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지 Jan 10. 2018

<다키스트 아워> 그들은 '국뽕' 영화를 어떻게 만드나

윈스턴 처칠, 그에 관한 위인전 한 편

영화 <다키스트 아워>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다이아모 작전(덩케르크 작전)을 주제로 한다. 다이아모 작전은 영국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잊을 수 없는 사건이다. 이 작전이 많은 영화와 소설 속 배경으로 끊임없이 회자되고 극적 효과가 더해져 재생산되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그들에게 다이아모는 국민들의 용기와 인류애가 성취한 기적과도 같은 드라마이다. 어랏? 근데, 이 드라마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다. 그렇다. 다이아모 작전은 그들에게 소위 말하는, 국가는 위대했고 국민은 더욱 위대했다는, '국뽕'과도 같은 소재이다.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을 기적처럼 뒤엎는 이야기는 누구나 늘 또다시 듣고싶고, 또다시 꺼내 떠올리고 싶다. 그 이야기가 우리가 승리를 쟁취하는 이야기라면, 우리 자신들이 주인공이라면 더할나위 없이 즐겁다. 국뽕 영화는 늘 그래서 잘 팔린다. <다키스트 아워>는 다이아모 작전이라는 그 소재만으로도 이미 국뽕 영화에 포함시켜야 할  영화인데, 영화 속 주인공마저 2차 세계대전의 위대한 영웅, 윈스턴 처칠이다. 국뽕영화로서는 더할나위 없다. 


그런데 웬걸? 한 편의 위인전을 읽는 기분으로 간 나는 위인이 아니라 구제불능에 고집불통 할아버지를 만나고 왔다.


그렇다면 영국의 국뽕 영화는 과연 어떨까. 영국인들이 국가에 갖는 자부심은 (영국에서 살았던 나는 더욱 실감한다)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2차 세계대전을 다룬 영국 영화들의 99%는 국가, 혹은 국가의 영웅에 대한 위대한 찬사를 보내고 있다는 것도 안다. <다키스트 아워>도 엄밀히 따지자면 그 영역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 편의 위인전을 읽을 자세로, 존경의 마음을 듬뿍 뿜어낼 각오로 영화관에 간 나는, 영화가 시작하자 어딘가 찝찝했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된지 30분쯤이 지나자, 나는 알았다. 이 영화는 처칠을 마냥 화려하게 그릴 생각만은 없다는 것을. 


처칠은 고집불통이었다. 주변 전문가들의 말도 들을 생각이 전혀 없다. 그렇다고 영화 속 고독한 천재들이 주로 그러듯이 위대한 통찰력을 발휘하여 매번 승리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이 할아버지, 갑질도 한다. 흔히 소비되는 위대한 전략가의 이미지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배가 너무 불러있어 움직이는 것이 둔한 데다가 나이가 너무 들어 말도 잘 나오지 않는다.그에게 그의 전략을 뒷받침할 적당한 논리도 없다. 그는 그저 지기 싫어서 싸울 뿐이며, 그가 연합군을 승리로 이끈 것은 정말 운이 좋았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찌됐던, 영화에서 묘사된 위대한 총리 윈스턴 처칠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같이 일하기 싫은 '개저씨'다.


그렇게 극장을 나오는 나는 자부심이 가장 강하다는 영국에서 제작된 국뽕 영화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아야 했다. 아니 반대로, 나는 왜 내가 그토록 '매끄러운' 영웅만을 기대했는가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아야 했다. 마치 티끌하나 없는 깨끗한 동상을 세우려는 듯이 영화 속에서 나는 영화 속에서 위인을 넘어 성인을 갈구했다. 수많은 한국의 역사영웅 영화 속 주인공들이 그랬던 것을 보면, 사실 그 갈구하는 주체가 나, 한 개인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일지도 모른다. 


물론, 한국 국뽕 영화 속 주인공들에게도 조금의 인간적인 매력들이 더해진다. <변호인>의 송우석은 영화 초반 돈밖에 모르던 속물이었고, <명량> 속 이순신은 죽은 부하들의 환영을 보며 한없이 나약해지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런 결함은 그야말로 '매력'을 더하는 수준이기에 그의 아우라를 훼손할만큼 치명적이지 않거나, 결국 참회하며 영화 궁극에 이르러 위대한 인물로 거듭남으로써 관객에게 용서를 받는다. <연평해전>, <덕혜옹주>, <군함도>, <인천상륙작전> 모두 다 영화를 볼 때만큼은 재밌었으나 나오는 순간 어딘가 공허한 느낌은 그래서였을까. 영국의 국뽕과 한국의 국뽕 영화가 달라지는 지점은 바로 여기일 것이다. (그래서 아마, 한국에서는 아직 <덩케르크>같은 영화가 나오지 않는 걸까? 오직 자신이 살겠다는 본능만으로 영화 내내 뛰어다니던 인물에게, 마지막 장면에서 따듯한 담요와 맥주를 건넬 수 있는, 그런 영화말이다.)  


<다키스트 아워> 속 '개저씨'스러운 처칠을 보며 나의 욕망이, 이 사회의 욕망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우리의 위인들은 정의롭고 모든 위기에 적절히 대처했으며 거기에 매력적이기까지 했다고? 우리, 조금 솔직해지자. 그 어떤 인간도 그럴 수 없다. 영웅 혹은 천재. 그 무엇이든, 그들은 항상 승리하지 않는다. 처칠이 실제로 드라마와 기적을 만들긴 했으나 그 어떤 순간에도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실제로도 그는 역사 속에서 숱한 패배를 경험한 인물이다).


그토록 매끄러운 영웅으로부터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없다. 존경심 그 자체를 제외하고는 어떤 감정도 불러일으킬 수 없다. 그건 그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매끄러운 동상에 불과할 뿐이다. 


그동안 이 사회는 너무 가공된, 매끄러운 인간상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진짜 인간이 풍기는 냄새를 인위적으로 숨긴 채, 오직 향기로운 인간을 보며 그것이 인간의 모습이라고 믿으면서. 그러나 그런 위인전은 너무나도 공허하며 오히려 우리에게 자기 혐오만을 전달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불완전한, 그러나 진짜같은 위인전으로부터 무엇을 읽어야 하는 걸까.


매끄러운 동상과도 같은 위인전으로부터 탈피. 우리는 그럼에도 읽을 것이 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가 애국심을 유발하는 영화에 '국뽕'이라는 타이틀을 달며 이를 조롱처럼 여긴 이유는 우리가 그들이 지나치게 미화되었고, 그렇기에 감정이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스크린에 아름다운 모습과 위대한 모습을 포기한 인간을 올려 놓는다면 오히려 그 텍스트로부터 읽어낼 거리는 더 풍부해질 수 있다. <다키스트 아워>는 처칠의 아우라를 통째로 박살 내어 놓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그로부터 패배에 대한 불안과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부터 오는 고통, 늙음에 대한 회한과 초조함을 읽을 수 있었다. 이것은 인간 보편에 대한 감정이다. 그 어떤 위치에서 어떤 성과를 낸 사람도 모두 겪어야 하는 고통. 그 감정들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어떻게 참아낼 것인가하는 고민과 과정이 고스란히 영화 속에 묻어난다. 영화도 소설도 극복할 수 없는 것들을 극복할 수 없어서, 기여코 이야기할 수 밖에 없게 되는 예술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거기서 관객들은 더 많은 고민과 또 해답을 얻어갈 것이라 믿는다. <다키스트 아워>는 딱 그런 영화였다.  


어릴 적 위인전을 읽으면 나는 당혹스러운 순간들에 꼭 생각했다. '위인전 속 그 사람은 어떡했을까.' 어른이 된 후, 나는 말한다. '미안한데, 그였어도 별 수는 없었을걸.' 2018년 새해에는 조금 더 인간냄새나는 국뽕 영화들이 개봉하길 바란다. 



*물론 모든 한국의 영화들이 그렇다고 일반화하고 싶지 않다. 그건 분명 사실이 아니다. 한국 사회의 구성원 전체가 역사의 영웅, 사회의 영웅에게 무엇을 기대하지는 한국 영화의 경향성을 통해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대중매체란 늘 사회의 무의식적 욕망을 반영하고 있다. 


*이 글은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강철비> 이토록 명확하고 자신 있는 영화라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