삵은 여행을 떠났다.
하루에 3만 보씩 걷던 때가 있었다. 재작년 가을 무렵 스페인에서였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무작정 떠난 스페인에서, 되지도 않는 영어를 하며 그렇게 혼자 온종일 걸어 다닌 것이다. 혼자 여행을 자주 가던 건 아니었다. 스페인 이전에 혼자 떠나본 여행이라고는 당일치기로 두물머리를 다녀온 것뿐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떠난 건지 잘 모르겠다. 처음에는 유럽 비슷한 곳을 가고 싶어서 마카오를 가려다가, 그냥 진짜 유럽을 가버렸다. 겁도 없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혼자 처음 떠나는 해외여행을 그렇게 정신없이 다녀왔다.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유명한 건축물도, 맛있는 음식도 아니다. 노상 카페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던 기억이다. 이국적인 풍경과 내 귀에서 흘러나오는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 그곳에 앉아 생각했다. 아니,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의 길을 따라갔다. 온전히 나 혼자만의 시간. 혼자 떠나는 여행의 좋은 점은 그것이었다. 모든 선택이 온전히 나 혼자만의 것이라는 것.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내 마음의 길을 따라가면 되는 시간이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면 그걸로 되는 시간을 보냈다. 의견을 조율할 필요도, 다른 것들을 생각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무균상태에서 살아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가끔은 무균의 시간이 필요하다. 여행처럼. 여행은 회복이다. 삶이라는 피로감의 회복. 삶은 피로감의 연속이다. 하다못해 약 한 봉지를 먹는 것조차 너무나 피로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행위를 한다는 것이 주는 피로감은 아닐 것이다. ~해야 한다는 것에서 오는 피로감. 신경 쓸 게 많다는 것은 해야 할 것이 많다는 것. 의무로 가득 찬 삶이다. 밥을 먹어야 하고, 숨을 쉬어야 하고, 잠을 자야 한다. 삶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은 때로 피로감으로 작용한다.
해야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의 차이가 마음의 문제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어쩌면, 환경의 문제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무언가를 하고 싶어 지는 환경. 산다는 건 무엇일까. 살아내야만 하는 것일까. 살고 싶어 지는 환경은 무엇인가. 살고자 하는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스페인에서의 나는 어땠길래 3만 보만큼의 하고 싶은 것들이 생겼던 것일까. 분명한 건 그 당시의 내게 일상은 살고 싶은 마음이 들게끔 하는 환경은 아니었다는 거다. 그래서인지 스페인에 다녀오고 나서 나는 완전히 퍼져 버렸다. 울증의 시작이었다.
살고 싶은 환경에 놓였던 기억이 많지 않다. 늘 뭔가에 쫓기듯 그렇게 살았다. 살다 보면 자꾸 일이 터졌다. 그 일들을 수습하거나 그 일들에 질질 끌려가는 게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지쳤다. 조금 많이. 조증이 터지고 울증이 터지면서 나는 파도에 휩쓸려버렸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나는 파도를 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보드를 놓쳐버린 것뿐. 파도 위에 사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태어날 때부터 파도에서 태어났다고도 생각했다. 삶이란 원래 이런 것. 다르게 사는 방법을 몰랐다.
여행처럼 살고 싶었다. 이리저리 끌려다니지 않고, 내가 내 두 발로 이 땅을 걸어가면서. 삶의 일들에 치이며 갖게 된 생각 이건만, 아이러니하게도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일을 겪으며 나는 여행하는 삶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게 됐다. 지난 3월 있었던 친구의 죽음. 그 일을 통해 삶은 언젠가 각자의 방식으로 끝나고, 끝난 뒤에도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아니, 느끼게 됐다. 언젠가 끝난다는 것은 설명하지 않아도 전달하기 쉽지만, 끝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감각은 어떻게 언어로 설명해야 될지 참 난감하다.
그것은 설명하자면, 냄새와 같다. 삶의 자취가 풍기는 냄새. 그 냄새는 살아남은 자들의 주위에 진하게 남아있다. 마치 여행의 추억처럼. 삶이 여행처럼 언젠가 끝나듯 삶의 자취도 여행의 추억처럼 남아있다. 삶의 자취에는 의무가 없다. 오직 걸어온 길만 있을 뿐이다. 걸어온 길. 중심이 내게로 돌아오는 생각이었다. 걷는 것은 나이기 때문에.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또 무언가를 하는 것은, 그 안에 있는 내게는 의무로 느껴지겠지만, 그곳에서 한 발 떨어진 어느 지점에서 보면 그저 길을 걷는 내가 있을 뿐이었다.
산다는 것에 대해 마음이 편해졌다. 무엇 때문인지 이 글을 통해 설명하고 싶었지만, 설명해내기가 참 어렵다. 요즘엔 꽤 삶을 여행처럼 살고 있다. 살아낸다는 느낌, 버텨낸다는 느낌보다는 살아간다는 느낌으로. 삶에 끝이 있다는 것 때문인지, 그 끝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후자에 가까울 수 있다는 생각은 든다. 그리고 이 글에 미처 담지 못한 수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언어화되지 않은 수많은 이유가 지금 내 삶을 여행으로 바꿔놓은 것일 테다.
내게 여행하는 삶이란 이런 것이다. 삶의 피로감이 그저 오늘과 지금을 위한 작은 발걸음이 되는 것. 삶의 피로감에 대한 면역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면역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환경이 필요하다. 친구가 죽었을 때 내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면 내가 느낀 것들은 오직 나 혼자만의 것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나조차도 알지 못하는 곳에 그 느낌들은 덩그러니 놓여 있었을 것이다. 주변에 참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 걸 깨달았다. 내 주변에도, 그 친구의 주변에도. 좋은 사람들은 나의 회복을 도왔다. 큰일을 한번 겪고 나니, 그리고 회복의 과정을 거치고 나니 작은 일들은 우습게 여겨진다. 면역력이 키워진 것이다.
키워진 면역력으로 내가 해야 할 것은 나의 중심으로 세상을 잘 살아나가는 것이다. 이리저리 구분당하고 분절되어버린 ‘나’라는 존재 안의 핵을 잘 간직한 채로. ‘나’라는 개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중요한 것은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어렵다는 것이다. 누군가 나의 핵을 봐주고 또 나도 누군가의 핵을 봐줄 필요가 있다는 것. 그리고 핵과 핵의 만남으로 우리가 끊임없이 관계하고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
내 몸으로, 누군가와의 연결로, 나의 우울로, 내 피해 경험으로, 사랑으로, 생각으로 살아온 나는 이제 여행을 떠나려고 한다. 나의 여행 채비는 내가 살아온 삶들. 그 삶들을 하나로 모아 이 글들 안에 고이 쌌다. 한때는 그 짐들을 내 양손에 든 채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던 나지만, 이제는 짐의 무게가 그보다 무겁지 않게 느껴진다. 차곡차곡 정리된 나의 삶. 그리고 내 앞으로 펼쳐진 나의 길. 나는 그 길을 내 핵으로 비춰보며 내 두 발로 뚜벅뚜벅 걸어 나갈 것이다. 길옆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길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