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 중앙아시아, 신냉전의 매복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by 문화통역가

모스크바를 떠나며.


1994년 봄, 모스크바는 자본주의의 화려한 간판과 구소련의 남루한 배급 행렬, 옐친의 불안한 권력과 마피아의 총성이 뒤섞인 '통제 불능의 도가니'였다. 벼룩시장에는 훈장을 가슴에 단 퇴역 장교들이 빵을 사기 위해 가재도구를 팔았고, 그 옆으로 벤츠를 탄 신흥 재벌, 올리가르히들이 지나갔다. 내가 좋아했던, 투박하지만 알고나면 정감있던 3년전의 모스크바 사람들은 힘든 시간을 견디며 예민하게 변해갔고 유학생에게 혜택이던 이중물가도 사라져갔다. 그해 나는 '모스크바의 봄은 갔노라고' 중얼거리며 모스크바를 떠났다. 귀국전 마지막 여행지가 중앙아시아였다.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이지만 모스크바에서는 멀고 먼 남쪽 변방 중앙아시아. 언젠가 준비없이 3박 4일 우즈베키스탄행 기차를 탔다가 딱딱한 침대가 빼꼭한 기차칸에서 몇시간을 보내고 첫 정거장에서 내려 돌아온 적이 있었다. 비행은 가뿐하게 나를 중앙아시아의 초원으로 옮겨 주었다. 내전중인 타지키스탄과 천연가스를 무기로 대통령 신격화 중이던 투르크메니스탄을 비켜 카자흐스탄, 키르기스탄, 우즈베키스탄이 나의 목적지였다.


소련 붕괴 3년. 고립된 독립이라는 선물


고요한 혼돈. 중앙아시아는 모스크바와는 또 다른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이곳은 서구 자본주의의 물결이 도달하기엔 너무 멀었고 러시아의 통제가 미치기엔 너무 넓었다. 소련이라는 거대한 지붕이 사라진 지 3년, 1994년의 중앙아시아는 '독립'이라는 축제의 환희 대신 차가운 생존의 시험대에 서 있었다. 제국의 붕괴는 '고립된 독립'이라는 모호한 선물을 주었다.


소련 시절의 중앙 계획 경제가 멈추자, 산업 시설도 멈췄다. 드넓은 대륙을 잇는 도로에는 당나귀나 낡은 트럭과 버스들이 보였고, 물류의 단절은 삶의 모든 것을 멈추게 했다. 모스크바가 '무엇이 될 것인가'를 고민했다면, 이곳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고민했다.​ 정치보다 생존 자체가 문제였다.


소련이라는 두꺼운 장막이 걷히자,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해방된 거인들이 어설픈 기지개를 켜며 새로운 꿈을 꾸고 있었다. 사람들은 오랜 전통과 씨족 중심의 공동체로 회귀했고 공산주의 영웅의 이름은 민족 영웅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카자흐스탄. 전쟁의 기원이 적힌 성서


​지평선이 하늘과 맞닿은 압도적인 스텝(Steppe)의 침묵. 여름인데도 흰 눈을 이고 있는 설산이 빛났다. 알마티 거리에는 라틴 문자로 바뀐 간판과 키릴 문자의 잔해가 뒤섞여 묘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고층 건물 대신 푸른 가로수와 낡은 소비에트식 아파트 단지, 계획적인 넓은 도로가 인상적이었다.


카자흐스탄은 당시 약 1,400기의 핵탄두를 보유한 세계 4위 핵 보유국이었다.1994년 12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개최된 CSCE(유럽안보협력기구) 정상회의에서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벨라루스가 구소련의 핵무기를 완전히 포기하는 대가로, 미국·영국·러시아가 이들의 주권과 영토 보존을 약속한 안보 보장 문서, 부다페스트 양해각서(Budapest Memorandum)가 체결된다.


당시 강력한 권한으로 경제 개혁중이던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핵을 '러시아를 떼어내고 경제를 살릴 카드'로 사용했다. 소련 시절 카자흐스탄 영토 세미팔라틴스크에서 수백 번의 핵실험이 이뤄져 환경 파괴가 극심했던 국민 정서상 핵에 대한 거부감도 강했고 이 유산을 유지할 경제적 능력도 없었다. 핵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경제 원조와 셰브론(Chevron) 같은 거대 석유 자본의 투자를 끌어냈다.


세계 3위 핵보유국이던 우크라이나가 핵포기를 '러시아로부터의 완전한 이별'을 위한 수단으로 여겼다면, 지정학적, 정치적으로 다른 국면의 카자흐스탄은 러시아와 군사적·경제적으로 여전히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는 '균형 전략'을 사용했다. 28년이 흐른 2022년, 1994년의 선택은 전혀 다른 두 개의 '러시아군 진입'으로 나타났다.


2022. 1월, ​카자흐스탄. 민생고 폭발로 반정부 시위가 시작되어 알마티 시내가 불타고 정권이 위태롭자, 카자흐스탄 대통령은 스스로 러시아군을 '초대'한다. 1994년에 러시아를 안전 보장자로 선택한 결과, 위기의 순간 자국의 주권을 제국에게 다시 빌려주어야 했다.


2022. 2월, 우크라이나. 1994년에 핵을 포기하고 홀로 서려 했던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침공'을 받는다. 종잇조각 같은 영토 보장 약속을 믿고 이빨을 뽑았던 사자는 결국 30년 뒤 참혹한 전선에서 피를 흘리게 된다.


1994년 봄, 중앙아시아를 걷던 나는 그저 한 시대의 저묾을 보는 여행자였다. 하지만 30년이 지나 다시 돌아본 그 길은 오늘날 전쟁의 기원이 적힌 성서와도 같았다.​ 러시아를 곁에 두고 실리를 챙긴 카자흐스탄의 영리함은 훗날 '종속'이라는 족쇄가 되었고, 평화의 약속을 믿고 홀로 서려 했던 우크라이나의 순진함은 '침략'이라는 비극이 되었다. 역사는 냉혹했다.


키르기스스탄. 천산의 성벽과 형제의 얼굴


수도 비슈켁에는 한국사람들과 너무 닮은 사람들이 거리를 걷고 있었다. 키르키스탄에는 "옛날에 아주 닮은 형제가 살았는데, 고기를 좋아하는 형은 키르기스에 남고, 물고기를 좋아하는 동생은 바다를 찾아 동쪽(한국)으로 갔다."는 민담이 존재한다고. 인류학적으로 한국인과 키르기스인은 모두 북방계 몽골로이드로 알타이(Altai)산맥을 고향으로 동쪽으로 이동한 무리는 한민족, 그 자리에 남거나 서쪽으로 이동한 이들이 키르기스인이 되었다고 한다.


아스카르 아카예프 대통령은 중앙아시아 5국 중에서는 그나마 가장 민주적인 개혁을 시도했지만, 경제적 자립이라는 막막한 숙제가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시민들은 갑작스러운 독립 후의 경제적 혼란과 정치적 불확실성 속에서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공존했다. ​


비슈켁을 벗어나 영롱한 푸른 물빛을 뿜어내는 거대한 이식쿨 호수로 향하면, 인간의 모든 분주함이 무의미해지는 만년설을 인 천산산맥의 웅장함이 있다. 자연의 영원함이 인간의 짧은 역사를 묵묵히 품고 있었고 하늘로 솟아오른 산맥의 능선들은 마치 이방인의 침입을 막는 푸른 장벽 같았다. 드넓은 고원 지대에는 아직 유목 생활의 흔적이 있었지만 사람들의 얼굴에 아직 남아있는 순수함은 다가올 경제적 빈곤과 지역 간의 갈등으로 쉬이 깨어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우즈베키스탄. 사막의 영혼과 대우(DAEWOO) 신화


건조한 사막의 열기와 푸른 오아시스 도시의 대비. 타슈켄트는 소련 시대의 건축물과 함께 화려한 모자이크와 이슬람식 돔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고대 실크로드 유적들은 수천 년의 역사를 묵묵히 증언하고 있었고, 푸른 돔과 미나레트들은 70년간 억압된 이슬람의 영혼이 다시 살아나고 있음을 상징하는 듯했다.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의 강력한 중앙집권 시스템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도시. 시내 중심의 정복자 티무르 동상은 과거 제국의 영광과 현대 지도자의 강한 리더십을 상징하며, 잃어버린 자긍심과 역사적 뿌리를 되찾으려는 염원을 담고 있었다.


강력한 중앙집권 정권 아래, 아사카 벌판에선 대우자동차 공장이 건설되고 있었다. 러시아의 낡은 군사력과 중국의 조잡한 물건들 사이에서, 한국의 티코와 다마스는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의 상징이었다.


중앙아시아 공통의 위기


지리적으로 인접한 중앙아시아 세 나라는 소련이 남긴 이중적 유산 때문에 공통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1. 권위주의적 민족주의


발트해의 민족주의가 시민들의 '노래하는 혁명'처럼 아래로부터 터져 나왔다면, 중앙아시아는 위로부터의 권위주의적 민족주의였다. 독립을 맞은 구소련 관료 출신 지도자들이 하루아침에 민족주의자로 변신했다. 이념이 사라진 빈자리를 민족주의라는 깃발로 채우고 문자를 바꾸는 등 외형적 변화에 집중했다.


나자르바예프나 카리모프 같은 인물들은 독재 권력 정당화를 위해 '민족'이라는 카드를 꺼냈고 부족 중심의 갈등을 누르기 위해 '강력한 지도자 숭배'와 결합했다. 칭기즈칸이나 티무르 같은 과거의 영웅을 소환해 "우리도 위대한 역사가 있다"고 강조하며 국민들을 결집시켰다. 개인 권력 강화에 집중했던 권위주의적 지도자가 국민에게 "우리는 이제 하나다"라고 주입하는 '국가 주도형 민족주의'는 '자유로운 국가 건설'을 기대했던 민중들의 희망을 좌절시키는 정치적 후퇴였다.


2. 소수민족. 또다시 잃어버린 고향


배타적인 토착 민족 중심의 정체성 강화는, 러시아계나 소수 민족에게는 불안한 그림자였다. 새로운 민족주의가 이들을 포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배척하면서 사회 내부의 분열이 심화되었다. 중앙아시아의 소수민족 정착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구소련 제국의 두 가지 폭력적인 힘의 결과였다.


첫째는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 즉 숙청이었다. 소련 지도부는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되거나 잠재적 반역 세력으로 의심되는 민족 집단을 그들의 본거지에서 강제로 추방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1937년 극동에서 황무지였던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이며, 체첸인, 볼가 독일인 등도 이렇게 중앙아시아에 정착했다. 국가 폭력의 잔인한 기록이었다.​


둘째는 소련 제국의 계획된 인력 배치였다. 소련은 이 지역의 개발과 통제를 위해 의도적으로 인력을 배치했다. 많은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이 행정 관리, 기술자, 군인 자격으로 이주하여 제국의 통치 구조를 이식하는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결국 1994년, 소수민족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정착한 땅에서 제국이 사라진 후 새로이 부상하는 토착 민족주의의 칼날을 맞고 있었다. 극동에서 스탈린의 서슬 퍼런 명령으로 뿌리째 뽑혀 이곳에 던져진 고려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많은 이들이 다시 고향을 떠나야 했다. 떠날 곳이 있는 사람들은 떠났다. 지금은 인구소멸로 해외동포 귀국을 장려하는 분위기가 있지만 당시의 한국은 해외동포 귀환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거나, 이들이 한국의 해외 기지가 되기를 바랬거나. 고향으로 떠나는 유태인이나 독일인들을 바라보는 고려인들은 서글프게 또 다시 갈곳을 잃었다. 낯선 황무지에 기어이 삶을 일궈낸 그들의 눈빛에는 이제 다가오는 다른 세상에 대한 불안과, 희망의 불빛이 섞여 있었다.​ 이념의 폭풍이 개인의 삶에 남긴 깊은 자국과 함께.


3. 불안정한 거대한 화약고


스탈린이 남긴 기괴한 국경선은 민족의 거주지를 정확히 반영하지 못했다. 독립이라는 축제가 끝나기도 전에, 억눌려 있던 민족, 종교, 영토 갈등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국가 간, 국가 내부의 토지, 물, 자원 분배를 둘러싼 갈등의 불씨와 해묵은 부족 갈등은 칼날이 되어 돌아온다.


타지키스탄 내전 (1992~1997)

​독립 직후 구공산당 세력과 이슬람 반군 세력이 맞붙어 수만 명이 희생되고 기차는 피난민으로 가득 찼다. 단순한 이념 전쟁을 넘어, 가문과 부족 간의 해묵은 원한이 폭발한 비극적인 전쟁이었다. 러시아는 군사적으로 여전히 이 지역의 숨통을 쥐고 국경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깊숙이 개입해 있었다.


페르가나 계곡의 '지도 쪼개기' 갈등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3국이 얽혀 있는 페르가나 계곡은 당시 일촉즉발 지역이었다. 스탈린 시절 민족 분포를 무시하고 그어놓은 복잡한 국경선 때문에, 내 집은 우즈베키스탄인데 밭은 키르기스스탄인 식의 '월경지(Enclave)' 문제가 터졌다. 어제까지 이웃이던 사람들이 갑자기 국경 수비대가 되어 총을 들고 길을 막아서는 혼란이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의 여파

체첸지역의 불안과 함께. ​중앙아시아와 맞닿은 코카서스 지역의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의 영토 갈등 영향이 중앙아시아를 흔들었다.1994년 5월 휴전 협정이 맺어졌지만 " 소련이 무너진 자리에 민족끼리 서로 죽일 수도 있다"는 공포가 확산되었다.


해방감과 새로운 배척이 뒤섞인 위태로운 역설. 거대한 냉전은 끝났지만, 수많은 작은 내부의 냉전이 시작되고 평화는 아직 그 땅에 온전히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4. ​루블화 구권 폐기. 제국의 배신과 새로운 각축전


1993년 말 러시아 중앙은행은 전격적으로 1961년~1992년 사이에 발행된 구권 루블화 사용을 중단한다. ​자국 물가를 잡기 위해, 이웃 나라들이 쓰던 헌 돈을 하루아침에 쓰레기로 만드는 ​러시아의 잔인한 배신이었다. 시장에는 쓰레기 돈뭉치가 뒹굴었고, 사람들은 화폐의 죽음 앞에서 절망하며 새로운 생존법을 찾아야 했다. 러시아와 경제적으로 묶여 있던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고 각자 '자국 화폐'를 급조해 발행하기 시작했다.


제국의 배신의 한편에서 새로운 역동적인 움직임이 느껴졌다. ​러시아가 비운 경제적 틈새로 중국의 저가 생필품이 밀물처럼 들어와 시장을 채웠다. 물건이 귀했던 소련 시절의 칙칙함에서 활기로의 변화였다. 값싸고 실용적인 옷가지와 생필품들이, 러시아어를 쓰는 상인들의 손을 거쳐 팔려나갔다. 시장에서 고른 중국산 옷은 내 중앙아시아 기념품이 되었다. 공항에서 만난 중국인 커플은 중앙아시아 카펫을 잔뜩 사서 돌아가고 있었다.


이는 ​단순한 교역이 아니었다. 30년 가까이 이념적으로 적대했던 이웃이, 소련 붕괴라는 공백을 틈타 경제적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신호였다. 중앙아시아의 경제적 시선이 모스크바에서 조용히, 단호하게 동쪽의 베이징으로 그 방향을 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이로 한국의 대우(DAEWOO)가 '선진 문명'의 상징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끊질긴 생명력의 희망


1994년 봄, 중앙아시아는 러시아의 군사적 위압과 중국의 상업적 침투, 그리고 한국이라는 새로운 희망이 교차하는 지점이었다. 사람들은 버려진 루블화 뭉치 대신 중국산 셔츠를 입고 한국산 티코를 꿈꾸며 각자의 삶을 이어갔다.


​시장에는 러시아계 사람들과 현지 민족들이 함께 섞여 있었지만, 소련 시절 억눌린 민족적 경계가 떠오르고 있었다. 새로운 나라 안에서 진정한 화합을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한 조용한 불안감이 공기 중에 떠돌았다. 정치 시스템은 급변했고 국민들의 삶의 근간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중앙아시아 여행은 세상의 중심축이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는 세계사 수업이었다. 변화는 일상적인 시장의 풍경과 사람들의 눈빛을 통해 먼저 드러났다. 그들의 눈에 ​러시아는 여전히 무서운 존재였고, 중국은 낯선 이웃이었으며, 한국은 닮고 싶은 형제였다. 척박한 땅에서 제국들의 틈바구니를 견뎌낸 끈질긴 생명력만이 유효한 희망이던 중앙아시아의 봄을 뒤로 하고 나는 그곳을 떠났다.



세계사 산책

분열하는 국경과 새로운 군사적 위협

​1994년은 냉전 종식 후 새로운 국경선들이 피로 물들기 시작하고, 러시아를 둘러싼 지정학적 질서가 완전히 재편된 해였다.


1. ​르완다 학살 (1994년 4월)

아프리카에서 투치족과 후투족 간의 민족 갈등이 대규모 학살로 비화하며 수십만 명이 희생되었다. 이 사건은 냉전이 끝난 후 이념 대신 민족적 증오와 분열이 인류에게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보여주었으며, 서방 세계의 무력한 방관은 국제적 협력 시스템의 분열을 노출했다.


2. ​러시아.1차 체첸 전쟁(12월)공식적 시작

1993년 모스크바에서 심어진 권위주의의 씨앗이 폭력적인 영토 강박으로 자라나기 시작했음을 의미했다. 러시아는 체첸의 독립 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하며, 자국 영토 보전이라는 명분 아래 힘의 논리를 동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으며, 이는 국제 사회에 새로운 군사적 위협으로 인식되었다.


3.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공식 발효(1월)

미국, 캐나다, 멕시코가 거대한 단일 경제 블록을 형성하면서, 세계 경제가 초국가적 통합과 지역적 분할이라는 양면성을 가지며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는 알마티 시장의 변화처럼, 세계 곳곳에서 경제적 중심이 재편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분열의 징후 5. 제국의 수축과 독재의 결탁


수축하는 제국의 몸부림


1994년 중앙아시아 시장에서 본것은 '러시아 중심의 종말'이었다. 시장에서 목격한 압도적인 '중국 상품의 물결'은 근본에 중소 분쟁의 역사를 품고 있었다. 공산권이라는 이름 아래 교류가 활발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과 달리, 양국은 철저히 등을 돌리고 있었다. 소련과 중국은 1960년대부터 30년 가까이 이념적 갈등과 군사적 충돌로 인해 사실상 적대 관계였다. 중국 상품이 넘쳐난 것은 단순한 무역 재개가 아니라, 러시아의 경제적 지배력이 붕괴된 틈을 타 중국이라는 새로운 경제적 '중심'이 러시아 뒷마당에 구축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했다.


중앙아시아는 티무르 동상이 상징하듯 자신들의 역사적 정체성을 되찾으려 했고 경제적으로는 모스크바 대신 베이징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모든 변방에서 영향력을 잃고 수축중이었다. 만주와 연해주에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의 서사가 상징하듯, 소련의 폭압적 통치 역사는 새로운 질서의 도래와 함께 러시아의 영향력 상실이라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왔다.


러시아는 서쪽에서는 NATO 확대를 두려워하고, 동쪽에서는 중국의 경제적 잠식을 느끼면서, 지정학적 불안감과 굴욕감을 안고 스스로를 고립된 존재로 인식한다.러시아는 이러한 경제적 지정학적 중심의 종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오히려 경제적 영향력을 잃은 자리를 군사적 침략과 지역분쟁 간섭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를 한다.


권위주의와 제국주의의 공생


중앙아시아는 배타적 민족주의와 권위주의 정권의 길을 갔다. '권위주의 정권의 생존'은 수축중이던 '러시아의 제국적 야심'과 완벽한 공생관계로 결탁한다. 권력자들과 러시아는 세 가지 핵심 고리를 통해 서로의 등을 밀어준다.


1. "내 왕좌를 지켜다오" ​


1994년 당시 중앙아시아 지도자들은 대부분 구소련 공산당 서기장 출신이었다. 독립은 했지만, 내부의 민주화 세력이나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이 커지는 것이 가장 큰 공포였다.​ 러시아는 타지키스탄 내전 개입 등 이 지역에 군대를 잔류시키며, 현지 독재 정권에 위협이 되는 세력을 대신 눌러준다.​ 그 대가로 현지 정권은 러시아에 군사 기지 사용권을 주고, 러시아의 정치적 영향력을 인정했다. "러시아는 독재자의 왕좌를 지켜주고, 독재자는 러시아의 앞마당 역할을 자처한 것"이다.


2. '루블화 폐기' 뒤에 숨은 길들이기


1993년의 루블화 폐기 사건은 단순한 경제 실책이 아니라 전략적 압박이었다.​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독자적인 길을 가려 할 때마다 '돈줄'을 죄어 경제를 마비시켰다.​ 결국 1994년 봄, 경제가 무너진 국가들은 다시 러시아 앞에 고개숙였고, 러시아가 주도하는 독립국가연합(CIS) 체제에 더 깊숙이 편입될 수밖에 없었다.


3. '민주주의'라는 공통의 적 ​


당시 옐친의 러시아나 중앙아시아 정권들은 서구식 민주주의가 들어와 자신들의 기득권이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KGB의 후예들인 각국 정보기관들은 서로 정보를 공유하며 반체제 인사들을 감시했다. 러시아의 기술력과 현지 독재 정권의 실행력이 결합된 촘촘한 감시망이었다.


1994년 봄, 중앙아시아의 국경선을 넘나드는 것은 자유로운 바람이 아니라, 구체제의 망령들이 주고받는 은밀한 밀약이었다. 러시아는 탱크와 루블화를 앞세워 독재자들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었고, 지도자들은 그 대가로 자국민의 자유를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 저당 잡혔다. 눈부신 푸른 돔 뒤편에는, 그렇게 제국과 독재가 손을 맞잡은 거대한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전쟁. 중앙아시아 정권과 러시아의 밀월


경제는 무너졌으나 러시아의 군사적 위압은 여전했다. 타지키스탄 내전의 포성은 국경을 넘어 비슈케크와 타슈켄트의 밤을 위협했고, 러시아는 안보를 빌미로 독재 정권들의 뒷배 노릇을 하며 제국의 영향력을 붙들고 있었다. 러시아는 체첸 전쟁에서 보듯, 영토와 영향권을 무력으로라도 지키려는 강박에 더욱 매달리게 된다. 중앙아시아에 마치 소련이 없으면 모든 분쟁이 격화될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며 모든 분쟁에 개입하고 시시때때로 군사적 위협을 계속한다. 권위주의 정권은 이를 이용하고 민족주의 강화를 위해 이를 방조한다.


중앙아시아 독재 정권과 러시아의 밀월은 푸틴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으키는 데 든든한 '전략적 후방'이 되었다. 2022년 알마티 사태 때 러시아군이 개입해 카자흐스탄 정권을 지켜준 이후 한 달 만에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카자흐스탄에서의 '성공적 개입'이 푸틴에게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자신감을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에만 집중할 수 있는 배후 안정을 얻었고 서방의 경제 제재 속에서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러시아의 물자 우회 경로가 되어준다. 90년대에 형성된 신냉전의 한 축인 독재자들의 연대가 든든한 뒷배가 되어 러시아의 생명줄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1994년 봄, 중앙아시아의 모래바람 속에서 나는 제국이 물러가는 뒷모습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퇴장이 아니라 매복이었다. 러시아는 핵무기를 거두며 우크라이나를 무장해제 시켰고, 중앙아시아의 독재자들은 러시아의 그늘 아래서 30년의 세월을 견디며 자신들만의 성벽을 쌓았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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