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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지 Jan 13. 2018

#71 <패터슨> 일상은 마법이 된다

일상성, 그 나른한 것을 살아가는 행복한 방법

일기를 매일 써야 한다고 했다. 언젠가 미래의 네가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할 것이고 그렇기에 너는 그것을 기록해야 한다고 했다. 열한 살 남짓의 나는 일기를 숙제로 내주던 선생님께 말했다. "별로 궁금하지 않을 것 같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니?" "오늘이랑 내일이랑 내일모레가 다 똑같을 거거든요. 오늘만 쓰면 내일과 내일모레는 쓰지 않아도 알 수 있어요." 잠시 나를 쳐다보던 선생님은 나에게 말했다. "일기 쓰기 싫다는 말을 참 논리적으로 하는구나." 사실 맞다. 일기 쓰기가 죽도록 싫었다. 그런데 내가 일기가 쓰기 싫은 이유는 내 인생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앨리스나 <해리포터> 속 해리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삶은 있는 둥 없는 둥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열한 살의 나의 내면은 은연중에 삶이 지루하다는 걸 깨달았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삶은 해리 같지 않았다. 일상을 견디기는 것이 힘들었다.


"삶의 풍경은 변하지 않아요. 나아지지 않아요. 나이를 먹으면서 일상의 반복은 더욱 나를 옥죄고, 결국 무엇을 해도 즐겁지 않을 거예요. 인생은 가진 것들을 잃어가는 시간이에요."


어린이든 성인이든 일상은 무섭다. 견디기 힘들다. 그렇기에 인생에 어떤 거창한 목표를 세우고자 하는 것일 텐데, 인생은 거창하지 않기에 그 괴리가 사람을 더 힘들게 한다. 일상을 행복하게 사는 법이 있을까?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걸음걸이, 표정을 볼때면, 행복한 일상 같은 건 영영 불가능해 보인다. 적어도 내 눈엔, 그 방도가 잘 보이지 않는다.


패터슨 시의 사람들도 매일 같은 삶을 산다.


영화 <패터슨>은 일주일간 패터슨 시에 사는 패터슨과, 그를 둘러싼 도시의 시민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영화는 그 일주일 간, 주말의 약간의 사건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같은 것들을 반복한다. 패터슨은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눈을 뜨고, 로라에게 키스를 한 후에 홀로 아침을 먹는다. 버스를 타면 일상을 불평하는 동료가 등장하고, 버스 안에서 사람들은 대화를 한다. 점심시간에는 시를 쓰고, 퇴근하면 로라와 저녁을 먹는다. 마빈과 산책을 가고, 잠시 펍에 들려 도니를 만난다. 패터슨뿐 아니라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동일한 삶을 산다. 패터슨 시의 사람들에게도 일상의 지난함은 비껴가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는 그것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패터슨 도시의 삶에 변하는 것이 거의 없어 보이지만 사실 그 속에 천천히, 변하는 무언가가 있다. 패터슨의 시다. 패터슨의 시는 아주 천천히, 발전하거나 또 새롭게 전개된다. 패터슨의 시가 의미하는 바는 그의 시가 그의 일상 속에서 전개된다는 점에서 더 명확해진다.  그의 시와 그가 사는 삶의 특별함은 맞물리는 데가 있다.일상을 특별하게 보고 시를 쓴다는 것, 그의 일상을 시를 통해 특별하게 만든다는 것. 자신이 사랑한 것들을 시에 담는다는 것, 삶을 그가 사랑하는 것들로 채워나가는 것. 그의 시가 그의 삶에 대단한 성공을 주고 있지 않음에도, 일상을 특별하게 만든다. 그건 결국 이루지 못할, 혹은 너무 많은 것을 잃어야만 이룰 수 있기에 결국 이루고 나면 허무해질, 거창한 인생의 목표를 세우는 삶보다 오히려 더 풍성하고 아름다운 삶의 풍경이다.


패터슨의 삶의 풍경은 두 가지 가능성을 품는다. 이 두 가지 가능성은 비단 패터슨뿐 아니라 영화 속 등장하는 패터슨 시의 사람들에게 대부분 해당된다.  


1. 무언가가 되지 않더라도, 무언가를 할 수 있다.


2. 모두가 그걸 알기에 서로의 존재를 상대가 추구하는 그 무언가로 바라본다.


패터슨은 등단한 시인이 아니었다. 스스로 등단하고 싶은 마음이 아주 없지는 않았겠지만 시인이 되기 위해 시를 쓰고 있지 않았다. 그는 시인이 되지 않아도 괜찮았다. 시는 시 그 자체로 그에게 행복이며, 그 행복을 일상 속에서 행할 수 있었기에 그걸로 만족했다. 패터슨 시에 있는 사람들은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무언가를 한다. 로라는 세계적인 컨트리 뮤지션이 되지 않아도 예쁜 기타를 사서 컨트리 느낌으로 연습한다. 그녀는 정말 유명한 컨트리 뮤지션이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다. 그러나 그녀는 무언가가 되기 위해 조급해하지 않는다. 한 남자는 세탁실에서 랩을 연습한다. 그는 그냥 어디든 생각나면 연습을 한다고 했다. 무언가가 되기 위해 시간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 랩을 한다. 그 행위를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그 행위를 하는 것의 필요충분조건이 된다.


패터슨 도시는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들로 가득한 사회이다.



영화 속에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애쓰는 사람은 오직 마리의 사랑을 갈구하는 에버렛뿐인데, 그는 또 유일하게 영화 속에서 실패를 경험하는 인물이다. (재밌게도 도니는 그가 '영화'처럼 살고 싶어 한다고 비웃는다. 그간 영화는 그 매혹적인 이야기들로 우리의 삶에 착시를 일으키고 있었는데, 그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준다. 영화가 말할 수 있는 삶의 모습은 사실 다른 것이라는 자무쉬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가 어떻게 그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극복했고 또 그 이후의 삶을 채워갈지 영화는 단언하지 않지만 그도 결국 마라가 사라진 일상의 빈 공간을 풍요롭게 채워나가지 않겠냐는 은근한 희망만이 감돈다.



"에밀리 디킨슨을 좋아하는 버스 기사 아저씨" 시인 소녀가, 감독이, 관객이 패터슨에게 불러주는 이름.


한편 대단한 성취를 하지 않더라도 패터슨은 시인이 되고, 로라는 가수가 된다는 걸 그들은 안다. 그렇기에 그들은 서로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로라는 패터슨의 시가 대단하는 걸 늘 강조한다. 그 시를 숨겨만 두지 말라며, 그를 독려한다. 패터슨은 그녀가 만드는 동그라미들이 아름답다고 말하고 대성공을 이루는 그녀의 컵케익 가게 이야기에 동참한다. 로라는 패터슨의 시가 아름답다고 믿었기에 패터슨의 시가 소멸했을 때 누구보다 진심으로 슬퍼했다. 무언가가 되지 않더라도 무언가를 할 수 있으며 그 행위가 가져오는 행복과 일상의 풍요를 그들은 알았다.


"진짜 시인을 만나서 반가웠어."
 "멋져요. 에밀리 디킨슨을 좋아하는 버스 기사 아저씨"

이는 낯선 10대 소녀와 패터슨이 만나는 순간에 더욱 도드라진다. 소녀가 자신이 쓴 시를 읊어주자 패터슨은 그녀에게 실제 시인을 만나서 반가웠다고 말한다. 그러자 소녀는 떠나며 그를 '에밀리 디킨슨을 좋아하는 아저씨'로 부른다. 그 두 대화가 감동적인 이유는, 서로를 각자 스스로가 추구하는 모습대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앞으로 정말 성공한 시인이 되느냐 아니냐 와는 무관하다. 무엇을 좋아하고, 좋아하는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걸 서로에게 축복하는 것. 서로를 마주한 그 마음이 가장 아름답게 느껴진다.



언젠가 벽에 새겨진 이런 말을 마주쳤다. "삶이 무의미하기에 인간은 그 자신만의 의미를 만든다." 스탠리 큐브릭의 말이었다. 그 말을 마주한 이후로 나는 허무한 인생의 그 빈 공간을 채우려고 미친 듯이 영화를 봤다. 나에게 영화는 그런 것이었다. 부조리해 보이는 삶을 풍요롭게 채우는 것. 좀 더 과장하자면, 영화 본연의 목적과 힘은 거기에 있다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패터슨>은 그 영화의 본질에 가장 맞닿아 있다. <패터슨>은 그 지난한 나의 일상을 마법으로 만들었다. 일상의 무게에 눌려 삶에 만연한 허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패터슨>은 가장 진솔하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대답을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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