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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바댁 린다 Jul 19. 2020

저는 국제 이주정착 서비스 전문가였습니다

이제는 쿠바 전문가가 되고 싶어요


우리는 보통 모임이나 행사에서 처음 만나면 통성명을 하고 나서 “실례하지만 어떤 일을 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라는 질문을 한다. 그러면 의사, 변호사, 선생님, 작가 등 딱 떨어지는 직업을 가진 분들은 본인의 소개도 간단하고 상대방도 그 직업에 대해서 바로 알아듣는다. 하지만 나의 직업은 일반인들에게 무척 생소하여 간략히 대답을 하기가 곤란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나는 덴마크계 회사이지만 본사는 영국 런던에 있는 국제 이주정착 서비스 회사(Global Moving & Relocation Services Company) 한국 지사에서 정착(Relocation) 팀을 맡은 팀장이었다. 나도 한국에 그런 회사가 있는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그 회사 외국인 지사장님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정확히 알게 되었다.


일단 고객은 외국계 기업이었다. 내가 함께 일을 했던 기업들은 대부분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그런 글로벌 회사들이었고 세부 고객은 그 회사로 파견되어 오시는 지사장님부터 엔지니어까지 일명 주재원들이었다.


예를 들어 고객사에서 본인 회사에 새로운 대표님이 파견이 되어 오시기로 확정이 나는 경우 우리 회사에 연락을 하여 상황을 설명한다. 그러면 우리 팀에서 이메일로 구체적인 상황 작성표를 고객사에 보내고 고객사 담당자가 그 표에 필요한 사항을 기재해서 돌려주면 주재원이 될 고객에게 우리 팀에서 전화를 드려 먼저 인사를 나눈다. 그러면서 대표님과 가족의 한국으로의 이주정착을 위해서 우리가 어떠한 서비스를 제공을 하고 어떻게 도와 드릴지 상세히 설명을 드린다. 이 상황이 모두 마무리가 되면 신문에 모 회사에 새로운 대표로 외국인 누구누구가 부임이 될 거라는 기사가 뜬다.



우리 팀에서 제공을 하는 서비스는 다음과 같았다.



단기 하우징 예약(호텔 혹은 서비스 아파트먼트)
한국과 그 지역에 대한 오리엔테이션
한국에서 거주할 집 렌트 및 관리
주재원 및 주재원 가족의 비자
국제 학교 방문 및 등록
은행 계좌 오픈
한국 운전 면허증 취득(자동차 & 오토바이) 및
필요시 구매



이 외에도 주재원들이 한국에서 살면서 필요로 하는 모든 서비스를 우리 팀에서 제공을 했기 때문에 주재원들의 삶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다. 십여 년을 일하면서 나는 주재원들이 주로 거주를 하는 지역(이태원, 한남동, 방배동, 이촌동, 반포동, 성북동, 평창동 그리고 서울역과 용산역 인근)에 있는 렌트 주택, 고급빌라, 아파트는 거의 컨설팅을 할 수준으로 그리고 집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수리를 할 정도로 잘 알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비자 업무를 진행했던 경험으로 그 어려웠던 남편의 한국 비자도 받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내가 과거에 했던 일이 퇴사를 하면서 끝이 난 게 아니라 퇴사 후의 나의 삶에도 꾸준히 도움을 주고 있었다. 역시 모든 일들은 연결이 되어 있으며, 점들이 모여 선이 되고 선들이 모여 원이 되면서 이어진다는 것은 분명한 진리이다.  








이 업무를 시작한 초반에 회사에서는 나를 홍콩에 보내어 Global Mobility Specialist(국제 이주정착 전문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나는 덕분에 이 분야 전문가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었다. 교육을 받으면서 외국으로 파견되는 주재원들의 약 1/3 가량이 주재원으로서의 삶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지 못한다는 것과 그래서 내가 하는 업무가 주재원들과 그의 가족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갈수록 경기가 안 좋아지자 글로벌 회사들도 주재원들에게 꼭 필요한 서비스 이외에는 제공을 해 주지 않는 분위기로 변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주재원들이 한국에 처음으로 방문하여 만나는 사람이 우리 팀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므로 나를 비롯한 팀원들은 한국을 대표하는 민간 외교관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아주 자랑스럽게 일을 했더랬다.(물론 실무는 주로 팀원들이 맡았다)


내가 이 회사에 입사했을 때만 해도 우리 회사는 한국 시장에서는 업계 후발주자여서 성적이 별로 좋지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 지사장님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는 급여가 마음에 안 들어 한 번 거절을 했는데 6개월 후 다시 제안을 받고는 고민을 한 후에 계약을 하고 일을 시작했다.


이 회사에서 대략 어떤 일을 하는지는 알았지만 내부 사정이 이렇게 엉망이라는 것은 본격적으로 일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일에는) 완벽주의였던 나는 그 상황에 너무 충격을 받아서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오기 전까지는 먹고 자는 시간 이 외에는 일만 하였더랬다. 그 덕분에 일을 시작하고 4개월이 지난 후 다시 보너스 협상을 하였고 결국 만족할 만한 조건에 합의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죽도록 일만 한 결과 일 년도 안 되어 병을 얻게 되었고 그만 둘 뻔하는 상황까지 가게 되었다. 당시 우리 팀은 나의 노력으로 인해 계속 성장을 하고 있던 터라 내가 그만두게 되면 타격이 꽤나 클 상황이었다. 그래서 회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것을 제안하였고 나는 그 제안으로 그리스로 보름 동안 휴가를 다녀오게 되었다. 그렇게 콧바람을 쐰 결과 다시 에너지를 받아서 계속 일을 하게 되었다.


상사와 티격태격하면서도 목표가 같았던 덕분에 우리는 쓸데없이 에너지 소모를 하지 않고 일에만 정진을 할 수 있었고 그룹에서도 내가 하는 일에는 적극적으로 지지를 해 주어서 나도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헤드헌터의 과감한 제안에도 불구하고 계속 회사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결국 우리 회사는 업계에서 선두의 자리에 올라가게 되었고 내가 퇴사를 할 때까지 그 자리는 계속되었다.


그런 회사에서 내가 퇴사를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그룹 CEO가 바뀌면서 회사와 CEO의 이념이 아주 돌변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사직서에 퇴사 이유를 ‘회사의 이념과 나의 이념이 맞지 않음이라고 기재를 하였다.) 35년간 그룹을 이끌면서 인간과 교육에 중심을 두셨던 60세의 덴마크인 CEO가 은퇴를 하시고 아주 젊은 40대의 다른 덴마크인이 CEO가 된 것이었다.


이 혈기 왕성한 젊은 CEO는 이전의 CEO와는 아주 다르게 돈과 실적에만 관심을 보일 뿐 사람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새로운 중국인 여성 CFO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내 상사에게 나의 보너스를 들먹이며 계속해서 압박을 가하였다. 나는 꼬박꼬박 실적도 잘 내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비용절감을 위해서 들들 볶았던 것이었다.


나의 호주인 상사가 다른 나라로 이주를 하면서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을 때, 아시아 헤드와 나의 상사는 내가 그 자리를 맡아주길 바랬지만 만약 내가 그 자리를 덥석 받아들였다가는 아마도 숨도 못 쉬고 스트레스로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지사장직을 깊이 생각도 하지 않고 과감히 거절하였고 그 선택은 지금 생각해도 최고의 선택이었다. 단순히 명예(?) 하나 때문에 이념도 마음도 맞지 않는 사람들을 상사로 모시고 할 말도 제대로 못 하면서 일할 정도로 비위가 좋은 사람이 나는 못 되었다. 어쩌면 욕을 하다가 잘릴 수도 있었을 테다. 훗.








그 회사에서 일을 할 때 본사에서 내려온 지침 중에 우리 회사에서 일을 할 수 없는 나라 리스트가 있었는데 그곳에 북한과 쿠바가 있었다. 다른 일들은 모두 다 잊어버렸는데 이상하게 그 일은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그래서 쿠바에 올 때에 언제가 쿠바가 변하게 되면 한국에서 내가 하던 일을 쿠바에서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런데 쿠바에 와서 보니 한동안은 그럴 일이 전혀 없을 것 같이 보였다.


남편 친구 중에 주로 외국인들과 일을 하는 변호사가 있었는데 내가 쿠바에 와서 얼마 안 되어 만났던 그 친구는 향후 20년간 쿠바는 변할 일이 없을 거라고 큰 소리를 땅땅 쳤었다. 그래야지 본인이 먹고살기가 좋으니까 그랬겠지만 그때는 그 말을 들었을 때 암담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남편도 그 친구 말에 동의를 하였다. 지금까지 60년간 변하지 않았던 쿠바가 쉽게 변하겠냐며.


하지만 내 마음 한편에서는 쿠바가 변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고 되든 안되든 내 느낌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엊그제 대통령이 월요일부터 달러를 다시 사용을 할 것이고 달러 환전 세금을 철회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했을 때 나는 무척이나 기뻤던 것이다.


‘혁명’이라는 단어도 참 좋지만 이제는 쿠바도 ‘변화’라는 단어를 받아들일 때이다. 그 변화가 어떤 식으로 될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코로나 덕분에 쿠바가 변한다구요?] 글을 쓰고 나서 앞으로 변화하는 쿠바에 대해서 기록을 남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 브런치에 글을 쓸 때에는 일단 그냥 썼다. 그때 나는 다른 데 신경을 쓰지 않고 무조건 쓰기만 했고 그게 맞았다. 나는 매거진에 대해서도 몰랐고 분류를 해야겠다는 생각조차도 없었다. 그런데 글이 점점 늘어나자 어느 날 글을 분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최근에 새로운 매거진을 만들어서 지금까지 올린 모든 글을 다섯 개의 매거진으로 분류를 하였다.


그런데 오늘 여섯 번째 매거진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부터 일어나는 쿠바의 변화에 대해서 기록을 하는 매거진으로 제목은 [쿠바 특파원 쿠블리입니다]이다.


그리하여 [쿠바는 지금]에는 이 변화 이외의 쿠바의 특징적인 일들을 기록하고, 그 외에 쿠바에서 경험하고 발생하는 모든 일들은 [쿠바에 살아요]에, 쿠바인 남편과의 이야기는 [사랑밖에 난 몰라]로 분류를 해서 앞으로도 계속 살아있는 이야기를 기록해 나갈 것이다.


7월 20일 월요일부터 겪게 될 쿠바의 변화에 대해서 직접 경험하고 부딪히며 살아있는 생생한 정보를  전달할 마음에 벌써부터 설렌다. 


남편에게 월요일에 최대한 달러 가게 여러 군데를 갈 예정임을 알려두었고 이 변화에 대해서 상세히 기록을 할 거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남편이, “자기, 이 곳에서 독립적으로 일하는 쿠바 기자나 저널리스트들은 다 잡혀가.”라고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했다. 그래서 내가 “자기, 걱정 마. 나는 한국어로만 글을 쓸 거고 쿠바 정부에서 이 글을 번역해서까지 읽지는 않을 거야.” 그러자 남편이 “맞아. 한국어를 번역기로 돌리면 내용이 이상해지니까 모를 거야.” 하면서 우리는 또 하하하 하면서 웃었다.


여러분, 브런치 소속 쿠바 특파원으로 사명감을 가지고 쿠바의 변화에 대해서 글을 쓸 예정인 쿠블리에게 너무 큰 기대는 마시고 살짝 응원만 해 주실걸 부탁드려요. 이래 놓고 변화 제대로 안 하면 힘 빠질 거 같긴 한데 그래도 일단 한번 시작해 보겠습니다!



추신. 이 글을 저장하는 순간 다음 주에 아리랑 TV에서 하는 영어 인터뷰 제의가 들어왔어요. 각 나라 코로나 상황 인터뷰이고 5분 동안 하는 거라고 해요. 어쩜... 정말 쿠바 특파원이 되어버렸네요! 인터넷 연결이 관건인데 잘 준비를 해 봐야겠어요. 얼굴이 나오는 생방송이라고 하니 민망하기도 하고 떨리기도 하네요. 저 잘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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