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이스라엘. 요르단. 이집트
사라진 거인, 남겨진 성채
1997년 고려인 강제이주 60주년 우즈베키스탄. 나는 이념의 광풍 속에서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쫓겨온 동포들의 후예를 가르쳤다. 복잡한 역사와 지정학적 흐름 속에서 고려인 사회는 깊은 딜레마안에 있었다. 소련 시스템안에서 우즈벡어 대신 러시아어를 사용했던 고려인들이 민족주의 앞에서 불안과 소외감을 느끼던 시기 잘살게 된 고국과 대우그룹의 등장은 희망이었고, 고국어를 잃어가던 3세대 고려인에게 한국어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창문이었다.
1996년 김우중 회장이 국빈대우를 받으며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했다. 카리모프 대통령과 손잡고 건설한 아사카 공장의 완공식은 '강한 국가와 거대 기업의 결합'이라는 아시아적 성공 모델의 결정체였고 타슈켄트의 밤거리를 밝히던 대우의 네온사인과 거리의 하얀색 대우 자동차는 우즈벡 사람들에게 '미래'라는 이름의 주문이었다. 그러나 불과 1년 후1997년, 한국을 덮친 IMF의 파도는 타슈켄트의 공장 라인도 멈춰 세웠다. 이후 거인은 쓰러졌지만, 성채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우즈벡 정부는 대우가 남긴 시스템을 국유화하여 자신들만의 폐쇄적인 자동차 왕국을 건설한다.
이스라엘 '스타트업네이션'과 독자적 무력
1997년 여름, 문명의 가장 오래된 교차로인 중동안의 섬 이스라엘. 공항에서부터 삼엄한 전쟁과 평화의 긴장이 일상에 스며든 도시. 해변의 활기와 현대적인 분위기의 텔아비브에는 여군들의 모습이 강렬하게 눈에 띄었다. 수도 예루살렘은 인류의 가장 깊은 신념과 분열을 동시에 품고 있는 오래되고 이상한 도시였다. 성벽 안에 네다섯 종교가 담을 사이에 두고 회당을 세우고 길을 행진했다. 이스라엘에는 갈릴리 호수, 여리고성, 사해, 현실밖에 존재하는 성경속의 세상을 여행하는 기묘함이 존재했다.
이스라엘 거리 곳곳에서 러시아어가 들렸다. 구소련 지역에서 돌아온 유대인 이주민들이 이스라엘 사회에 대거 정착하고 있었다. 가자 지구로 향하는 검문소에서 만난 우즈베키스탄 출신 젊은 군인은 의무 복무 중이었다. 중앙아시아 민족주의라는 역사적 고난을 피해 온 땅에서 다시 민족적, 군사적 의무를 짊어진 그의 모습은 새로운 정체성을 얻기 위해 또 다른 짐을 진 디아스포라의 숙명이었다.
강한 국가 모델로의 진화를 꿈꾸던 이스라엘은 90년대 중반, 농업과 전통 제조업을 넘어 소프트웨어와 보안 기술로 체질을 개선한다.1997년 이스라엘은 보안과 IT의 '비밀 연구소' 로 하이테크 산업이 막 꽃을 피우고 있었고 당시 구소련에서 유입된 100만 명의 디아스포라, 고학력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의 기술력을 폭발시킨다. 한국에서 출장온 IT 기술자분들을 만났던 것 역시 우연이 아니었다.
주변국들이 IMF와 인플레이션이라는 경제적 파도에 휩쓸려 나갈 때, 이스라엘은 군사력과 하이테크를 결합해 스스로를 거대한 요새로 만들고 있었다. 군에서 배운 기술이 곧 창업으로 이어지는 독특한 구조 '군사 자본주의','안보가 곧 경제'인 스타트업네이션이었다. 이스라엘은 평화라는 불확실한 신기루 대신, 기술이라는 예리한 칼과 장벽이라는 견고한 방패를 선택했다. 그들이 구축한 '스타트업네이션'의 뒤에는, 살아남기 위한 생존 본능이 숨어 있었다. 이스라엘의 독자적 무력 강화는 단순히 자기 방어를 넘어, 향후 우크라이나와 같은 전면전을 치르는 국가들에게 '표준 무기 체계'를 수출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력한 외교적 카드가 된다.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평화의 신기루.
유목민이었던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정착하며 시작된 유대인의 역사. 이집트 탈출 후, 다윗 왕과 솔로몬 왕 시대에 예루살렘을 수도로 강력한 고대 국가를 건설하지만, 기원후 70년 로마는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유대인들은 전 세계로 흩어져 2천년간'율법'이라는 소프트웨어로 민족을 유지한다.19세기 말부터 유럽에서의 극심한 박해와 나치 홀로코스트를 겪으며 "우리만의 국가가 없으면 전멸한다"는 절박함이 극에 달한다. 영국이 이 땅을 대상으로 한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 이중 계약으로 혼란을 더 키우다가 UN의 분할안이 통과된다.1948년 이스라엘 국가 선포와 동시에 전쟁이 시작되고1973년까지 주변 아랍 국가들과 4차례의 중동전쟁을 치르며 압도적으로 살아남는 생존이 시작한다.
이스라엘에게 '압도적 생존'은 기적의 역사였지만, 그 발밑에 깔린 팔레스타인에게 이스라엘은 '압도적 소멸'의 공포였고 조상 대대로 내려온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을 지도에서 지워버린 나라였다.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수백 년간 살던 마을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난민이 약 70만 명에 달했고 그들은 여전히 "언젠가 돌아가겠다"며 당시 집 대문 열쇠를 대대로 물려주었다. 예루살렘의 긴장 뒤편에는, 조상 대대로 살던 올리브 밭을 잃고 난민촌의 좁은 골목을 지키던 팔레스타인의 분노가 도사리고 있었다.
1993년 이스라엘은 오슬로 협정 "땅과 평화를 바꾼다" 며 팔레스타인과 손을 잡았고, "이제 중동에 평화가 온다"는 평화의 낙관론이 정점에 달했다.1995년 평화를 주도했던 라빈 총리가 극우파 청년에게 암살되자, 온건파는 힘을 잃고 냉혹한 현실주의가 고개를 든다.1996년 집권한 네타냐후는 평화 프로세스를 중단시키고 안보를 최우선으로 내세우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강경 우파의 시대를 연다.
1995년 라빈과 아라파트가 맞잡은 손이 허망했던 이유는 이천년의 한을 풀려는 자와 80년의 한을 씻으려는 자 사이의 간극이 어떤 계약서로도 메워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중동은 '나쁜 자와 더 나쁜 자'의 싸움이 아니라, '각자의 정의'가 정면으로 충돌하여 모두를 파멸로 몰아넣는 비정한 비극의 현장이었다. 97년의 여정 끝에 내가 마주한 진실은 한쪽의 천국을 짓기 위해 다른 한쪽의 지옥을 담보로 잡아야 하는 비참함이었다.
하마스. 종교, 복지, 전쟁이라는 세 개의 얼굴
"평화를 약속했는데 왜 우리 땅에 이스라엘 정착촌은 계속 늘어나느냐"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희망이 '분노'로 바뀌면서 '하마스' 같은 무장 단체가 대중적 지지를 얻는 토양이 형성된다. '이슬람 저항 운동'의 아랍어 약자이자 '열정(Hamas)'이라는 뜻의 하마스는 단순한 무장단체가 아니라, 종교, 복지, 전쟁이라는 세 개의 얼굴을 가진 복잡한 조직이다. 1987년, 제1차 인티파다(민중기기) 도중 무슬림형제단의 분파로 시작되어 처음에는 이스라엘의 점령에 맞서 돌을 던지던 청년들의 운동이었으나, 곧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단체로 진화했다. 하마스는 전사(Mujahideen)의 얼굴로 이스라엘 군인과 민간인을 대상으로 자살 폭탄 테러를 감행하고 복지사(Social Workers)의 얼굴로 가난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학교, 병원, 음식을 제공하며 민심을 얻고 풀뿌리 지지로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정치인(Politicians)으로도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부패한 기존 정당(파타)에 승리할 정도로 대중적 지지를 얻는다.
1997년 하마스의 자살 폭탄이 3월 텔아비브 카페 테러, 7월과 9월 예루살렘 재래시장 테러 등 번화한 일상의 한복판을 정밀 타격했다. 내가 여행하던 바로 그 때그 시장의 어귀에서 반복된 비극의 역사는 가자 전쟁의 뿌리가 되어 2023년 하마스의 기습 공격과 이스라엘의 보복 전쟁으로 이어진다. 단기적 평화 협상은 응축된 종교적 민족적 정체성 갈등을 제거하지 못했고 오슬로 협정은 완전한 죽음을 선포하며 중동은 다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거친 정글로 돌아갔다.
수니파 하마스와 시아파 이란의 악수
하마스는 수니파지만, 시아파 맹주인 이란으로부터 자금과 무기를 지원받았다. '이스라엘 타도'라는 공통의 목표가 종파의 벽을 넘게 한 것이다. 이란은 직접 싸우지 않고 하마스를 앞세워 지하 터널을 파고 미사일을 개량하며, 이스라엘의 옆구리를 찌르는 전술을 구사했다. 이후 이스라엘은 가자전쟁에서 팔레스타인을 넘어 이란의 핵이라는 실존적 위협과 싸우며 이란을 직접 타격했다.
최근 이스라엘이 이란의 손발 하마스와 헤즈볼라를 하나씩 제거하면서 이란의 '대리전 전략'은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또한 오랜 기간의 경제재제와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이란 자체마져 흔들리고 있다. 시아파의 맹주 이란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러시아-북한과 결속해 서방 시스템에 맞서는 맹주가 되려 했지만 결국 이란은 "폭풍 전야의 사막"처럼 맹렬히 허물어지고 있다.
이글을 작성하는 시점에 테헤란의 대학살이 뉴스를 타고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90년 초, 내가 구소련의 종말을 목격하며 깨달았던 원칙이 테헤란에서 다시 재현되는 기시감. 외부를 향해 아무리 날카로운 발톱을 세워도, 내부의 심장이 병들면 포식자는 무너진다. 세계를 위협하는 미사일과 드론, 핵을 만들지만, 정작 자기 집 안의 굶주린 아이들을 달랠 빵은 없는 경제적 빈곤은 이란을 갉아먹고 있었다.
자유의 바람도 불고 있다. 유튜브를 보는 세대의 눈에 알리의 이름으로 통치하는 정권의 한계는 명확하다. '히잡 시위'에서 보듯 젊은 세대는 종교적 억압에 신물이 나 있고 스마트폰을 통해 '자유'를 갈망한다. 경제제재로 민심은 폭발했고, 강력해 보이던 신정 체제는 무너지기 직전이다. 안타까운 많은 희생자의 피를 제물로 바치며.
요르단. 요단강 건너 만나리!
요르단강(Jordan River)은 바로 성경 속의 요단강. 출애굽기에서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 생활 끝에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마지막으로 건넌 강, '운명이 바뀌는 선'이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곳으로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은 '옛 자아를 죽이고 새사람으로 태어남' 혹은 '이승을 떠나 천국으로 감'을 상징했다.
가나안은 단 한 번도 쉽게 문을 열어준 적이 없는 땅이다.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은 평화로운 이주가 아니라, 수많은 부족과 국가가 생존을 걸고 부딪힌 '전면전'의 연속이었다. 고대 가나안 부족들이 성벽을 높이 쌓아 이방인을 막으려 했듯, 이스라엘은 최첨단 무기와 높은 담장으로 스스로를 요새화했다. 그 땅으로 들어가는 길목마다 흘려진 피와 눈물은, 2026년 가자지구에서 반복되는 '점령과 저항'의 슬픈 예고편이었다.
알렌비 다리 위에서 멈춘 평화
나는 요르단 강을 가로지르는 낡은 다리위에 서 있었다. 요르단강 알렌비 다리(Allenby Bridge. 킹 후세인 다리)는 예루살렘에서 곧장 암만으로 넘어가는 가장 짧은 국경이었다. 군인들이 '얘를 어떻하지!'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알렌비 다리는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공식 국경이지만, 여권에 도장을 찍는 일반 관광객의 '국제 국경'이 아닌, '허가받은 자'들만의 통로로 '통제 구역'에 가까웠다. 이스라엘 점령지(서안 지구. West Bank)와 아랍 세계를 잇는 물류의 최전선이자 유일한 숨통으로 비즈니스나 외교적 목적, 혹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이동하는 생존의 현장. 외국 관광객들은 주로 북부의 '셰이크 후세인'이나 남부의 '아라바' 국경으로 유도되었다.
이스라엘의 총구와 요르단의 매서운 눈초리가 교차하는 그 짧은 다리는 당시 두 나라 사이의 '심리적 거리의 상징이자 중동 정세의 압축판이었다.1967년의 6일 전쟁(제3차 중동전쟁)으로 요르단의 영토였던 서안 지구는 이스라엘의 영토가 되었다.1997년 내가 요단강을 건너며 목격한 그 메마른 땅의 긴장감은, 30년 전 그 6일간의 광풍이 남긴 긴 그림자였다. 유대인들은 '약속된 땅의 회복'이라 부르며 정착촌을 세웠고, 팔레스타인인들은 '탈취된 일상의 상실'이라 부르며 돌을 던졌다.
다행히 국경을 통과했다. 한정된 정보로 복잡한 지정학적 상황을 정면으로 통과한 셈이었다. 그날 내가 넘었던 것은 단순한 국경선이 아니라, 인위적 평화가 결코 넘을 수 없었던 '증오의 심연'이었다. 신냉전의 장벽들이 다시 높아지는 것을 보며, 알렌비 다리에서 느꼈던 서늘한 바람을 떠올렸다. 신냉전 시대의 통제된 이동과 국경은 다시 1997년의 알렌비 다리로 변하고 있다. 세계화가 약속한 국경 없는 세상의 '누구나 자유롭게'가 아니라 '검증된 자만, 철저한 감시 하에서' 여전히 날카로운 가시를 세운 채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국경은 결코 사라진 적이 없었다. 잠시 평화라는 신기루에 취해 그 가시 돋친 담장을 잊고 있었을 뿐이다.
요르단 암만(Amman)과 페트라(Petra)
약속과 갈망의 가나안 땅을 뒤로 하고 요단강 너머 요르단으로 발을 내디뎠을 때 나를 맞이한 것은 성경 속 선지자들이 마셨던 뜨겁고 메마른 사막의 바람이었다. 고대의 역사를 간직한 암만에는 성서 시대의 투박함이 남아 있었고 건물들은 주변 사막의 석회암과 진흙 색깔을 닮아 있었다.
요르단은 1994년 이스라엘과 평화 협정을 맺고, 중동의 화약고 속에서 기적 같은 평화를 누리며 서방 여행자들을 향해 막 문을 열기 시작했다. 다운타운은 양고기 굽는 냄새, 진한 아랍 커피 향, 시샤(물담배)를 파는 가게들과 이방인에게 "웰컴!"을 외치며 다가오던 순박한 환대가 있었다. 상인들의 외침이 들리는 시장에서는 수천 년 이어온 '삶'의 리듬과 중동의 고요한 활력이 느껴졌다. 해질녘 노을이 지는 언덕위에 서면 나지막한 건물들이 끝없이 펼쳐진 도시 전체가 미묘한 분홍빛으로 물드는 장면을 연출했다.
고대 문화의 절정, 페트라는 신비롭고 압도적이었다. 세상을 차단하고 신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약 1.2km 통로 시크(The Siq). 좁고 높은 바위 틈새 길을 걸어 서늘한 공기와 정적의 끝에서 갑자기 나타난 알 카즈네(The Treasury)신전의 모습. 인간에 대한 경외감이 느껴지는'시간의 충격'이었다. 그들의 후손 베두인들이 건네던 차 한 잔과 당나귀들의 방울 소리는 페트라가 박물관이 아니라 살아있는 역사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사막 한가운데 이토록 역사적이고 경이로운 문명이 숨겨져 있으리라고 상상도 못했던 나는 붉은 사암을 깎아 만든 거대한 건축물들이 펼쳐지는 모습 앞에서 한참을, 그저 앉아 있었다.
대리전(Proxy War)의 전조
1997년 9월, 암만에서 벌어진 '하마스 지도자 칼레드 마샬 암살 미수 사건'. 이스라엘 요원이 요르단에서 하마스 리더의 귀에 독약을 넣었다. 요르단 국왕은 분노했고, 미국이 중재하여 독약의 해독제를 받아내는 촌극이 벌어졌다. 국가가 직접 싸우지 않고 '하마스, 헤즈볼라, 예멘 반군, 모사드' 같은 비국가 대리인을 내세워 싸우는 신냉전의 전조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이 사건은 국가 간의 신뢰가 정보기관의 공작에 의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대리 단체'가 국가를 어떻게 위협하는지 보여준 신냉전적 갈등의 원형이었다.
이집트로 가기 위해 이스라엘 에이라트로 다시 넘어갈때는 에일랏과 아카바를 잇는 남쪽 끝 국경 아라바 검문소를 통과했다. 관광객은 넘나들었지만 현지인들에게는 여전히 넘기 힘든 벽, 사막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인국경은 고요했지만 차가웠다.
이집트. 국제 테러 네트워크
누구나 한번쯤은 꿈꾸는 이집트 여행. 고대 문명의 상징 피라미드. 인류의 젖줄 나일강. 물에 잠길 뻔한 문화유적 아부심벨 신전. 형형색색의 산호와 물고기로 가득 찬 홍해의 알함브라 바닷속. 나는 시나이반도 스쿠버다이빙의 성지 다하브의 해변에 서 있었다. 홍해 너머 손에 닿을 듯 가까운 사우디 아라비아의 절벽을 배경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짧은 찰라, 나그네의 외로움을 위로하 듯 분홍빛 석양이 온 우주를 물들였다.
이집트를 여행할 때 가끔 테러가 일어난다는 불안한 소식을 접했다. 그 해 11월, 룩소르에서 관광객 62명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 '가마 이슬라미야(al-Gama'a al-Islamiyya)'에게 학살당한 '하트셉수트 신전 학살'이 발생한다. 이집트의 생명줄인 관광업을 타격해 무바라크 정부를 타도하고 엄격한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목표였다. 조직의 정신적 지주는 '눈먼 성직자'로 알려진 셰이크 오마르 압델 라만으로 1993년 뉴욕 세계무역센터 폭탄 테러의 배후이기도 했다. 이 조직은 당시 아프가니스탄에 있던 알카에다(오사마 빈 라덴)와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룩소르 테러는 훗날 9/11 테러로 이어지는 '국제 테러 네트워크'가 정글에서 근육을 키우고 있음을 알린 신호탄이자, 오늘날 홍해를 마비시키는 후티 반군 등이 전 세계 물가를 흔드는 '자원 및 물류 안보' 위기의 예고편이었다. 신냉전은 단순히 국가 간의 싸움이 아니라, 서구적 가치와 세계화에 반대하는 극단 세력들이 글로벌 공급망이나 자원을 인질로 삼는 양상을 띠고 자라고 있었다.
세계사 산책
1997년은 냉전 종식 후 '글로벌 자본주의의 승리'라는 신화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가장 극적으로 붕괴된 해였다. 세계의 낙관론이 깨지면서 신냉전으로 가는 길이 명확해졌다.
1. 글로벌 금융 시스템 붕괴. 아시아 금융 위기(7월)
7월, 태국 바트화 폭락으로 시작된 아시아 금융 위기는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 전체로 확산되었다. 한국의 '금 모으기 운동'은 이 위기가 초래한 국가적 절박함의 상징이었다. 이 사건은 세계화된 자본 시장의 위험성과 미국 중심 금융 시스템의 막강한 영향력을 극단적으로 드러냈다. 이 위기는 '자유 시장 경제가 완벽하다'는 신념에 치명적인 균열을 가져왔다.
2. 홍콩 반환과 중국의 지정학적 부상(7월)
7월 1일, 영국령이던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었다. 아시아에서 서구 제국주의의 상징적 종언이자, 중국이라는 거대한 지정학적 주체가 아시아를 넘어 세계 무대로 부상했음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사건이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중국 상품이 러시아를 대체하던 경제적 흐름이 이제 지정학적 헤게모니의 전환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3. 환경 문제의 공식화. 교토 의정서 채택(12월)
12월, 지구 온난화 방지를 위한 교토 의정서가 일본 교토에서 채택되었다. 이는 인류가 군사적 위협을 넘어 환경이라는 초국가적 위협에 직면했음을 인정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책임 소재를 둘러싼 갈등이 노출되면서, 글로벌 협력이 이익 앞에서 얼마나 쉽게 분열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분열의 조각 8. 전선의 이동과 대리전의 암투
신냉전의 특징은 전선의 이동과 대리전의 암투였다. 전쟁터가 군사 분계선이 아니라 '호텔 로비', '고대 유적지', '도시의 시장'으로 옮겨왔다. 1997년의 적은 이름도 실체도 모호한 '그림자 조직'들로 변했다. 90년대 초반의 낙관주의는 종말을 고하고, '대리전'과 '신냉전'의 맹독이 중동과 전 세계로 퍼지기 시작한 변곡점이다. 국가가 아닌 보이지 않는 세력이 시스템을 파괴했고 숨은 대리인인 테러 조직이 언제든 판을 뒤엎을 수 있다는 공포가 시작된다.
1. 이집트 룩소르 테러 (1997.11). 신전에서 무장 괴한들이 관광객 62명을 학살했다. 이집트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벌인 '경제 대리전'. 국가의 핵심 수입원인 관광을 타격해 체제를 흔드는 방식은 이후 모든 테러 조직의 교본이 된다.
2. 요르단 암만 독살 미수 사건 (1997.09). 이스라엘 모사드 요원들이 암만 거리에서 하마스 지도자 칼레드 마샬의 귀에 독약을 주입했다. 주권 국가인 요르단의 영토를 전쟁터로 삼은 이 사건은, 국경이 무의미해진 신냉전의 무법지대를 상징했다.
3. 하마스의 폭탄테러. 오슬로 평화 협정이 무색하게 하마스의 자살 폭탄 테러가 빈번해졌다. 하마스는 단순한 반군이 아니라, 이란 등 외부 세력의 지원을 받는 '대리 창구'로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이라는 국가 간 합의를 밑바닥에서부터 무너뜨렸다.
1997년 이집트 룩소르의 신전 바닥에 뿌려진 관광객들의 피와, 암만 한복판에서 벌어진 암살 시도는 소리 없는 신냉전의 선전포고였다. 과거의 전쟁이 깃발을 든 군대끼리의 싸움이었다면, 97년은 주인 뒤에 숨은 대리인들이 비수를 휘두르는 암투의 장이었다. 하마스의 폭탄과 이집트의 테러는 단순히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어왔던 '국가라는 울타리'의 평화를 파괴하고 있었다. 정글은 더 이상 이념으로 나뉘지 않았고 보이지 않는 증오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우리를 언제 어디서든 사냥할 준비를 마친 채 숨죽이고 있었다.
거대한 대리전. 우크라이나
1997년 당시 하마스나 이집트 테러 세력이 국가 시스템을 흔드는 '점 조직' 형태의 대리인이었다면 현재 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공격자) vs 서방(우크라이나라는 대리인 지원)'의 구도이다.
1997년에는 이란의 지원을 받는 세력들이 중동 곳곳에서 국지적 테러를 일으켰다면 이제 그들은 국경을 넘어 우크라이나 전장까지 개입한다. 예멘 반군과 헤즈볼라를 키워낸 이란의 드론, 샤헤드가 키이우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북한의 포탄이 러시아의 손에 들려 있다. 미국과 NATO는 직접 참전하지 않으면서 무기와 정보를 제공하고, 우크라이나는 그들의 가치를 위해 싸우는 거대한 대리전의 무대. '보이지 않는 손'이 '천문학적인 무기 지원'이라는 거대한 손으로 바뀐 셈이다. 97년의 '대리전 네트워크'가 이제는 전 지구적 연합군 형태로 우크라이나에서 맞붙고 있는 것이다.
1997년 룩소르 테러가 이집트의 '관광업'을 타격해 체제를 흔들려 했다면 우크라이나 전쟁은 에너지(천연가스)와 식량(밀)을 무기로 사용한다. 러시아는 가스 밸브를 잠그고, 우크라이나는 흑해 곡물 수출길을 두고 싸운다. 97년의 테러가 특정 국가의 경제를 노렸다면, 지금의 전쟁은 전 세계의 밥줄과 에너지줄을 쥐고 흔드는 '초대형 경제 대리전'인 셈이다.
1997년 룩소르의 신전 바닥을 적셨던 피의 논리는 25년 뒤 키이우의 잿더미 위에서 재현되고 있다. 그때 암만의 시장통에서 속삭이던 '보이지 않는 적'들의 정체는 이제 드론과 미사일이라는 실체가 되어 우크라이나의 하늘을 가로지른다.
97년의 테러가 정글의 예고편이었다면, 우크라이나 전쟁은 그 정글의 법칙이 전 세계를 집어삼킨 본편이 되어 중계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서방과 동방의 거대한 대리전이 충돌하는 가장 뜨거운 정글의 최전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