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채집한 그리움 보고서
아이들은 숨바꼭질이나 보물찾기 놀이를 좋아한다.
산다는 건 늘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는
은유가 놀이에 담겼다.
좋은 건 숨겨져 있고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날이 저물면 찾기를 멈춰야 한다는 것도 배운다.
욕심부리다간 어둠의 그림자에 뒷덜미를
붙잡힐지도 모른다.
혼자 남게 된다.
어른들을 위한 수수께끼도 있다.
모자와 우산과 연필의 은유는 뭘까.
이것들은 모두 ‘쓰는’ 것들이다.
햇볕이 모자라서 쓰고 햇살이 눈부셔서 쓴다.
비가 와서 쓰고 그리워서 꾹꾹 눌러 쓴다.
써야 할 때와 쓰지않아야 할 때를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
날씨가 정하고 타인이 정한다.
내가 원한 게 아니지만
따를 줄도 알아야 한다는 걸 배운다.
써야 할 때 쓰지 않고 쓰지 말아야 할 때 쓰면,
역시 혼자 남게 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산다는 건 비율을 정하는 일 같다.
균형을 잘 잡아야 넘어지지 않고 걸을 수 있는 것처럼
무게중심을 잡고 평정을 유지하며
살아야 하는 일이 인생살이 같다.
쉬운 것 같은데 참 쉽지가 않다.
여지없이 누군가에게 쏠리기도 하고
들떠서 한쪽으로 치우치기도 한다.
밤이 깊었는데도 숨은 것들을 찾겠다고
길 한복판에 마음을 홀로 세워두고 들어온다.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실종된 행복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마음을 내지 못해 힘들고 마음을 너무 내서 힘들다.
사람이 있어서 힘들고 사람이 없어서 힘들다.
그리워서 힘들고 그리워하지 않으려고 해서 힘들다.
일생 전부에서 힘든 날들을 빼면
나머지는 다 좋은 날이어야 하는데,
그런 분명한 산술은 인생 수학에는 없다.
밑돌 빼 윗돌 괴듯이 어리석어서
힘든 날을 빼면 통째로 인생이 없어진다.
있어도 괴롭고 없어도 괴롭도록 설계돼 있다.
외로우면 그립고 그리우면 외롭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작과 끝도,
안과 바깥도 잘 분별되지 않는 게 삶이다.
완벽하게 좋거나 완벽하게 나쁜 것도,
완전하게 맞거나 완전하게 틀린 것도 없다.
그 애매모호함을 긍정할 것.
달리 뾰족한 수가 없다.
스스로 비율을 정하고 사는 수밖에 없다.
나쁜 것보다 좋은 게 조금이라도 더 많다고 생각 들면
그건 괜찮은 것이다.
정다운 날에도 외로움이 스며있고,
좋은 사람에게도 힘든 면이 있다.
그러면 비율적으로 괜찮은 날이고 괜찮은 사람이다.
내가 가진 요령이 하나 있다.
아주 힘겨운 일이 있을 때는 월요일로 정한다.
조금 덜 힘겨운 날일 때는 화요일로 정한다.
괜찮은 사람을 만난 날은 금요일이고,
아주 기분 좋은 일은 토요일이고,
조금 기쁜 일은 일요일로 잡는다.
다행히 오늘은 토요일이다.
좋고 나쁘고 수월하고 힘겨운 모든 날이
다 나의 요일들이다.
그리운 것 따로, 외로운 것 따로, 슬픈 것 따로가 없다.
섞여서 함께 다닌다.
분리되지 않는다.
그때의 기분에 가장 잘 어울리는 걸로 골라서
그것으로 쓸 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를 사랑할 때 사랑만 가는 게 아니다.
미워할 때 미움만 가는 게 아니다.
그걸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오해하면 바보천치다.
단순하게 해석하면 진심을 놓치게 되고
관계를 망치게 된다.
양파나 양배추가 들어가는 음식들을 보라.
기름기 많고 느끼한 음식들이다. 그건 은유다.
중첩된 겹겹의 의미들이 느끼함을 잡아내고
음식의 풍미를 더한다.
독해력이나 의역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삶은 각자의 해석이다.
그리움은 내가 해석한 문학이고 예술이다.
그리움은 나에게 우산이고 모자이고 문장이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삶의 화두가 있고 숙제가 있고
이유가 있다.
그리움이 나의 이유다.
내가 상속할 게 있다면 그리움이 유일하다.
내가 떠난 뒤에도 그리움이 남아서
나를 그리워했으면 좋겠다.
물론 지금은 내가 그리워해야 할 것들에 대하여,
그리운 삶에 대하여 게으르지 않겠다.
내가 나를 몹시 그리워하는 수요일이 있듯이
당신에게도 당신을 그리워하는 요일이 있기를 바란다.
당신의 뒤를 부탁할 그리움 하나가
인생에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