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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색 고양이 Feb 09. 2021

"만날 때 가방 신경쓰이는 여자친구는 버려요"

메구미에 대하여

 "만날 때 가방 신경쓰이는 여자친구는 버려요." 예전에 연륜이 느껴지는 '성인 여자'와 식사할 자리에서 그녀가 나에게 충고한 말이었다. 흔히 '여자들의 우정' 하면, 기싸움이나 자존심으로 대변되는 이미지가 있다. 여자에게 특정할 성질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동성 관계에서 내가 손사래 치는 요소다.


 메구미는 런던에서 처음 만났다. 같은 건물에서 인사하다 안면을 텄다. 난 낯가림은 없지만 속가림이 있는데도 이상하게 메구미에겐 처음부터 친근함을 느끼긴 했다. 선뜻 더 다가가진 않았지만. 어느 날 나는 지독한 봄 감기에 걸려버렸다. 혼자 지낼 때 가장 힘들고 서러운 순간은 아플 때 아닐까? 열에 기침하다 영혼이 다 빠져나올 것 같았다. 간신히 약을 타고 새우등을 하고 걷다 메구미를 마주쳤다. 그녀는 가방에서 냉큼 휴대용 휴지를 꺼내 나에게 쥐어주었다. 자기에겐 많으니 오늘 가지고 다니면서 쓰라고. 휴지는 일본에서 가져온 모양인데 얇고 부드러웠다. 무방비로 있다가 당했다. 너넨 이런거 잘 만들더라 엉엉. 서럽던 마음이 티슈에 녹다니 나도 참.


 며칠 뒤에 고마움의 표시로 작은 스낵을 전했고 그 다음은 커피, 밥, 펍으로 이어졌다. 초록은 동색이라. 우린 동아시아 여성 평균신장을 비웃듯 170cm가 넘는 키 때문에 동족 느낌으로 가까워졌다. 고국에서 옷 사면 소매길이 맞는게 없는데 여긴 천국이야, 맞아맞아, 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꿈과 좌절, 연애, 가족, 학업과 진로, 한일관계, 취향과 가치관을 이야기했다. 두어번 런던 근교 당일치기 여행도 다녀오고 하이드파크를 걸어다녔다. 메구미는 모두에게 밝게 인사를 건네고 반달 눈웃음을 짓는 골든 리트리버과였다. 그에 비해 나는 까칠한 고양이에 가까웠다. 친해지기 싫은 사람은 다가오지 못하게 했고 누가 날 욕해도 신경쓰지 않았다. 스타일도 달랐다. 메구미는 파스텔톤과 꽃무늬, 애프터눈티를 좋아했다. 나는 스키니진에 블라우스, 머플러를 두르고 플랫화이트를 마셨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종종 나를 일본인, 메구미를 한국인으로 오인했다. 심지어 한국, 일본인들이 구별을 못했다. 나는 메구미의 상냥함을, 그녀는 나의 분명한 선을 닮고 싶어했다. 우린 그렇게 '런던 시스터즈'가 되었다.


 시간이 흘러 내가 그녀보다 먼저 귀국하게 되었다. 친구들과 마지막 식사 날, 메구미는 나에게 이별선물과 카드를 주었다. 계속 연락하자고. 응 당연하지. 그녀가 도쿄로 돌아간 뒤에도 우린 메신저로 끊임없이 장문의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생일과 연말연시, 다시 만나자는 다짐을 이어갔다. 2년 뒤에 휴가기간이 겹쳐 극적으로 런던에서 재회했고 이듬해에 내가 도쿄, 다음엔 메구미가 서울, 다시 내가 도쿄를 방문해 멋진 시간을 보냈다. 우린 머리부터 발끝까지 드레스업해 근사한 호텔에서 티타임을 가져보기도 했고 운동화를 신고 3파운드짜리 샌드위치를 우적우적 씹으며 잔디에 드러눕기도 했다. 명동에서 쑥떡을 사고 긴자에서 규동을 먹었다. 우릴 끈끈하게 만들어준 자양분은 뭐 였을까.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 동지의 이심전심, 기꺼이 낮은 내 모습을 보여주는 자기개방성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한 타인긍정이었을 것이다. 옷과 화장, 가방부터 신경썼다면 친구가 될 수 없었겠지.


 나는 여전히 젊고 가능성이 많지만, 한 살씩 먹을수록 친구가 무언지는 잘 모르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각자의 환경이 달라져서, 먹고사니즘 때문에, 자연스럽게 멀어져서 같이 이유는 가지각색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오래 옆에 있으면 좋겠지만 영원을 약속하기엔 나도 계속 변함을 인정한다. 가방 따위는 처음부터 관심없으니 진솔한 대화가 가능한 친구라면 없어지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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