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토이 Jul 14. 2020

대학생의 서핑 도전기

양양에서 발리까지

01


재작년 여름 서핑을 처음 도전한 양양에서의 기억이 스쳐 갔다. 잔잔한 파도와 흐린 날씨,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간 성수기에 사람이 없던 양양바다. 귀를 기울이면 바다 옆 군부대에서 쏘는 총소리가 들렸고, 시선을 집중하면 저 바다에는 물고기들이 가득했다. 보드조차 타본 적 없던 나에게 서핑은 너무나도 생소한 스포츠였다. 흙바닥에서 패들링을 연습했고 준비조차 되지 않은 상태로 바다에 들어갔다.

    연습을 마치고 처음으로 보드 위에 일어섰을 때에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속도를 무서워하는 나였지만 물 위에서는 달랐다. 어렸을 때 배웠던 수영은 나의 든든한 믿을 구석이 되었다. 바다에 빠지는 게 무섭지 않으니, 바다 위에 올라서는 게 무서울 리 없었다.

    두시간가량 서핑을 하고 보드 위에 누워 하늘을 봤다. 다시 한번 물을 가르고 싶었으나, 힘이 없었다. 나를 밀어내 균형을 잡을 힘과 패들링을 해 깊은 바다로 나아갈 힘 모두.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 그리고 흔들리는 보드 위에 나만이 존재하는 세상이었다. 늘어뜨린 팔에는 차가운 바닷물이 느껴졌고 이따금 날이 흐렸던 그 날의 하늘은 해 질녘이 되자 유난히도 맑았다.

    그날 저녁으로 고기를 먹었다. 오랜만의 물놀이라 차갑게 식은 뷔페 고기조차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어슬렁거리던 우리에게 다가온 낯선 사람들과 술도 마셨다. 이곳 또 저곳에서 서핑을 가르치는 강사라고 했다. 그러니까 지금은 이곳에 있지만 매년 매 시기마다 파도를 찾아 떠난다고 했고 그 삶을 영원히 살아갈 거라고 했다. 하루종일 서핑을 가르치고 파도를 타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깊은 바다로 들어가 전복을 딴다고. 만화 같은 또 꿈같은 삶이었다. 밤바다를 걸으며, 어딘가 조악한 나무 그네를 지나기도 했고 신나는 노래를 틀고 춤을 추기도 했다.


서핑이 좋아졌다. 그날 단 하루 바다를 가르던 기억이 일 년 내내 내 머릿속을 떠다녔다. 제대로 서핑을 타보고 싶어졌는데, 양양에서는 그 ‘제대로’가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하루라는 시간은 부족할 것 같았고 한 달이라는 시간은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왕 하려면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마침 휴학을 하고 있었고 남는 게 시간이었다. 일주일에 6일 많으면 7일씩 일을 하며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발리 항공권을 샀다. 일 년 뒤에 출발하는 항공권을 예약했는데, 누군가를 기다리고 싶지도 내 의견을 굽히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무작정 혼자 여행을 가기로 했다.


02


발리에 있는 서핑 캠프에 도착한 첫날, 세시간을 자고 바다로 나갔다. ‘모닝’하고 나를 깨워주던 캠프 사장님의 목소리. 아직 깜깜한 새벽 모두와 처음 만났다. 낯선 사람들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며 아침밥을 먹었다. 딸기잼이 발린 토스트와 따뜻한 아메리카노. 위아래로 갖춰 입은 검정 래시가드에 비치타월을 두르고 봉고차에 탔다. 바투볼롱이라는 이름의 바다로 간다고 했다.

    어스름한 새벽에 처음 본 발리의 길거리였다. 한쪽에는 논밭이 또 한쪽에는 예쁜 건물들 그리고 그사이의 아주 좁은 길을 지나고 지나 바다에 도착했다.

    인도네시아 현지인 인스트럭터와 짧은 인사를 나눴다. 어느 누구에게도 모국어가 아닌 그 언어로 인사를 했다. 이름을 물었고, 서핑 경험을 물었고 또 오늘이 며칠째인지 발리에는 며칠이나 머무는지에 대한 것들도 이야기했다. 그날 만난 인스트럭터의 이름은 엔알 그리고 나랑 동갑인 스물 세 살이었다. 그러고도 어스름한 하늘과 바다인데 엔알은 바다에 들어가자고 했다. 그렇게 들어간 바다는 생각보다 차가웠고 생각보다 금방 익숙해져서 어느 순간 편안하고 따뜻해졌다. 한참을 패들링 해 깊은 바다로 들어갔다. 바다에 대한 공포감보다는 정신없는 상황에 대한 어리둥절함이 더 커서 얼마나 깊은지도 몰랐다.

    라인업에 처음으로 도착한 순간 엔알이 나를 밀어주었다. 패들링을 하다가 파도의 힘이 느껴지는 순간 보드를 짚고 테이크오프를 하면 된다. 아니 된다고 들었었다.


운동 신경이 평균 이상은 된다는 내 어떤 프라이드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그날 두 시간동안 파도에서 씨름을 하며 단 한 순간도 제대로 일어나지 못했다. 양양에서 가능했던 내 첫번째 라이드는 순전히 작은 파도 덕분이었던 거다. 그날 캠프로 돌아와 내가 보드를 타는 영상을 보고 또 보며 다짐했다. 이번 여행이 끝나기 전에 제대로 일어나 주겠다고.


오후에는 혼자 밥을 먹고 테이크오프 연습을 했다. 바닥에 서핑보드 모양의 매트를 깔고 그 위에서 일어서는 연습이었다. 그냥 무작정 일어서는 게 아니라 발의 위치와 각도, 일어설 때 팔의 위치, 몸의 방향과 시선의 방향까지 그 모든 것이 마치 내 것인 양 익숙해지게 만드는 과정이었다. 발리에 오기 전, 서핑을 위해 매일같이 두시간 운동을 했었는데 고작 백번의 테이크오프 연습이 그보다 더 힘들었다. 자세가 익숙해지지 않아서 한 번의 테이크오프에도 오만 신경이 곤두섰다. 


03


다음날엔 오직 일어나겠다는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모닝’ 소리와 함께 일어나는 그 순간 느꼈다. 내 팔에 느껴지는 극심한 근육통을.

    서핑 영상들을 보며 지레짐작 코어 운동을 해갔지만 정작 필요했던 건 팔 힘이었다. 양양에 갔을 때도 부족함을 느꼈던 팔 힘인데 왜 그새 까먹고 팔운동을 빼먹었을까. 스스로가 의아하고 또 한심했다. 둘째 날 아침에도 어스름한 새벽에 차를 타고 바투볼롱으로 향했다. 두 번째라고 첫날에는 빠뜨렸던 선크림과 현금 조금, 그리고 편한 슬리퍼도 챙겼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날 나를 가르쳐준 인스트럭터 블랭키는 나를 아주 좋아했고 그만큼 열심이었다. 반 정도는 치근덕대고 또 반 정도는 나를 열심히 밀어주었다.

    둘째 날 처음으로 서핑의 성지인 발리 바다를 갈랐다. 속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바다를 향해 힘들게(그날은 유독 더) 패들링 했고 해변을 바라보고 처음으로 일어난 순간, 그제야 일출이 눈에 들어왔다. 입수할 때만 해도 어두웠던 바다가 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해변 넘어 해가 떠오르는 분홍색 하늘과 아른거리는 윤슬. 그리고 제대로 가르는 발리의 바다는 양양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상어에게 한쪽 팔을 잃고도 서핑을 하는 베써니와 파도를 따라 살아간다던 양양에서의 그 낯선 이들 그리고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파도가 좋아 모든 것을 정리하고 발리로 이사 온 파르코 사장님까지. 그 모든 사람에게 개연성이 부여되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나는 서핑을 사랑하게 되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재밌는 일은 디자인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님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서핑캠프에 비치되어있는 책의 서문이 문득 스쳐 갔다.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매우 행복한 사람이라면 서핑을 배우지 마세요.

서핑은 모든 것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어딘가에 지금보다 더한 행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면 서핑을 배워보길 추천합니다.


오랜만에 내 삶을 바꿀 글과 목적을 마주한 것이었다. 그날 밤은 기분이 좋았다. 발리에 도착한 세 번째 밤이었고 라이딩에 성공한 첫날이었다. 한국에서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소주를 꺼내 캠프 사람들과 함께 마셨다. 잘 피지도 않는 담배도 피웠고 낯선 사람만 만나면 신나는 내 나쁜 습관이 발동되어 술을 진탕 마셨다.


04


다음날은 평소보다 한 시간 정도 늦은 시간에 기상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모닝’ 소리와 함께 하루가 시작되었다. 셋째 날은 둘째 날보다도 상태가 나빴다. 팔이 아팠고 숙취에 속이 쓰렸고 또 소위 ‘초보병’이라고 부르는 갈비뼈가 아픈 증상도 시작되었다. 게다가 이날은 이미 익숙해진 바투볼롱이 아닌 꾸따 비치로 향했다. 이 꾸따 비치에는 채널이 없었는데, 그것 역시 초보 서퍼인 나에게 매우 치명적이었다. 패들링을 아무리 해도 깊은 바다로 나아갈 수 없었다. 체력이 썩 좋지 않은 나는 보통 모든 운동을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편인데 숙취와 근육통 그리고 초보병까지. 그 세 가지 핸디캡을 이고 채널이 없는 꾸따바다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결국 우린 라인업으로 가지 못한 채 샌드 브레이크에 머물렀고, 그날 나를 담당했던 이판은 내내 무표정 그리고 때로는 찡그린 채 나를 밀어줬다.

    그날도 어찌어찌 몇 번 정도 일어났으나 그게 다였다. 금세 지쳤고 그렇게 하루를 날렸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인생에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극한의 배고픔을 겪었다. 숙취와 두시간의 공복 물놀이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캠프에 돌아와서는 밥을 먹고 낮잠을 잤다. 또 오늘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지상 트레이닝도 했다. 몇 번이고 자세를 점검하고 연습하며 내일은 꼭 일어나리라 내일은 소중한 하루를 날리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05


넷째 날은 유독 기억에 남는 날이다. 그날은 이상하리만치 상쾌했다. 팔과 갈비뼈 그리고 컨디션까지. 꼭두새벽부터 요란하게 준비운동을 하고 바투볼롱을 돌아다니는 강아지들과 해변을 걷기도 했다. 어쩌다 보니 항상 팀을 이루게 된 남국 오빠와 서핑보드에 누워 이야기를 나눴고 그러던 차에 새 인스트럭터가 왔다. 나보다 한살이 많았고 이름은 델티라고 했다. 이 나라는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믿으며 아주 보수적인 문화를 가졌기 때문에 초면에는 꼭 나이에 대한 질문을 듣게 되곤 했다.

    한참을 말없이 나를 밀어주던 델티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사람이 네 남편이야?’ 여기서 저 사람이 남국 오빠를 뜻하는 것인가, 서른둘인 남국 오빠가 내 남편인 줄 알았던 건가? 약간 상처였지만 괜찮았다. 사실을 정정할 여지가 남아있었으니까. 나는 아주 단호하고 확실하게 아니라고 했고 그 순간부터 델티는 말이 많아졌다. 발리에서 잘 볼 수 없는 이쁘게 생긴 얼굴에 금발의 단발머리 그리고 나에게는 매 순간이 생존의 연속인 바닷속에서 든든한 의지가 되어주는 사람. 그래 나는 그날 조금 설렜다. 나는 맘에 드는 사람이 생기면 어떤 슈퍼파워가 생기는 종류의 사람이라 그날은 유독 많이 그리고 길게 라이드를 했다. 일어나는 것도 벅찼던 내게 그날은 기적과도 같은 날이었다. 테이크오프가 몸에 익었다는 느낌이 들었고 나를 앞서가는 파도를 잡기도 하고 바다에 빠지지 않고 라이드를 끝내기도 했다.

    주어진 두 시간이 끝나갈 때쯤 델티는 나에게 친구를 하자고 했다. 일주일 뒤 다시 꾸따로 돌아오는 내 일정을 물어보며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다. 그리고 바다 위에 가만히 떠서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교환했다. 델티는 아주 여러 번 보드 위에 본인의 아이디를 써줬다. 까먹으면 큰일 난다는 듯 델티에 nus를 붙여 델티누스라고 꼭 기억하라고 했다. 서핑보드 위에 손으로 글씨를 쓰던 기억은 아마 아주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06


벌써 다섯째 날이었다. 발리에 와서 매일같이 바른생활을 했더니 시간이 더 빨리 갔다. 다섯 시에 일어나서 열시면 잠자리에 드는 삶은 날 건강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고 또 아무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 체중까지 감량해주었다. 이 생활에 대한 만족감이 커질수록 한국으로 돌아가 직면해야 할 현실이 무서워졌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서핑을 하고 거실에 모여 그날 영상을 보며 리뷰를 하고 캠프에서 친해진 사람들과 점심을 먹고 하루 종일 놀러 다니다 10시가 되면 잠에 들었다. 어느 무엇도 생각할 필요가 없는 삶은 나를 나태하게 했지만 그만큼 행복하게도 해주었다.

    이날은 첫날에 나를 담당했던 엔알이 다시 나의 인스트럭터가 되었다. 두 번째 수업이라고 그날은 더 깊은 얘기를 나눴다. 인도네시아는 스물세 살이 결혼 적령기인데 본인은 아직 결혼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아마 내가 인도네시아 사람이었다면 이미 기혼자였을 거라고 했다. 기혼자라니,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며 발리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조금 줄였다.

    엔알은 테이크오프가 익숙해진 내게 이런저런 새로운 기술들을 전수해주었다. 빠른 파도를 누르는 법, 보드의 속도를 높이는 법과 방향을 전환하는 방법 같은 것들이었다. 보드에는 여러 가지 물리적인 규칙들이 적용된다. 빠른 파도, 즉 보드를 앞서가는 파도를 잡으려면 몸을 낮추고 파도 방향으로 기울여야 한다. 참으로 쉽게 들렸지만 균형을 잡는 것만으로 벅찬 파도 위 그리고 그 위의 보드 위에서 몸을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란 참 내 맘과 같지 않았다. 난 분명히 몸을 조금 기울였다고 생각했지만 곧 바다에 노즈 다이빙을 하기 일수였다. 보드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파도를 타며 보드 위에서 점프를 해야 한다고 했다. 발은 보드에 붙인 채 무릎과 상체를 움직여 콩콩콩하고 찍으라고 했다. 서핑 캠프 사장님이 엔알이 유일하게 맘에 안 드는 점이 이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할 정도로 싫어하는 기술이었지만 나는 그게 묘하게 멋있어 보였다. 다행히 이 기술은 생각처럼 어렵지 않았다. 테이크 오프를 한 뒤 파도 위에서 점프를 했을 뿐인데 놀랍도록 보드의 속도가 빨라졌다. 자전거도 달리기도 운전까지. 나는 내 컨트롤을 벗어난 속도를 지나치게 싫어하는 편인데 보드 위에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처음으로 속도를 높이는 것에 성공하고 엔알에게 돌아갔을 때, 엔알은 마치 내가 보드 위에서 춤을 추는 것 같았다고 했다. 영광이었다. 보드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게 고작 삼 일 전인데.

    속도를 높이는 것에 익숙해진 나에게 엔알은 방향을 바꿔볼 것을 요구했다. 몸을 뒤로 기울여 무게중심을 보드 끝에 싣고 팔을 포함한 전신을 오른쪽으로 틀라고 했다. 여러 번이고 도전을 해봤으나 내 딴에는 엔알의 인스트럭션을 모두 지킨 것 같았는데 보드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조류가 흐르는 방향으로 빠르게 나아가기는 했다. 이 미션을 부여받기 전까지는 방향이고 기술이고 할 것 없이 파도를 탄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는데 졸지에 단순히 파도를 타는 것은 시시한 일이 되어버렸다. 한편으로 생각하니 다음 미션을 부여 받음으로서 테이크 오프는 별게 아닌 게 되어버렸고 또 덕분에 테이크 오프를 아무런 두려움 없이 할 수 있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그날은 한 번도 턴을 하지 못했다. 턴도 성공하지 못하고, 턴을 시도하려고 허우적대느라 SNS에 올릴 동영상도 건지지 못했다.


07


드디어 마지막 날이었다. 일주일이면(정확히는 6일) 상당히 긴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일주일을 하니 이주일을 하고 싶었다. 이 주일간 머물던 언니들은 딱 이주만 더 있으면 정말 잘 탈 수 있다고 했고 파르코 사장님은 그래서 자기가 여기에 살고 있는 거라고 했다. 일주일은 또 일주를 낳아 이주가 되고 이주일은 또 이주를 낳아 한 달이 되고 그게 평생이 되는 건가, 싶었다.

    그 말을 들으니 오히려 마음이 좀 정리가 되었다. 지금 일주일을 더 할게 아니라 내 평생에 걸쳐 일주일씩, 여유가 될 때는 이 주일씩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날은 첫날처럼 모든 것이 다시 새로웠다. 하루 종일 오토바이를 타며 지나다니던 short cut도 새로운 길 같았다. 

    공교롭게도 그 날이 마지막이었던 사람들이 많았고 우리는 다 비슷비슷한 마음으로 말없이 창밖을 봤다. 날이 흐렸다. 보통은 마지막 날 날씨가 좋아서 떠나는 사람에게 미련을 남기고는 하는데 흐릿한 날씨도 충분히 미련으로 남기는 했다.

    마지막 날 나를 담당해준 인스트럭터는 윌리라는 열여덟 살 소년이었다. 며칠 전 본인을 스파이시 보이라고 어필하던 산만하고 시끄러운 인스트럭터였다. 그날도 윌리는 서핑 내내 장난을 쳤다. 나도 나름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열여덟 살 앞에서는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날따라 파도가 셌고 나는 넷째 날과 다섯째 날보다도 일어나지 못했다. 간신히 테이크 오프에 성공했을 때는 방향을 트는 연습을 하느라 서핑의 즐거움을 순수하게 느끼지는 못했다. 다행히 그 날 결국 방향을 돌리는 것에 성공을 했다. 몸의 균형을 뒤로하고 팔과 허리 그리고 시선을 오른쪽으로 틀었다. 마법처럼 내 보드는 오른쪽으로 향했다. 주객이 전도당해 그저 보드 위에 서있던 내가 최초로 주도권을 가지고 온 순간이었다.


08


일주일간의 서핑 캠프가 끝나고 남은 일주일은 혼자 발리를 여행했다. 숙소에 누워 내 서핑 영상을 돌려보고 새롭게 만난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과 술을 마시기도 했다. 꿈과 같은 이주가 지나고 한국으로 돌아가던 날에는 말 그대로 처참했다. 이주만에 돌아가는 내 고국이 끔찍하게도 싫었다. 그곳에는 파도가 없고 자유가 없고 싸마싸마가 없다. 책상에 앉아 디자인을 하고 야작을 하는 건 더 이상 재미있지 않았다. 우울한 마음으로 돌아온 한국에서는 야속하게도 시간이 흘러갔다. 곧바로 다음날 개강을 했고 쏟아지는 과제에 정신이 없었다. 발리로 가서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려 했지만 나는 그곳에 여행지였기 때문에 그리웠음을, 이 주간의 꿈이었기에 행복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내 인생에 찾아온 권태는 생각보다 깊었다. 스스로를 더 사랑하기 위해 수업을 드롭하고 병원에 다녔다. 시간이 흐르니 이렇게 저렇게 괜찮아졌다. 다시 한번 이 구절이 떠올랐다.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매우 행복한 사람이라면 서핑을 배우지 마세요.

서핑은 모든 것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어딘가에 지금보다 더한 행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면 서핑을 배워보길 추천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전시를 마치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