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 늘어뜨린 꼬리에 리본을 단
여기저기 상처 입은 한 마리의 암 삵은
앞으로도 연결되고, 사랑하고, 생각하며 삶을 이어 나가기로 했다.
암 삵의 삶 첫 화를 봤다. 연재를 시작한다는 사실에 마냥 신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놓던 그때. 마냥 신나고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내가 글을 쓴다는 게, 그 글을 누군가에게 꾸준히 보여준다는 게, 누군가가 내 글을 읽어준다는 게. 글은 아주 어릴 때부터 썼지만, 글을 쓰고 싶다고 본격적으로 마음을 먹은 건 스물한 살 때였다. 그러고도 십여 년,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글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웹진 쪽에 연재하게 된 암 삵의 삶이었다. 연재는, 작지만 거대한 욕망으로 시작했다. 내 얘기를 하고 싶다는 욕망과 내 얘기를 통해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싶다는 욕망. 조금 변태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라는 존재의 아픔과 희망을 헤집고 들추며 세상 속에 까발리고 싶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와 같은 존재에게 위로가 되기를, 그리고 또 나 자신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랐다.
글을 시작하며 처음 떠올린 것은 ‘차별’이었다. 그리고 떠올린 것은 ‘상처’였고, 그러고 나서 떠올린 것은 ‘개인주의’였다. 나는 이 사회 안에서의 차별과 이 사회가 주는 상처의 많은 부분이 개인에 대한 존중과 이해로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다. 개인이라는 개념의 삭제는 사람들을 특징을 가진 하나의 대상으로만 보게 한다. 또 그 사람들을 같은 특징끼리 묶이곤 한다. 성별로, 나이로, 직업으로, 그리고 수많은 특징으로. 특징끼리 묶인 사람들은 안팎으로 상처 받는다. 밖으로는 위계에 의한 차별로, 안으로는 위계의 내재화로 인한 상처로. 내게도 그런 상처의 시간이 있었다. 나라는 개인이 존중받지 못한 기억들, 내가 나를 이해하지 않았던 시간. 차별받고 상처 입으며 나 자신조차도 나를 상처 입히던 시간이었다.
개인을 존중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와 존중도 포함하는 말이다. ‘나’ 또한 한 명의 개인이기에.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차이점은, 나를 ‘나’로만 생각하느냐 ‘개인’으로 생각하냐에 있을 것이다. 이기주의가 아닌 개인주의를 추구한다면 우리는 나 자신과 타인 모두를 하나의 개개인으로 보고 존중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존중이 있는 사회는 신뢰가 쌓인다. 나는 개인에 대한 존중과 그것이 만드는 사회에 대한 신뢰가 사회 문제 해결의 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두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진 않을 것이다. 내가 이상주의자라는 사실을 나는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내가 이 주장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개인주의자들이 처한 상황과 그 특성에 있다.
이 사회는 아직 집단주의 혹은 전체주의로 굴러가고 있다. 집단은 힘이 있다. 집단의 힘에 눌려 개인주의자들은 많은 경우 자신의 신념을 숨기거나 혹은 홀로 고립되는 걸 택한다. 그 과정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심지어 자기 자신의 삶조차. 주도적으로 삶을 살아나가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 문제를 극복하고 개인주의자들이 개인주의자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개인주의자 간의 연대가 필요하다. 내가 생각하는 연대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서로의 존재가 확인되는 것만으로도, 나는 많은 부분 서로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써온 글들은, 그리고 이 글은 나의 존재를 세상 속에 드러냄으로써 누군가가 내 존재를 확인하기를, 그리고 나 또한 그들의 존재를 확인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시도다.
개인주의자 사이의 연대. 모순된 것 같은 이것을 나는 실제로 경험했다. ‘연결되는 삶’에서 풀어낸 친구들과의 관계가 그러하다. 연두, 은비(최주성이)와 제이크. 내가 살면서 얻은 가장 큰 보물이다. 아니, 보물이라고 말하기에 송구스러울 정도로 소중한 사람들이다. 또 어느 날에는 우연찮게 나와 같이 개인주의가 사회의 흐름이고 키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같은, 혹은 비슷한 생각과 가치관을 공유하는 이를 만난 것은 내게 큰 힘이자 원동력이 되어줬다. 존재의 확인이 가져다주는 원동력이자 힘. 가치관에도 주류와 비주류가 있다. 나의 가치관은 비주류에 가까울 것이다. 혹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나와 같은 가치관을 갖고 있을 것이나,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최주성이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 같은 사람이 세상보다 아주 많을 거지만 그들 중 많은 경우 자신을 숨기고 살거나 어쩌면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죽어버릴 만큼의 외로움. 제이크의 죽음은 어쩌면 외로움사가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는 우리 중 누구보다 개인주의자였고 또 연대를 원했으며 자기의 세계가 확고하면서도 자기 자신에게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세상 속에서 자기 자신이 지워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어떠한 분노도, 미련도 남기지 않고 그렇게 떠나갔다. 그가 떠나고 나서야 그에게 배운 것이 많다. 살아 있을 때는 그가 세상 속에 어우러지지 않는 것을 답답해했다. 맨발로 동전을 뿌리며 길거리를 걷던 스무 살 무렵엔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신이었다. 늘 자신이 누군지 궁금해했지만,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모르는 채로, 그러나 완벽하게 자기 자신인 채로 살다 떠났다. 그렇지만 그는 외로웠다. 자신으로 산다는 것이, 이렇게까지 외로워야 하는 일인 걸까.
나 또한 그 외로움을 안다. 나 자신에게 솔직하고 나 자신으로 살고자 하는 딱 그만큼의 욕망만큼만. 나는 어느 정도는 비겁한 사람이다. 적당히 나를 속이며 살아갈 만큼. 그러나 될 수 있는 한 비겁하기 싫다는 욕망이 있다. 암 삵의 삶을 쓰는 과정은 그런 나를 만나는 시간이었다. 또 될 수 있는 한 비겁하지 않게 살아가기 위한 시작점이 암 삵의 삶이었다. 작가로서 활동하고 싶다는 나의 욕망에 첫 발걸음을 내디딘 것이기에. 처음의 포부는 아주 원대했다. 개인주의자로서 내 생각과 경험과 그 모든 것을 풀어내고야 말겠다는 포부. 지금에 와서 조금 아쉬운 것은 내 고찰이 아주 많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부족하다.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그저 이 정도의 고찰과 생각으로 그런 원대한 포부를 가졌다는 것이. 그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이. 여전히 내 고찰과 생각은 이 정도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그러나 이게 끝은 아닐 것이다. 예전에 누군가 내 글을 보고 ‘존재’에 대한 글을 만나서 반갑다는 말을 건넨 적이 있다. 나는 지금까지도 존재에 대한 글을 썼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존재에 대한 글을 써 내려갈 것이다. 내 존재를 끊임없이 세상에 던질 것이고, 사람들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고 말을 건넬 것이다. 나의 단단하지 못한 고찰과 가치관과 그리고 나 자신을 그렇게 단단하게 만들어나갈 것이다. 이것은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하고, 나와 결이 비슷한 사람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개인주의자가 가지는 숙명인 외로움을 위로하는 일이다. 결국은 ‘개인’으로 돌아간다는 점이 가져다주는 한계도 분명히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개인적이거나, 개인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해야겠다. 모두에게 와 닿는 글은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개인주의자들에게는 닿는 글을 쓰고 싶다. ‘나’라는 개인주의자를 위해, 그리고 내가 아직 만나지 못한 수많은 개인주의자를 위해. 이제 첫걸음을 마쳤다. 다음 걸음을 걸어 나갈 나 자신을 응원하며, 암 삵의 삶 연재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