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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림태주 Jun 16. 2021

붉은 백합 그늘에서 책을 읽었다

나를 견디는 시간

마당에 백합이 붉게 피어서 향기 아래 엎드려 책을 읽었다. 세 번째 읽는 이윤주의 매혹적인 산문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다. 세련된 글이 정밀하기까지 하다. 글쓰기를 배우려는 친구들에게 곧잘  책을 권하곤 한다. 아무 데나 펼쳐도 빛나는 표현과 심상치 않은 문장들이 대기하고 있다.  페이지를 옮겨본다.




생의 초반에 쏟아지는 수많은 ‘처음’들. 우리는 그 처음을 차곡차곡 저장하지 못한 탓에 그 이후 맞이하는 처음들에 허겁지겁 의미를 새기는 걸까.


여름에 태어난 조카는 그해 겨울엔 뒤집기에 한창이었으므로 사실상 이듬해 겨울에 처음 눈을 보았다. 그해의 첫눈이자 태어나 처음 보는 눈.


어린 조카는 어리둥절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지만 나로서는 영원히 알 수 없다. 조카의 기억에도 그 순간은 남지 않을 것이다.


첫눈뿐이 아니다. 처음 맞은 비, 처음 맡은 잔디의 냄새, 처음 마신 맹물의 맛도 우리는 전부 기억하지 못한다.


조카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에 저 아이가 아무도 밟지 않은 새벽녘의 첫눈처럼 자라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고인다. 상처 하나 없이 하얗게. 그러니 내리사랑이란 얼마나 맹랑한가. 너 그거 욕심이야, 또 다른 마음이 일러준다.


그러면 어쩌나. 언젠가 저 아이의 마음에 진흙이 잔뜩 묻은 구둣발이 길을 내어 아이가 울음을 삼킬 때, 이모가 좀 살아보니 뭐가 어떻더라,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더라, 그래서 이렇게 했으면 좋았겠더라고 말해줄 거리가 내게 있을까.


여자아이다. 무엇을 말해주어야 과연 ‘여자아이 구둣발을 조심하면서, 그러나 무심하면서, 사랑하면서, 그러나 헤어지면서 살아갈  있을까.




이 책의 저자 소개에 이런 말이 있다.

자주 겪어도 잘 견디어지지 않는 일이 많다. 자꾸 보아도 잘 견디어지지 않는 사람 또한 많다. 그렇다면 당분간은 나 자신을 견디어보면 어떨까 싶었다.”


나는 예전에는 나를 견디지 않았는데 지금은 자주, 그리고 잘 나를 견딘다. 타인을 견디기보다 나를 견디는 게 쉽고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글을 쓰는 일도 나를 견디는 일 중 하나다. 많은 도움이 된다.


이윤주 작가를 만나면 도란도란 국수를 먹어야겠다고 생각해 보았다. 아니면 말없이 슴슴한 냉면을 먹어봐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국수나 냉면은 맑은 음식이고 부드럽고 단정해서 시 같은 음식이라고 생각해서 그렇다. 또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먹기도 좋다. 남자애는 누군가를 마음에 두고 있으면 말이 많아지거나 말을 못 하게 되는데 면류는 그런 사이에 알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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