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더 킹: 영원의 군주> 리뷰
※ 2020년 이 드라마가 방영했을 시점에 쓴 글이지만, 저의 로맨스 공식에 대한 취향을 이야기한 것이기에 시점과 무관하게 옮겨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취향을 평생 유지 중인 소나무 같은 사람입니다.
야근을 자주 했다거나 컨디션이 나빴다든가 하는 특별한 이유는 없었는데 6월 내내 기력이 너무 없어서 퇴근하고 집에서 드라마만 열심히 보았다. 우선 가장 기대했었던 김은숙 작가의 <더 킹: 영원의 군주>를 (그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회는 본방 사수까지 하며 모두 다 보았고 해외에서 인기가 많다는 <사랑의 불시착>도 끝냈으며, 최근에는 <사이코지만 괜찮아>까지 매주 챙겨보기 시작했다. 그렇다. 이번에 하고 싶은 얘기는 바로 ‘더 킹은 대체 왜…(머리짚기)’이다.
인간관계에 대해 다소 부정적이고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것에 비해 나는 로맨스물을 매우 좋아한다. 드라마와 영화로는 로맨스 코미디이고 웹 소설로는 로맨스 판타지를 즐겨보는 편이다. 다만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의 작품들은 그 감정을 느끼기 싫어 장르 불문하고 보지 않는 편이다. 어떻게 보자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임을 이미 인지하고 있기에 그야말로 허구라는 전제에서 콘텐츠를 즐길 수 있어서 더 재밌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해리 포터나 반지의 제왕, 마블 시리즈처럼.
그리고 로맨스 물에서 조금 세분화를 해보자면, 나는 ‘집착 광공’ 캐릭터가 나오는 것을 가장 선호한다. 사실 광공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보편적으로 쓰이는 날이 오다니 참 신기한데, 요즘은 경주마처럼 앞(상대 혹은 목표)만 보고 달리는 캐릭터들을 모두 광공이라 통칭하는 것 같다. 여기에 집착이라는 — 현실에서는 정말 혐오스러울 수도 있는 — 키워드가 결합이 되면 보통 만족도의 반은 차지하고 들어가게 된다. 그러면 세상에 상대방에게 구애하는 것 밖에 삶의 목표가 없는 것 같은 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이런 나의 취향에 80%의 확률로 취향을 맞춰주었던 드라마 작가가 있었으니 바로 갓은숙, 김은숙 작가였다. 100%가 아닌 이유는 아직 보지 못한 작품들도 몇 개 있을뿐더러 미스터 선샤인과 더 킹 모두 만족스럽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녀의 작품에서 뽑아볼 수 있는 전적인 내 취향의 로맨스 공식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싶어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첫째, 커플인 둘은 그냥 처음부터 사랑에 빠질 운명이었다. 개연성이라는 건 그 뒤에 붙게 된다. 그저 상대이기에 처음부터 끌렸고, 그렇기에 그와 그녀의 모든 행동에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라는 당위성이 붙게 되는 것이다. 스며들거나 정이 드는 것은 이 공식에서 용납할 수 없다. 몸이 바뀌게 된 <시크릿 가든>, 어린 시절부터의 순정적인 짝사랑이 이어진 <온에어>, 너 같은 여자는 처음이야 공식의 정석 <상속자들>, 그냥 본 순간부터 호감을 느낀 <태양의 후예>까지 일단 1화부터 이 ‘운명적 상대’와의 만남과 호감이 임팩트 있게 전달되어야 스토리가 시작될 수 있다.
둘째, 만사 제쳐두고 상대에게만 달려갈 수 있어도 괜찮은 현실적인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가장 기본이 바로 외모와 재력이겠고, 능력, 사회적 지위가 모두 결합되어야 한다. 그리고 최근 여기에 미스터 선샤인과 더 킹으로 인해 ‘신분’이라는 항목도 추가가 되었다. 더 이상 민주 사회의 시민 수준으로는 부족하여서, 조선시대 양반 아기씨이거나 평행 세계의 황제 정도는 되어줘야 뭐라도 해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총체적 ‘스펙’들은 직진 같은 광공들의 사랑에 휘발유를 부어준다. 상대의 모든 문제와 고민을 해결해줄 수 있고, 생계 걱정하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찾아가 볼 수 있게 하며, 그 누구와 비교해도 무조건 멋있어 보일 수밖에 없도록 후광 효과를 가져다준다. 스펙은 달려오는 상대가 ‘도대체 왜 이래?’라고 생각되지 않고 ‘도대체 왜..왜이러는거얏..! 흐흥~!’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 주는 힘이다.
그렇다면 더 킹에서 느꼈던 부족함은 무엇이었을까? 심지어 위의 공식이 매우 강화되어 지켜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는 <더 킹> 이후 <사랑의 불시착>과 <사이코지만 괜찮아>를 보며 깨닫게 되었는데, 틀은 맞춰졌지만 안에 들어가는 재료 배합에 문제가 있었다고 진단해보게 되었다.
우선 첫 번째 조건인 ‘눈 맞음’에 있어서의 어필이 부족하였다. 남자 주인공인 황제는 생명의 은인이라 믿는 정태을을 보자마자 드디어 찾았다며 바로 사랑에 빠진다. 평생 그녀의 사진을 보며 다양한 생각을 해왔기에 여기까지는 그렇다 치지만, 애초에 그 감정이 사랑이었노라 표현된 적이 없기에 그의 저돌적 다가감에는 다소 ‘어이어이- 너무 다급한 거 아니냐고(웃음)’이라는 당황을 느끼게 된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대시를 받는 여자 주인공 정태을은 초반에 황제의 존재도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다가 갑자기 나의 운명을 받아들이겠노라며 그를 사랑한다고 선포해버린다. 그동안 그 행동이, 처음부터 호감을 가진 상태였다고?라는 생각에 역시 당황을 느끼게 된다. 그들의 눈 맞음에는 역설적으로 감정에 당위성을 부여하려다 오히려 어색함이 더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조건인 ‘스펙’을 극대화하려다가 애매한 세계관 설정이 덕지덕지 붙어서 뭣도 아니게 된 것이 크다고 생각한다. 우선 황제 정도가 등장해줘야 될 것 같으니 평행 세계 한 스푼, 여기에 대한민국이지만 다른 세계여야 하니 대한제국이라는 국가 설정 한 스푼, 그리고 관계에 극적인 당위성을 부여하려다 보니 시간 여행까지 한 스푼, 그리고 이 모든 걸 한방에 이해해야 하는 주인공이어야 하다 보니 ‘이과형’ 황제라는 엄청난 수식어가 붙어버린다. 하나만 붙어도 방대할 시간 여행과 평행 세계가 한 번에 쓰여버렸기에 당황하고 이를 밝혀내는 것에만 16화를 다 쓸 수준이었기 때문에, 이과는 이런 거 다 이해하겠지 수준으로 붙인 수식어로만 쓰인다. 세계관이 방대하다 보니 어쨌든 조금씩은 설정을 드러내 줘야 하고, 그러다 보니 이런 설정이 낯선 사람들에게는 무슨 세계관 인지도 모르게 되어버렸고 익숙한 사람들에겐 우스운 세계관이 되어버린 것도 크다 생각한다. 결정적으로 마지막에는 이 시간 여행과 평행 세계 여행을, 주인공 커플의 데이트 나들이로만 활용하게 된다.
여기에 개인적인 마지막 아쉬움을 더해보자면, 저돌적인 직진을 풀어내는 캐릭터의 모습이었다. 분명 황제는 직진을 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갭(Gap)’이 부족하였다. 자고로 광공의 조건 중 하나는 ‘차가운 도시 남자지만 내 여자에게는 따뜻하겠지’이다. 즉, 상대에게만 보여주는 또 다른 모습이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모두에게 냉철한 기업인이지만 내 여자 앞에서는 한없이 무너져서 바보가 되는 모습을 보인다거나, 아무에게도 곁을 주지 않는 까칠한 성격이지만 상대방 앞에서는 세상 순한 양이 된다거나 등 ‘반전 매력’을 꾀하는 고전적인 방식들은 많다. 모두에게 곁을 주지 않는 황제라지만 누구에게나 친절한 군주여서 그랬을까, 그의 모습이 극적으로 반전된다는 생각이 크게 들지는 못했다. 특히나 강한 대시에 어이없어하는 여자 주인공에게 능글맞게 티키타카를 하는 모습 역시도 크게 어필되지 못했다. 외모와 스펙이 전부가 아니다. 말발도 필요한 것이다.
클래식은 영원하다는 말과,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얘기 있음에서 알 수 있는 건 기본적 틀이 있되 어떤 변화를 주느냐가 몰입과 재미를 만드는 요소가 된다.<사랑의 불시착>의 경우는 일단 남한의 재벌과 북한의 고위 관직 아들의 만남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소재로 시작하여 능력, 권력, 재력, 그리고 외모 모두를 갖춘 두 캐릭터의 내일은 없어 수준의 사랑을 그려냈다. 이런 설정 덕에 총격씬부터 추격씬, 카드 플렉스까지 멋짐을 보여줄 수 있는 요소는 죄다 등장한다. 그리고 <사이코지만 괜찮아>는, 전형적인 광공 공식의 성별을 바꿈으로써 신선함을 갖다 주었다. 잘 나가는 동화 작가이자 바비 인형 같은 미녀인 고문영이, 자신의 끊임없는 대시를 쳐내는 병원 보호사 문강태의 뒤에 대고 ‘사랑해! 내가 너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니까! 사랑한다고!’라며 잔뜩 짜증 섞인 고백을 외치는 모습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여기서 결정적인 포인트는, 그 고백을 받는 문강태 역시 그녀를 이미 좋아하고 있지만 여러 이유로 밀어내고 있다는 것을 시청자들이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각종 플랫폼이 발달함에 따라 정말 다양한 분야에서 수많은 콘텐츠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드라마와 영화뿐 아니라 웹소설과 웹툰, 심지어 게임 등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콘텐츠를 찾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이다. 특히나 일부 플랫폼에서는 키워드 분류를 사용하여 원하는 ‘소재의 틀’을 찾기 쉽게 해 준다. 예를 들어 능글남, 직진남, 뇌섹녀… 등으로 설정하면 딱 원하는 캐릭터가 나오는 작품을 검색 결과에 가져다주는 것이다. 이토록 수많은 콘텐츠들이 끊임없이 나올 수 있는 것은 기본 공식들 안에 ‘아직도’ 변화를 줄 수 있는 영역들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베이킹 틀만 있으면 각양각색의 빵과 쿠키를 만들 수 있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