얄타에는 겨울 바다의 쓸쓸함과 흑해 함대 기지의 긴장감이 겹쳐 있었다.
2014년. 푸틴 대통령이 '강한 러시아의 부활'을 전 세계에 선포하듯 소치 동계 올림픽이라는 대관식을 개최하고, 폐막 직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합병했을때, 난 다시 그해의 여행을 떠 올렸다.
1993년 옐친이 소치 별장에서 정적들과 피 말리는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버텼다면, 21년 뒤 푸틴은 소치 올림픽을 통해 자신의 제국이 안정기에 접어들었음을 선언하며 크림반도 점령으로 다시 영토의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멈추지 않은 수축의 파열음
제국이 수축할때, 발트해 도시들이 단호하게 제국의 외투를 벗어 던진 반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서구 사이의 거대한 '완충지대(Buffer Zone)'로 남았다. 발트해에서 러시아어를 '침략의 흔적'으로 규정하고 빠르게 도려낸 반면, 우크라이나는 그 흔적들과 공생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인에게는 한 지붕 아래 살던 형제에 대한 익숙함과, 이제는 내 집을 지켜야 한다는 강한 경계심이 뒤섞인 복잡한 애증이 있었다.1993년은 스탈린의 강제 집단 농장화 정책에 저항하던 우크라이나 농민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소련 정부가 의도적으로 식량을 수탈하여 수백만 명(약 350만~700만 명 추산)을 굶겨 죽인 '인위적 학살'인 홀로도모르 대기근 60주년이 되는 해였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소련 시절 우리가 생산한 식량과 자원을 러시아가 다 가져갔다"고 믿었고 러시아는 '언제든 우리 바다(흑해)와 땅(크림반도)을 빼앗아 갈 수 있는 힘센 이웃'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러시아인들에게 우크라이나는 제국의 심장과 너무 밀접하게 맞물려 있는 '뿌리'이자, 역사의 출발점인 '키이우 루스'가 있는 곳이었다. 발트해 도시가 언젠가 떠날 남이었다면 우크라이나의 이탈은 러시아에게 정체성의 상실이자 심리적 거세였다. 우크라이나 내의 군수 산업, 흑해 함대, 에너지 망등의 러시아적 유산 역시 너무나 거대했다.
미완의 이별이 결국 곪아 터지며, 러시아계 주민 보호 명분 등 과거의 잔재가 훗날 전쟁의 빌미가 된다. 결국 우크라이나 전쟁은 1991년에 시작된 '제국 몰락의 과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잔혹한 증거였다. 발트해는 차갑고 치밀하게 거리두기에 성공하며 새로운 지도를 완성했지만, 우크라이나는 제국의 중력권에서 벗어나려는 궤도 수정의 대가를 아직도 피로 치르고 있는 셈이다.
모스크바로의 긴박한 귀환
소치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기 바로 전날, 모스크바에 쿠데타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TV 화면에는 총을 든 군인들이 거리를 메웠고, 사람들은 혼란 속에 모스크바행 일정을 취소했다. 국제 전화는 우체국에 가서 신청한 후 기다려야 통화가 되고 카드도 통용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완전한 고립감 속에서 잠시 터키로 피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수중에 남은 현금은 얼마 되지 않았고, '대사관이 귀국 전세기를 보내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결국 폭풍의 중심 모스크바행 비행기에 올랐다.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했을 때, 어둠 속에서 총을 든 군인들이 초조하게 안내하는 긴장감 넘치는 풍경은 흑해의 평화와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공항의 정적과 군인들의 날카로운 눈빛은 국가적 위기가 개인의 일상에 얼마나 깊숙이 침투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헌정위기 10월 쿠데타
1993년 10월 4일, 모스크바 시내 한복판에서 전차가 의회 건물에 직접 포격을 가하는 충격적 장면이 전 세계에 중계되었다. 개혁의 속도를 늦추려는 보수적 의회(인민대표대회)와 이를 강제로 해산하려는 보리스 옐친 대통령 사이의 권력 투쟁이었다. 소치의 별장에서 구상을 마친 옐친 대통령은 의회 해산 명령을 거부하는 의원들이 농성 중이던 '화이트 하우스(러시아 의회)'를 무력으로 진압했고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며 러시아 민주주의는 커다란 오점을 남겼다.
12월, 대통령에게 의회 해산권과 광범위한 임명권을 부여하는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 헌법이 채택된다. 훗날 푸틴으로 이어지는 권위주의적 통치 체제의 제도적 기틀이었다. 소련 해체 이후 지속된 정치적 불확실성은 옐친의 승리로 강제 종결된다. 의회 내 구소련 세력은 몰락했고, 러시아는 '충격 요법'이라는 급진적 시장경제 전환으로 가속했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정경유착 세력인 '올리가르히'와 민생 파탄은 러시아 사회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1993년 10월은 제국이 무너진 뒤 텅 빈 지도 위를 누가 그릴 것인가를 두고 벌어진 마지막 내전이자, 러시아의 강력한 1인 지배 체제가 잉태된 순간이었다.
검게 불탄 화이트 하우스. 사진의 기록
공항에서 밤늦게 날선 불안을 안고 집에 돌아왔지만 다음 날 아침 일찍 또 다시 호기롭게 포탄을 맞은 러시아 백악관(의회 건물) 앞에 섰다. 쿠데타의 폭력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던 건물의 상처 앞에서 총을 멘 군인들과 찍은 사진은, 민주주의가 무력 앞에서 얼마나 쉽게, 잔인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목격한 기록으로 남았다.
흑해의 달콤한 휴식과 모스크바의 검게 그을은 현장, 소치의 평화가 모스크바의 포성으로 산산이 부서진 경험은, 자유의 불꽃이 얼마나 쉽게 절망으로 바뀔 수 있는지를 차갑게 증언했다. 그 두 극단의 경험이 1993년의 기억을 정의했다. 소치 공항에서 신용카드 한 장 없이 모스크바로 돌아가야 했던 상황은, 이념 전쟁이 끝난 후 세계가 어떻게 재편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강력한 '달러'와 '카드'라는 자본주의의 물적 토대가 없이는, 자유와 도피조차 불가능한 시대가 열린 것이다.
세계사 산책
새로운 시스템 질서의 출범과 갈등 : 냉전 이후의 새로운 글로벌 시스템 질서가 태동하고, 지역적 시스템 재편이 일어났던 중요한 해이다.
1. 유럽연합(EU)의 공식 출범
마스트리히트 조약(Maastricht Treaty)이 1993년 11월 1일에 공식 발효되면서 유럽 공동체(EC)가 유럽연합(European Union, EU)으로 공식 출범한다. 이로써 유럽 국가들은 공동의 외교 정책, 안보 정책, 그리고 미래의 단일 통화 시스템을 공유하는 초국가적 정치-경제 시스템을 구축한다. 이 시스템은 주권의 일부를 공유하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 연합이라는 시스템적 실험이었다
2.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경제' 시스템 공식 채택
1993년 3월, 제8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에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개념이 공식적으로 삽입된다. 이는 중국이 공산당의 강력한 통제 시스템을 유지하면서도 자본주의적 시장 시스템의 효율성을 전면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이중 시스템 전략 공식화였다. 이 결정은 중국을 폭발적인 경제 성장의 궤도에 올려놓았지만, 훗날 미국 민주주의 시스템과의 근본적인 가치 시스템 대립을 예고하는 씨앗이 되었다.
3. 오슬로 협정 체결
1993년 9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사이에 오슬로 협정(Oslo Accords)이 체결된다. 이는 상호 인정을 기반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의 수립을 핵심으로 하는 최초의 평화 시스템 구축 시도였다. 이 사건은 수십 년간 지속된 중동 분쟁 시스템을 종식시키고 '두 국가 해법'을 공식적인 평화 시스템 로드맵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탈냉전 시대의 중요한 외교 시스템 모델이었다.
분열의 징후 4. '혼란 종식'을 위한 권위주의 선택
질서의 폭력적 재편과 크림반도의 미온적 분열
1993년은 러시아가 혼란을 끝내기 위해 폭력을 용인하는 시스템으로 회귀하고, 영토 분열의 씨앗을 품은 해였다.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모스크바 헌정 위기였다. 옐친 대통령과 반대파 의회 간의 권력 투쟁이 탱크 포격이라는 폭력적 종말을 맞았다.
이 사건은 러시아 민주주의가 폭력적인 충돌을 통해 시험대에 올랐으며,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민주적 절차보다 힘에 의한 질서 재확립을 선택했음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모스크바 백악관에 포탄이 터지는 장면은 러시아 대중에게 자유 민주주의가 곧 혼란과 폭력을 수반하는 체제라는 극심한 피로감을 안겨주었다. 개혁의 고통, 쇼크 요법에 이은 정치적 무력 충돌을 목격한 국민들은 자유를 희생하더라도 질서와 안정을 되찾아 줄 강력한 통제 주체를 갈망하게 되었다.
이 절박한 심리는 12월, 옐친이 헌법을 통해 권력을 집중시킨 행위를 합리화했다. 권위주의는 혼란을 잠재우는 달콤한 유혹이었으며, 러시아 대중은 이 유혹을 받아들임으로써 영구적인 분열의 길로 접어들었다. 평화를 놓친 가장 명확한 징후는 바로 '권위주의의 씨앗'을 심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이때 권위주의의 부활이라는 징후를 민주주의로 가는 일시적 진통으로 안일하게 오판하고 무시했다. 서방 세계는 러시아의 혼돈을 틈타 힘에 의한 질서 회복이 일어나는 것을 간과했고, 이를 방지하기 위한 깊은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 선택이 바로 훗날 러시아 지도자들이 국내외 문제에 민주적 절차 대신 폭력적 수단을 정당화하는 심리적 기반이 되었다.
크림반도의 그림자와 체첸 분쟁 역시 이 권위주의적 논리 아래에서 영토 보전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우리가 간과했던 이 '혼란 종식'을 향한 권위주의의 달콤한 유혹은 분열의 씨앗이었다.
한편, 흑해의 아름다운 휴양지였던 크림반도를 둘러싼 갈등은 지정학적 문제로 확대되었다. 얄타가 속한 크림반도는 구소련 붕괴 후 우크라이나 영토로 귀속되었으나, 주민 대다수가 러시아계였기 때문에 러시아 측의 영토 주장과 개입이 연중 끊이지 않았다.
이 분쟁은 단순히 국경 문제가 아니었다. 이는 러시아가 '잃어버린 러시아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주변국에 군사적·정치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지정학적 논리를 구축하는 시발점이었다.
흑해의 미온적인 분열이 30년 뒤 결국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낳았다는 사실은 섬뜩한 통찰을 남긴다. 제국은 해체되었지만, 그 끈적한 그림자는 여전히 남아 역사를 잠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