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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다 Sep 25. 2024

솔직하다는 말의 진심


카페에서 일을 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특히나 내가 일하는 매장은 홀이 협소한 바(bar) 형식의 매장이라 손님과 바리스타 사이가 가까운 편이다. 그래서 연인들이 오면 서로를 향해 내뱉는 사랑의 언어를 고스란히 듣게 되고, 주부들이 오면 살림의 고단함을, 직장인들이 오면 직장생활의 지긋지긋함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참 흥미롭다. ‘이야기’ 자체를 좋아하는 편이라 책도 소설위주로만 읽는 내게 손님들의 이야기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현실의 이야기이자 가끔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흥미진진함으로 내 귀를 사로잡는다. 

다양한 손님들이 들어와 다양한 이야기들을 남기고 가지만, 참 신기한 것은 가만히 들어보면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들의 가장 큰 주제는 언제나 비슷하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관계’다. 상사의 험담을 하고 있는 연인을 위로해 주고, 시댁의 험담을 하는 친구를 위로해 주고, 직장 내 공공의 적을 테이블 위에 올려 씹고 뜯고 맛보는 사람들을 보며 역시 사람이 살면서 겪는 가장 어려운 문제는 인간관계구나, 그런데 그걸 또 인간에게서 위로받는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렇다면 인간관계를 보다 돈독하게 유지해 주는 것은 무얼까 생각해 보니 몇 가지가 떠올랐는데, 그중 하나가 ‘진심’이었다. 상대방을 진심으로 대하면 그 마음이 가닿게 되어있고, 설령 닿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후회는 남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종종 이 ‘진심’을 ‘솔직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솔직함도 인간관계를 유지함에 있어 중요한 요소 중 하나겠지만, 나는 요즘 이 솔직함이라는 말이 불러온 웃지 못할 상황을 종종 마주하며 그 의미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가 거짓말을 못하는 편이라, 솔직하게 말할게. 사실 말이야...”


이런 식으로 대화의 서두를 시작하는 사람이 내 앞에 있다면, 나는 귀를 반쯤 접는다. 뒤에 따라오는 말을 굳이 들어보지 않아도 좋은 내용은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 사람은 거짓말을 못하는 솔직한 사람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예의가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더 맞는 것 같다. 사실은 진심으로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기 보단 그냥 내게 상처를 주고 싶어서 하는 말임이 너무도 분명하게 느껴지니까. 그런 사람들은 이렇게 타인의 어떤 점을 꼬집고 비난하고 싶을 때만 솔직함을 내세운다. 나를 아껴서 하는 말이라고, 나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사실은 서슬 퍼런 칼날을 품고 상대를 찌를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피를 철철 흘리는 상대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하겠지.


“나는 다 널 위해서 한 말이었는데, 네가 이렇게 아프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구나.”


아마 진심으로 상대방을 생각했다면 분명 다른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아픈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 해도 그렇게 날 선 칼을 푹 찔러 넣기보단 주사를 맞기 전 간호사가 피부를 톡톡톡 쳐서 달래주는 것처럼 최대한 아프지 않게 배려했을 것이다. 그들이 솔직함을 앞세워 말하는 경우는 이렇게 상대를 아프게 하고 싶을 때만 그렇다. 진심으로 축하를 전한다거나 칭찬의 말을 건넬 땐 그 자랑스러운 솔직함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얼마 전 매장에 젊은 여자손님 두 분이 들어왔다. 그중 한 분은 공무원시험 준비를 하다가 이제 막 새내기 공무원이 된 듯 보였다. 처음 만나는 사회가 녹록지 않았는지 회사에서 만난 다양한 인간군상에 대해 토로하기 시작했는데,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 주변의 인간관계들에게서 오는 스트레스가 있어 보였다. 그래서 알고 지내던 몇몇의 관계들을 끊어낸 이야기들을 맞은편에 앉은 친구에게 털어놓고 있었다. 아마도 어렵다는 공무원시험을 합격하고 이제 막 새로운 시작을 하는 자신에게 주변의 몇 사람으로부터 축하의 말은커녕 비아냥거림을 받은 것 같았다. 그들은 아직 취업을 하지 못했고, 취업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 일찌감치 사회생활을 시작한 친구가 부러워 그랬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서 잘난 체하는 것 같아 짜증 나’가 아니라, ‘솔직히 말해서 성공적으로 취업한 네가 참 부러워’라고 말했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조금 달라졌을까? 그랬다면 관계를 끊어내기보단 아직 취업을 하지 못한 친구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며 미안한 마음을 가지지 않았을까 잠깐 상상해 봤다. 

손님들의 대화를 잠깐 엿듣는 것으로 누가 맞고 틀리다를 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내가 감히 짐작할 수 없는 시간의 무게가 그들에겐 켜켜이 쌓여있기 때문이다. 그저 들려오는 몇 마디의 대화와 지금의 내 상황과 가치판단 기준이 더해져 잠시 그들의 이야기를 상상해 본 것일 뿐이다. 이 상상은 결국 나는 어떤지 돌이켜보기 위함이다. 나 역시 솔직하게 말한다는 전제를 앞세워 타인에게 상처를 준 적은 없었는지. 


가까운 사람일수록, 사랑하는 사이일수록 벽이 없어지고 서로에게 허물이 없어진다. 그래서 더욱 친밀하지만 또 그래서 지나치게 솔직해질 때도 있다. 지금의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예전의 나도 알았더라면, 또 솔직하게 말한다는 전제를 앞세워 상처를 주려는 사람 앞에서 딱 지금 만큼만이라도 성숙하게 대처할 수 있었더라면, 그 시절 단호하게 끊어냈던 관계들이 아직 남아있으려나. 

한편으론 항상 내게 좋은 말들을 건네주는 이들이 주변에 있어 감사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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