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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색 고양이 Jan 15. 2021

때론 사진보다 명함이 더

여행지를 기억하는 방법 

알록달록 명함들

 여행지에서 사진을 남기는 것 만으로는 성에 안 찰 때가 있다. 다르게 기억하고 싶을 때, 이곳의 일부를 가져가고 싶을 때 명함을 달라고 요청한다. 명함은 업장의 정체성이기 때문에 보는 재미도 있고. 돌아와선 책상 가까이 메모꽂이에 차곡차곡 겹쳐 둔다. 여러 책을 펼쳐두고 읽는 나에겐 그때그때 필요한 책갈피로 쓰기에도 딱이다. 그 중에 몇을 적어볼까나.


a. 런던 Battersea Flower S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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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체류할 때 방에 늘 꽃을 꽂았다. 꽃은 예쁘고 분위기를 바꿔주니까. 배터시 동네 깊숙하게 들어가면 저 가게가 숨어있다. 꽃가게 보다는 '비밀정원' 느낌이다. 풍성한 꽃들에 정신이 아득하다. 환한 미소로 날 반겨주던 중년 점원이 생각난다. 우린 꽃에 대해서, 내가 런던에서 무얼 하는지 시시콜콜 나누었다. 그녀는 내게 화단에 피어있던 백장미 한 송이를 잘라 주었다. 그저 구경만 했을 뿐인데 갑작스런 선물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변덕스런 런던 날씨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데 기분이 어찌나 맑아지던지. 


b. 런던 Villiers 

✨https://goo.gl/maps/cbgnMyV6y16Gv4V2A 

 2016년 체류기간은 한달이었다. 숙소에는 귀국을 앞둔 유학생이 있는데 나랑 투숙기간이 겹친다고. 어떻게 이런 우연이? 파비오는 런던에 잔뼈가 굵어 내 에어비앤비 경험을 풍성하게 해주었다. 한편 도쿄사는 메구미가 휴가로 런던에 오면서 우린 모처럼 재회했는데 그 김에 파비오도 소개했다. 'Villiers'는 파비오의 귀국 직전 우리의 마지막을 위해 방문한 곳이었다. 푸짐한 하몽, 치즈 플레이트와 와인에 거하게 취해 언제 다시 볼 지 모르는 아쉬움을 달랬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했던 완벽한 밤이었다. 


c. 런던 Casa Brindisa

https://goo.gl/maps/kZfvL2mUN191vaBf9

 2014년 6월. 체류를 마치고 곧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착잡한 마음을 애써 달래는 나날이 이어졌다. 주변 몇에게만 오며가며 인사하고 짐이나 싸야겠다 했다. 마침 친하게 지냈던 스페인 친구들이 사우스켄싱턴 쪽에 타파스 맛집을 가자고 제안했다. 그래그래 했는데 오전 내 어떻게 소문이 난건지 열댓명의 친구들이 내 소식을 듣고 나타났다. 고마움, 서운함이 밀려드는 눈물나는 식사였다. 식사를 마치고 가게 앞에서 국적, 인종, 언어가 다른 우리들은 돌아가며 뜨겁게 포옹했다. 어디에서든 다들 건강해. 보고싶을거야. 


d. 시애틀 Ivar's Fish B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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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시애틀은 서울만큼 추웠다. 심지어 겨울이 우기라고. 하루가 멀다하고 비가 (쳐)내렸다. 이 먼 곳에서 나는 왜 처량맞게 비를 맞으며 돌아다니는걸까. 몇 걸음 떼지도 못하고 마음이 치였다. 떠오르는건 오직 뜨끈한 수프와 커피 뿐. 순전히 클램차우더 먹으려고 들렀던 이 피쉬바는 추위에 지친 여행자를 녹여주는 곳이었다. 서비스, 음식 모두 따뜻했다. 영혼을 달래는건 치킨수프가 아니라 조개수프였군. 내친김에 굴과 스파클링 와인까지 먹고나니 '그래 여기가 시애틀이구나' 하는 현실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e. 시애틀 Pike ST. Press 

https://g.page/PikeStPress?share

 시애틀은 파이크 시장이 명물이다. 보통 시장에 사람이 몰리고 주변부로 조금만 벗어나도 한산한데, 이곳은 우연히 찾은 보물같은 곳이었다. 종이, 활자를 좋아하니 더욱이나 뿅 가버렸지만 정성스럽게 프린트한 카드, 각종 상품 구경하는 것 만으로도 시간도둑이랄까. 레이니어 산이 프린트된 카드를 한 장 사서 유덥 수잘로도서관에서 메시지를 적었다. 뭐라고 적었더라? 정확한 기억은 안 나지만 다시는 보지 않을 사람에게 인사같은 것을 했다. 진부한 기념품샵이 별로라면 꼭 들러보시라. 


f. 도쿄 미야카와(みや川) 

https://goo.gl/maps/vfLxWHVXb9uakV1s8

 2019년. 길을 잃었는데 맵도 고장. 오모테산도역 방향을 도저히 모르겠는데 너무 춥고 배가 고팠다. 정처없이 걷는데 어디선가 향긋한 튀김냄새가...! 발이 둥둥 떠가는 만화처럼 당도해 가정집 같은 곳의 문을 소심하게 열었다. 할머니가 맞아주셨는데 알고보니 할아버지가 평생 튀김 외길을 걸어오신 덴뿌라 집이었다. 나를 보니 한국으로 시집간 딸 생각이 난다며. 난 영국에서 만난 메구미를 만나러 도쿄에 왔다하니 우리의 우정이 보기좋다고 격려해 주셨다. 튀김은 말해 뭣해. 얼마 안 남은 현금을 아쉬울거 없이 턱 냈다. 


g.호치민 Temple Club (폐업 ㅠㅠ) 

https://goo.gl/maps/caRWkyULr4Hr4RNk7

 도저히 싫어지기 어려울 것 같은 것이 있다. 간혹 실망스러워도 관대하게 '그럴 수 있어' 하고는 다시 찾게 되는 것들. 그 중에 하나가 쌀국수다. 2012년 여름에 출장으로 베트남 호치민에 갔다가 현지 직원들과 식사한 곳이다. 식당은 깨끗하고 고급스러웠다. 다양한 음식을 먹었는데 앞에서 뭘 먹었는지는 까맣게 잊었고 마지막에 나온 쌀국수만 강렬하게 남아 있다. 이것이 베트남 현지 쌀국수의 위력인가! 알싸한 국물과 찰진 면발은 그동안 한국에서 먹은 쌀국수가 다 가짜라는 것을 증명했다. 아쉽게도 이젠 폐업했구나. 


h. 도쿄 다이칸야마 츠타야 (代官山 蔦屋書店) 

https://goo.gl/maps/eN4wK78x2JaNeTLP8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도쿄 다이칸야마 츠타야 서점. 과연 서점일까? 서점의 미래라고 추앙받는 곳이라 그저 '서점'이라고 하기엔 수식어가 부족하게 느껴진다. 어느 도시에 가든 나는 꼭 시장과 서점에 들른다. 도시의 문화와 사람을 가장 가까이에서 다채롭게 흡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츠타야에 갔을 때 그들의 풍성한 문화 감수성에 뜻모를 질투와 경외심이 들었다. 그냥 창가에 앉아 멍 때리기만 해도 좋은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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