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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다 Sep 18. 2024

내 운동의 역사


외모가 출중한 연예인들을 볼 때면 조물주가 그들을 만들 때 영혼을 갈아 넣어 만든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와 생물학적으로 같은 종일텐데 어쩜 저렇게 정성 들여 빚어놓은 듯이 생겼을까 싶고, 그러다 거울 속 나와 눈이 마주치면 ‘참 무심도 하시지’ 하는 원망 섞인 한숨이 나도 모르게 나올 때도 있다. 다소 아쉬운 부분은 많지만, 그래도 나는 내 얼굴을 좋아하는 편이다. 나의 얼굴엔 아빠와 엄마 어느 한쪽으로 몰빵 되지 않고 아주 반반씩 적당히 섞여 있어서 어느 날은 거울에서 엄마를 발견하기도 하고, 아빠를 발견하기도 하다가 또 어느 날은 누구도 닮지 않은 그냥 ‘나’ 그대로 느껴지기도 하니까. 그래서 외모에서 만큼은 조물주에 대한 원망을 접기로 했다.

사실 내가 조물주에게 따지고 싶은 것은 따로 있다. 그건 바로 ‘신체’다. 키를 작게 만드시려거든 비율이라도 좋게 만들어주시던지, 그것도 아니라면 운동신경이라도 충분히 넣어주셨어야 했는데, 조물주는 나의 신체를 만드실 때 매너리즘이나 슬럼프라도 오셨었나. 너무 성의 없이 만들어진 듯한 나의 신체와 신체의 능력을 마주할 때면 불쑥불쑥 화가 나서 당장이라도 찾아가 따지고 싶은 기분이다. 



선천적으로 갖지 못한 것이라면 어떻게든 노력으로 달성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처음 시작했던 운동은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헬스장 등록’이었다. 나는 비쩍 마른 체형을 갖고 있다. 건강하고 예쁘게 마른 몸이 아니라 진짜 볼품없이 깡마른 몸이다. 그래서 헬스장등록을 위해 처음 상담을 할 때도 건강해 보이는 몸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고, 트레이너는 유산소보다는 근력운동을 위주로 하면 된다고 조언했다. 3개월권을 끊고 헬스장을 나오면서 열심히 하다 보면 나도 멋진 몸을 가져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설렜다. 하지만 설렘은 그때까지만 이었다. 처음 해보는 운동이라 헬스장의 기구들이 익숙하지 않았는데, 근육질의 헬스트레이너들은 내가 운동기구를 만지기만 하면 어딘가에서 나타나 아주 커다란 목소리로 ‘그거 그렇게 하시면 안 돼요!’ 라던지, ‘그거 하지 마세요!’와 같은 안된다는 말만 했다. 상담할 땐 친절하기만 했었는데 다소 화가 난 듯한 모습에 당황스러웠다. 어느 날은 러닝머신이 재밌어 보여서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에 올라섰는데, 어느샌가 뒤에서 ‘그거 뛰지 마세요! 살 빠져요!’ 하며 헬스장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그럴 때면 헬스장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이게 그렇게까지 공개적으로 면박당할 일인가 싶어 점점 운동을 하면서도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헬스장에 오시는 동네 할머니들도 나만 보면 꼭 혀를 차며 한 마디씩 하시곤 했다. ‘어휴 왜 이렇게 말렀어. 밥을 안 먹는가? 요즘 젊은이들 말른 거 좋아한다지만 너무 말러도 남자들이 싫어햐’. 나는 결국 한 달도 다니지 못하고 호기롭게 끊은 3개월권을 회사 동료에게 양도했다. 



그다음에 시작한 운동은 ‘검도’였다. 

멋들어진 도복을 입고, 죽도를 들고, 힘차게 기합소리를 내며 타이어를 칠 때만 해도 재밌었다. 문제는 대련을 하게 되었을 때부터였는데, 마르고 작은 체구인 내게 호구(보호장구)는 초등학생용으로 입으라고 해놓고, 대련은 선수를 준비하는 성인남자와 붙여주었다. 평소 경쟁이나 대결 같은 걸 싫어해서 게임도 안 하는 승부욕 수치 0인 내가 죽도를 들고 누군가와 대련을 해야 한다는 사실도 힘들었는데, 그 선수급 남성회원은 내가 조금 일찍 도장에 나와 어떤 동작이라도 연습하려 하면 어느샌가 나타나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며 ‘그건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라고 면박을 주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죽도에 내 것임을 표기하는 이름을 쓸 때도 실명을 쓰기 좀 부끄러워서 별명을 썼었는데, 마치 성스러운 죽도에 장난질을 쳐놓았다는 듯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커다란 길이에 호구를 쓰고, 죽도를 꼭 쥐고 내 앞에 선 그 남성회원은 ‘머리~~~!’ 하면서 단 한 번의 타격도 놓치지 않고 매번 내 머리를 찰지게 내려쳤다. 호구를 착용해서 아프진 않았지만, 타격에 대한 충격은 어느 정도 느껴졌다. 운동을 배우러 돈을 내고 온 건데, 누군가의 스트레스 해소 대상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난 또 몇 개월 만에 검도를 그만두었다.



그렇게 내가 선택한 운동들은 친절하게 운동을 알려주기보단 대부분 다소 과격하고 강압적이었다. 거기에 내 하찮은 운동신경이 더해져 몸이 마음대로 작동하질 않으니 운동 같은 건 더 이상 하고 싶지가 않아 졌다. 물론 친절한 트레이너 선생님들도 많다. 주변 친구들이나 지인들 중 개인 PT를 받는 사람들이 몇 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면 엄청 친절하고 세심하게 알려주신다고 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도전해 볼까 하다가도 지난 기억에서부터 차오르는 스트레스가 생각나 마음을 접게 되었다. 유독 내가 갔던 운동센터가 그랬거나, 아니면 내 운동신경이 그만큼의 분노를 일으킬 정도이거나.(눈물)


나의 모든 다짐들이 그렇듯 운동도 어떤 가치를 투자하지 않으면 영영 하지 않게 된다. 독서도 돈 내고 독서모임을 나가야 책을 읽고, 배움도 돈 내고 학원을 끊어야 공부를 하듯 운동 역시 혼자 알아서 하려니 숨쉬기 운동이 전부가 되어버렸다. 조물주가 신경 써주지 않은 기초체력에 게으름이 더해져 어느샌가 내 몸이 제구실을 못하고 아픔만주는 존재가 되어갈 무렵, 더 이상은 물러설 곳이 없다고 느꼈을 때, 나는 다시 운동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난 운동의 역사를 돌아보니, 앞으로의 운동을 고를 때 고려해 볼 부분들이 몇 가지 생겼다. 강압적인 분위가 없을 것,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운동일 것(대련 노노), 내 부족한 운동실력을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이 넓은 운동일 것(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찾아낸 운동은 바로 ‘요가’였다. 



운동신경은 물론 유연성도 가지지 못한 내 몸은 학창 시절 체력테스트를 할 때도 선생님들이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더랬다. 다리를 쭉 펴고 앉아 허리를 굽혀 손끝이 발끝의 어디까지 닿는지를 체크하는 유연성 테스트에서 선생님들이 항상 내게 했던 말은 ‘끝이니?’였다. 나는 최선을 다해 허리를 굽혔지만 누군가의 눈에는 그저 앉아있는 것일 뿐. 하지만 질끈 감은 눈과 파르르 떨리는 손끝을 보며 선생님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 이 아이는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구나.’ 하고 말이다. 그랬던 내가 요가를 몇 년 꾸준히 하면서 이제는 손끝이 발끝에 가까스로 닿기 시작했다. 이런 나를 보고 내 여동생은 감탄하며 박수를 쳐줬다. 


여전히 나는 우리 요가원에서 요가를 제일 못한다. 아마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제일 못할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고관절을 접어 이마가 요가매트에 닿을 때 나는 맨 뒤에서 꼿꼿하게 굳은 고관절을 두드리며 선생님과 눈이 마주치고, 다른 사람들의 곧게 편 다리 사이로 나의 굽은 무릎이 파르르 떨리는 걸 보면 조급한 마음이 들 때도 있다. 나머지 공부라도 해야 되나 싶고, 얼른 실력이 늘어서 다른 회원들과 비슷하게나마 모습을 맞춰야 하나 싶고 그렇다. 그런 생각들로 의기소침해지고 좌절감이 오려고 할 때면 어김없이 선생님은 이렇게 말해주신다.


“할 수 있을 만큼만, 무리하지 말고 하세요.”


그 말을 들으면 조급했던 마음이 스르륵 풀리고, 오늘의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최선을 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또 어느 날은 나름 오래 요가를 한 것 같은데 전혀 발전하지 않은 듯한 모습에 답답할 때면 또 어김없이 선생님이 말씀하신다.


“지금 당장 눈에 띄는 변화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차곡차곡 쌓아둔 근력들이 시간이 지나면 여러분들의 가장 큰 자산이 될 거예요.”


그러면 또 다짐한다. 당장의 예쁜 몸보다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몸을 만들자고. 혹여나 나중에 내가 병을 얻어 앓게 되더라도 누구보다 더 잘 이겨낼 수 있는 튼튼한 근육 베이스를 만들어두자고. 



요가를 하고 있다는 내게 주변 지인들은 ‘요가가 운동이 되느냐’며 되묻는다. 사람들의 생각 속 요가의 이미지는 아주 정적이고, 운동보다는 명상을 하는 듯한 고요한 이미지인 것 같다. 그럴 때면 나는 ‘속는 셈 치고 딱 한 번만 요가를 해보라’고 말한다. 이제껏 내가 시도한 어떤 운동보다 많은 땀을 흘리게 한 운동이 바로 요가라고 말이다. 누군가와 대결하지 않아도 되고, 딱 키만 한 요가매트 위에서 혼자 하는 운동. ‘훈련’이나 ‘단련’이라는 말보다 요가 ‘수련’이라고 부르는 점 또한 마음에 든다. 마치 내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보듬어 주는 느낌이랄까. 마음이 복잡할 때면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왠지 평화를 부르는 듯한 인도음악을 배경에 두고 한 폭의 요가매트 위에서 내 몸을 야들야들하게 만들고 싶어 진다. 땀을 줄줄 흘리면서 수련을 하다가 마지막에 사바사나(시체자세)를 할 때의 후련함이란! 그 잠깐 동안은 세상 모든 걱정을 잊고 바닥에 닿아있는 내 몸에만 집중할 수 있다. 아니, 사실 집중은 잠깐이고 어느새 크릉 크릉 코를 골고 있다. 밤에 그림을 그리다가 어쩔 수 없이 잠을 못 이겨 침대로 쓰려졌다가 맞이하는 아침보다 불과 오분남짓이지만 사바사나 자세를 하는 동안 맛보는 잠깐의 잠이 훨씬 달콤하게 느껴진다. 


어제도 굽히지 않는 고관절과 펴지지 않는 무릎과 등을 가지고 용쓰느라 아침부터 여기저기 결리는 부분이 있지만, 이 자잘한 근육통들이 성장통이라고 생각하니 견딜 만 해진다. 언젠가는 내 몸의 근육들도, 더불어 마음의 근육들도 유려한 자태를 뽐내며 건강한 어른이 되는데 한몫할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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