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그리스
범투르크주의. 잃어버린 형제
1996년, 다시 돌아온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약 5시간 비행후 도착한 이스탄불. 생애 첫 패키지 여행을 예약했다. 당시 외환위기 여파로 튀르키예는 외국인에게는 가성비갑의 여행지였다. 호텔 수준도 꽤 좋았던 10일간 여행이 2~300불 정도. 장시간 버스 여행에서 나눠주던 레몬향 티슈와 첫 휴게소의 향기로운 커피 냄새를 지금도 기억한다. 우즈베키스탄 차이하나의 흙냄새가 아직 남아있는 구소련 체제의 향이었다면 튀르키예 휴게소의 매끈한 커피 냄새는 자본주의의 향이었다. 여행 참가자는 대부분 튀르크인이었다. 유럽인, 아랍인, 중앙아시아인 다양한 인종들만큼 이스탄불, 퍄뮤깔레, 카파도키아, 로만 유적들, 흑해, 지중해, 에게해. 튀르키예는 다양한 풍경의 매력을 발산했다.
소련이 붕괴된 후, 튀르키예는 중앙아시아의 우즈벡, 카자흐 등 '스탄' 국가들을 보며 전율했다. 언어와 인종, 이슬람 종교가 비슷한 국가들을 묶어 튀르키예 중심의 거대 연합을 만들고 싶어 했고 "서방 진출을 돕는 '큰 형님'이 되어주겠다"며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카리모프 대통령은 70년 러시아의 그늘을 벗어나기 위해 이슬람이지만 세속적 민주주의 체제의 튀르키예를 이상적 모델로 삼았다. 선진적 모델을 열망한 타슈켄트의 젊은이들에게 튀르크 형제국의 자본과 언어는 가장 닮고 싶은 거울이었고, 서방에게는 극단 이슬람의 광풍을 막아줄 '방파제'였다.
미묘한 균열. "형님은 필요하지만 간섭은 싫다"
주도권을 둘러싼 팽팽한 긴장감도 흘렀다. 겉으로는 뜨거운 포옹을, 주머니 속에서는 주사위를 굴렸다. 튀르키예는 '혈맹'의 이름으로 형님 대접을 원했지만,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의 맹주가 되고 싶었지, 위성국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튀르키예에 이슬람주의 정권, 복지당이 들어서자, 우즈벡은 이슬람 근본주의가 흘러 들어올까 경계하기 시작했다. 세속주의를 고수하던 우즈벡 정부는 자국 내 튀르키예 학교들이 '범투르크주의'나 '종교적 이념'을 전파한다고 의심하며 이들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1994년 국가 부도 위기로 IMF 구제금융을 받은 튀르키예는 당시 우즈벡에 "도와줄게"라고 말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1996년 양국의 경제적 밀착은 단단했다. 튀르키예는 러시아를 거치지 않고 중앙아시아의 가스, 면화 등 자원을 확보하고 싶었고, 우즈벡은 튀르키예를 통해 유럽 정글로 나가는 길을 뚫으려 했다. 이들의 밀월은 '러시아의 앞마당'에 튀르키예가 깃발을 꽂는 러시아가 가장 두려워하던 시나리오였다.
1996 튀르키예 '세속주의' 와 정치 경제적 혼란
1996년 6월, 이슬람주의를 내건 복지당의 에르바칸이 총리로 취임한다. 건국 이래 '세속주의, 정교분리'를 국교처럼 지켜왔으나, 세계화 물결에서 소외된 서민들은 이슬람주의에 열광하기 시작한다. 에르바칸은 미국, EU 등 서방 대신 이슬람 국가들과의 연대를 강조했고 이는 1995년 이란을 제재하며 서방 질서를 공고히 하려던 클린턴 행정부의 흐름에 정면으로 배치되었다. 뒤이어 11월, 국회의원, 경찰 간부, 수배 중인 킬러가 함께 발견된 서스루크(Susurluk) 교통사고가 발생한다. 정치인, 경찰, 범죄조직이 결탁하여 '국가의 이름으로' 범죄를 저질러온 실체가 드러난 '공적 신뢰 시스템'의 완전한 파산이었다. 경제적 혼란도 심각했다.1994년 IMF 당시 리라화가 38% 기습평가절하되고 공공요금은 100% 인상되자, 공장이 멈추고 소비는 얼어붙고 수입상들은 연쇄 도산한다. 이 여파로 1996년의 물가상승률도 무려 80%에 육박했다.
세계화(WTO)의 흐름 속에서 튀르키예는 만성적인 재정 적자와 정치적 불안으로 '성장의 열매'를 누리지 못했다. 경제적 고통과 정치적 부패에 대한 분노는 훗날 에르도안이라는 강력한 권위주의 지도자가 등장하는 발판이 된다. 2000년대초 에르도안의 등장은 1990년대 튀르키예가 앓던 지독한 열병의 해독제처럼 보였다. 무능한 연립정부와 춤추는 환율에 지친 국민들에게 그의 강한 리더십은 질서라는 이름의 축복이었다. 하지만 20여 년이 지나, '강한 국가'라는 갑옷은 주인의 몸을 조이는 족쇄가 되었다. 시스템이 사라진 자리를 독재자의 변덕이 채웠고, 시장의 법칙을 거스른 오만은 다시 1994년의 비참한 물가상승률을 불러들였다. 1인 권력의 비대함에 매몰되며 국가의 힘이 제어 장치를 잃을 때, 그 힘은 국민의 삶을 보호하는 울타리가 아닌 모두를 집어삼키는 블랙홀이 되었다.
동맹안의 냉전. 튀르키예 & 그리스, 로잔조약
튀르키예와 국경을 마주한 그리스는 나토(NATO) 동맹국임에도 역사적, 정치적으로 키프로스 분쟁이라는 미완의 경계를 품고 끊임없이 긴장하고 있었다. 냉전의 종식이 역사적, 문화적 경계를 사라지게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념의 억압이 사라지자, 문명의 교차로에서 오랫동안 잠자던 정체성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1996년 1월, 에게해의 아주 작은 무인도 '이 미아(그리스명)' 혹은 '카르다크(튀르키예명)'를 두고 양국이 일촉즉발의 군사 대치를 벌였다.1차 세계대전, 튀르키예의 패전 후 맺어진 로잔 조약(1923년)으로 "튀르키예해안선에서 3마일(약 5km) 이내의 섬들만 튀르키예 가 갖고, 나머지는 모두 그리스에 준다"는 원칙이 세워진다. 튀르키예 코앞의 섬들이 대부분 그리스령인 이유이다.
큰 섬들의 주인은 정했지만, 이름없는 작은 바위섬들은 명확한 규정이 없었다. 좌초된 화물선을 누가 구조하느냐는 사소한 다툼이 국기 게양 경쟁으로 번졌고, 양국의 특수부대가 섬에 상륙하고 함대가 출동하는 전쟁 직전의 상황까지 치달았다. 그리스는 모든 섬이 조약에 포함된다고 주장했고, 튀르키예는 "로잔 조약에 이름이 없으니 우리 땅이다"라고 맞섰다. 미국의 중재로 간신히 전쟁은 면했지만, 이 사건은 냉전이 끝났음에도 "민족주의와 영토 분쟁은 언제든 평화를 깨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같은 나토 동맹국끼리 전쟁을 벌이려 했다는 사실은 서방 진영에게 큰 충격이었다. 외부의 큰 적 소련이 사라지자, 내부의 해묵은 갈등이 통제되지 않고 터져 나온 것이다. 이를 지켜보던 러시아는 "서방의 동맹 체제도 결국 이익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성벽밖 튀르키예의 배신감
냉전 시대에 튀르키예는 소련의 남하를 막는 나토의 핵심 보루였다. 유럽은 튀르키예의 군사력은 반겼지만, 그들이 유럽의 시스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차단했다. 유럽연합(EU) 가입을 희망하는 튀르키예에게 유럽은 끊임없이 새로운 '숙제'를 내줬다. 인권 문제, 쿠르드족 문제, 경제 기준 등의 이유였지만, 튀르키인들에겐 "너희는 결코 우리와 같은 수준이 될 수 없다"는 훈계로 들렸다.
1995년 솅겐 조약은 튀르키예에게 결정타였다. 유럽 국가들끼리 국경을 허물고 자유롭게 오갈 때,튀르키예에게는 더 엄격한 비자의 장벽이 세워졌다. 튀르키예는 자신들이 유럽의 문화를 동경하고 세속주의를 지켜왔음에도, 결국 '무슬림 국가'라는 정체성 때문에 거절당했다고 느꼈다.1990년대 중반 유럽 정치인들 사이에서 터져 나온 "EU는 기독교 클럽이어야 한다"는 발언들은 튀르키예의 소외감을 극도로 자극했다.1996년 무인도 위기 때, 유럽 국가들 특히 프랑스는 같은 나토 회원국임에도 노골적으로 그리스 편을 들었다. 튀르키예 입장에서는 "함께 피 흘려 소련을 막아냈는데, 막상 문제가 터지니 유럽은 기독교 형제인 그리스 편만 든다"라는 배신감을 느낀다.
그리스. 성벽안 승자의 족쇄
서구 문명의 요람이라는 역사적 무게를 견디고 서 있는 그리스의 여름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에게해 바다 위, 페리에 오토바이를 싣고 섬으로 향하는 연인들의 웃음은 태양 빛을 머금고 은빛으로 부서졌다. 에게해의 상징처럼 서 있는 하얀 건물과 푸른 지붕이 흩어져 있는 풍경은 인간의 손길이 닿은 건축물이 아닌, 눈부신 미학으로 승화되어 있었다. 해변을 감싸 안은 청록색 투명한 바다의 빛깔은 신의 영역에서 빌려온 청정함 같았다.
십자군 전쟁 후 이탈리아 베네치아 지배 당시 성 이레네(Santa Irene)에서 유래한 섬 이름, 산토리니는 하얀 벽과 푸른 지붕 뒤에 베네치아의 상인들, 오스만의 군대, 그리스 독립군의 거친 역사를 품고 에게해의 정점에 서 있었다. 그 절벽 위에서 바라본 바다, 바람의 부드러움, 넘치는 젊음의 향기, 에게해로 잠기던 검붉은 일몰의 장면은 영화처럼 한컷의 기억으로 남았다.
1996년 튀르키예와의 일촉즉발 위기 속에서도 그리스는 당당했다. 그들의 등 뒤에는 유럽이라는 거대한 성벽이 있었고, 스스로를 '서구 문명의 적통'이라 믿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리스는 튀르키예의 앞길을 가로막으며 유럽의 순혈주의를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자처했다. 튀르키예를 따돌리고 유럽이라는 성벽 안으로 당당히 입성했던 그리스는, 그 성벽이 훗날 자신들을 가두는 감옥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유럽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무리하게 추진한 '소속의 과속'은 국가의 기초 체력을 갉아먹으며, 화려한 유럽행 열차 안에서 서서히 탈진하고 있었다. 결국 그리스가 지킨 '유럽의 성벽'은 성벽 밖 이방인 튀르키예에게는 증오의 씨앗을, 성벽 안의 자신들에게는 감당안되는 부채의 덫을 놓았다.
2001년 유로화 사용권인 유로존에 가입하며 '유럽의 우등생' 대접을 받은 그리스는 독일이나 프랑스와 같은 신용도를 갖게 되자, 낮은 금리로 엄청난 돈을 빌려와 복지와 공공부문에 쏟아부었고, 유로존 가입 기준을 맞추기 위해 국가 부채 통계를 조작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자 숨겨왔던 부채가 드러났고, 2010년부터 세 차례나 IMF 등 구제금융을 받는 처지가 된다. 성벽 안 안락함에 취했던 그들에게 닥친 IMF는 길고 고통스러웠다. 독자적 화폐도, 정책도 가질 수 없었던 그리스에게 '유럽'은 구원자인 동시에 가혹한 채권자였다.
세계사 산책
1996년은 냉전 종식 후 '평화의 시대'에 대한 낙관론이 점차 힘을 잃고, 새로운 형태의 위협과 지정학적 분열이 현실화되기 시작한 해였다.
1. 새로운 위협, 글로벌 테러의 서막(코바르 타워 테러, 6월)
사우디아라비아 코바르 타워에서 대형 폭탄 테러가 발생해 미군을 포함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는 냉전 시대의 국가 간 대결이 아닌, 비국가 행위자에 의한 테러리즘이 세계 평화에 대한 새로운 위협으로 등장했음을 보여주었다. 이는 일본의 옴진리교 지하철 테러(1995년)가 보여준 내부 불안정이 국제적인 차원으로 확대되는 현상이었다.
2. 대서양 동맹의 강화(NATO 확장 가시화)
1996년 연중,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동유럽 국가들(체코, 헝가리, 폴란드 등)을 포함시키는 확장 계획을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이는 미국 중심의 군사 동맹이 러시아의 문턱까지 확장됨을 의미했으며, 러시아에게 심각한 지정학적 위협과 소외감을 안겼다. 러시아는 이를 평화를 향한 협력이 아닌 '서방의 포위망'으로 인식했다.
3. 중동 지역의 긴장 격화와 평화 프로세스의 정체 (이스라엘-하마스 충돌 재개)
1996년 연중,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평화 프로세스가 정체되고 충돌이 재개되었다. 이는 냉전 종식 후 기대했던 중동 평화가 쉽게 찾아오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었다. 지역 분쟁이 지속되고 강대국 간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글로벌 평화 시스템이 지역 분쟁을 해결할 능력을 상실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분열의 조각 7. 신냉전의 독자적 행위자 튀르키예
잔치집 문앞의 이방인
1995년 유럽이 솅겐 조약으로 거대한 가족 잔치를 벌일 때, 잔칫집 문밖에서 가장 오랫동안 서성였던 이는 튀르키예였다. 튀르키예는 유럽연합(EU) 가입을 위해 처절하게 노력했지만 유럽은 튀르키예를 ‘우리’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튀르키예 입장에서 솅겐 조약은 유럽이 튀르키예의 군사력은 빌려 쓰면서도, 그들을 식탁에 앉히지는 않은 것이었다. 국경 없는 유럽은 역설적으로 "너희는 무슬림이기에 절대 이 선을 넘을 수 없다"는 거절의 선언이었다.
서유럽 핵심 국가들 입장에서 보면 튀르키예는 러시아처럼 '결코 소화할 수 없는 거대한 이물질'이었다. 기독교 클럽의 결속인 EU에게 두 나라는 문화적·종교적 이질성이 컸고, 정치적 시스템도 달랐다. 인구수에 따라 의사결정권(투표권)을 나누는 유럽연합(EU)에게 터키와 러시아는 인구학적 위협이기도 했다. 또한 당시 경제 위기를 겪던 나라들이 EU에 들어오면 유럽의 막대한 보조금이 쏟아져 들어가야 했다. 유럽은 "손님으로 환영할 수는 있지만, 우리 집 안방의 주인 자리를 내줄 수는 없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지정학적 화약고'의 예고
1996년의 그리스와 튀르키예간의 위기는 오늘날 우크라이나 전쟁과 신냉전 구도에서 튀르키예가 보여주는 '독자 노선'의 뿌리가 된다. 튀르키예는 서방 진영에 속해 있으면서도 유럽(EU)에서 온전히 환영받지 못한다는 소외감을 느꼈다. 무인도 국경 위기를 겪으면서 튀르키예는 "미국이나 나토는 우리를 진정으로 보호해주지 않으며, 우리 스스로 힘을 키워야 한다"고 느꼈다. 영토를 둘러싼 민족주의적 열망이 국제 규범보다 우선할 수 있다는 1996년의 사례는, 2014년 크림반도 합병과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이라는 '힘의 논리에 의한 국경선 재획정'의 전조와도 같았다.
신냉전의 ‘캐스팅보트’가 자라난 토양
1996년 튀르키예의 정치적 변화는 서구에 대한 소외감과 경제적 혼란으로, 다시 이슬람이라는 오래된 옷을 꺼내 입으려는 몸부림이었다. 서구식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이슬람 문화권에서도 보편적으로 작동할 것인가에 대한 거대한 의구심의 폭발이기도 했다. 나토 회원국으로 서방의 안보 보루였지만, 셍겐조약에서의 따돌림은 튀르키예에게 '서구적 가치'에 대한 회의를 심어주고, 이슬람주의 정당인 복지당이 집권하며 "우리는 왜 서방의 들러리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훗날 " 유럽에 구걸하지 마라, 우리는 위대한 오스만 제국의 후예다"라고 외친 에르도안의 외침이 국민들에게 먹힌 이유의 기저에는 좌절감이 있었다.
러시아의 소외감과 튀르키예의 좌절감은 쌍둥이처럼 닮은 묘한 동질감이 있었다. "서방은 오만하다"는 공통된 정서가 이들을 묶는 신냉전의 강력한 연결고리가 된다. 소외된 강대국들이 훗날 서방 중심 질서에 반기를 드는 ‘수정주의 국가’들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신냉전의 한 축인 ‘반 서방 가치 연대’의 초기 모델이 되고, 에르도안 체제하에서 러시아와 서방 사이를 오가는 '줄타기 외교'로 이어진다. 튀르키예는 서방의 충실한 파트너에서 벗어나, 때로는 러시아와 손잡고, 때로는 서방을 압박하는 ‘독자적인 지정학적 행위자’로 진화하기 시작한다.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튀르키예가 중재자 역할을 하며 러시아와 서방 사이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배경은, 바로 1996년의 혼란과 좌절 속에서 잉태된 것이다. 서구식 민주주의가 민생을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실망감. 셍겐조약의 성벽, 그리스와의 분쟁에서의 소외감은 튀르키예를 '신냉전의 독자적 행위자'라는 캐스팅보드로 자리매김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