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제국의 협량의 역사
오래전이긴 하지만 한동안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1492라는 숫자가 크게 적힌 티셔츠를 입은 젊은이들을 자주 본 적이 있다. 1492가 뭐지? 무슨 특별한 숫자인가? 아니면 무슨 의미라도 있는 걸까? 숫자에 둔감하고 패션 트렌드에 무식한 내가 1492는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패션 브랜드 이름이고, 또 1492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해라는 것을 안 것은 한참 후였다.
1492년은 서양 역사에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중세와 근세를 가르는 획기적인 해이다. 하지만 스페인 역사에서는 780년 동안 스페인을 지배하던 이슬람의 잔존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국토회복운동(Reqonquista)이 완성된 역사적인 해이기도 하다. 그래서 스페인 역사도 1492년 이전과 이후로 확연히 구분된다. 1492년 이전이 이슬람과 유대교와 가톨릭이 섞여 때로는 싸우면서도 피와 정열과 지혜를 나누던
상호공존시대(Convivencia), 즉 안달루시아 문화가 화려하게 꽃 피던 시대였다면, 1492년 이후는 유대인과 이슬람교도를 무수히 죽이거나 몰아내고 그 잘난 가톨릭의 순혈주의를 지켜온 오늘날까지의 골수 가톨릭 왕국 스페인의 역사이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멕시코의 아즈텍 제국과 페루의 잉카제국 등 남미 정복과정에서의 원주민 대학살과 착취는 말할 것도 없지만 1492년 이후 스페인의 협량의 역사는 결코 자랑스럽지 못했다. 신대륙에서 한때 쏟아져 들어온 막대한 부와 합스부르그 왕가와 정략결혼으로 유럽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의 영광(?)을 한동안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막대한 부를 종교전쟁과 화려한 교회 건축에 다 털어 넣고 국고가 몇 번이나 바닥나는 수모를 당하는가 하면, 유대인과 이슬람교도를 다 쫓아낸 덕분(?)으로 재정과 경제는 엉망이 돼 해골만 남은 거인으로 전락하지 않았던가?
1850년대의 독일 철학자 칼 크라우제는 이렇게 말했다. "스페인의 가톨릭이 스페인 국민들을 200년 동안이나 무지와 불신, 그리고 미신의 구렁텅이로 빠뜨렸다." 실제로 서유럽 국가들이 르네상스와 바로크시대를 거치면서 음악, 미술, 건축 등에서 화려한 문화의 꽃을 피우는 동안 스페인에서 이렇다 할 문화적인 성취가 있었던가? 투우와 화려한 가톨릭 교회당 외에는.
19세기 이후에는 유럽의 2류 국가로 전락하여 프랑스를 비롯한 열강의 밥이 되었고 20세기에는 스페인내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고 나라가 갈가리 찢어진 채 파시스트 독재자 프랑코에 의해 36년간 통치되어 왔다. 스페인은 프랑코가 죽은 1975년까지 유럽에서도 버려진 국가였고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후진국가였다. 나 역시 학창 시절 군사독재정권의 압제를 경험한 세대로서 스페인이라는 나라에 관심을 가져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스페인여행을 꿈꿔 본 적은 더구나 없었다.
얼마 전까지도 스페인은 내게 그런 나라였다. 그런데 그런 스페인이 많이 달라졌다. 지금은 정치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입헌민주국가를 표방하고 있고 경제적으로도 유럽의 주류에는 못 끼지만 그리스처럼 민폐를 끼칠 정도는 아니다. 한때 피와 황금과 억압으로 상징되던 나라가 지금은 눈부신 태양(Sol)과 정열의 나라, 가우디의 도시 바르셀로나, 그리고 안달루시아의 빛나는 이슬람의 문화유산 등을 내세워 관광객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오늘날 스페인은 놀랍게도 이탈리아를 제치고 유럽 최고의 관광대국이 되었다.
내가 다시 스페인을 생각하게 된 것은 타레가의 '알함브라의 추억'이나 사라자데의 '안달루시아 로망스' 등 스페인적 감성의 음악을 즐겨 듣기 시작해서 만은 아니다. 몇 해 전 다녀본 중남미 여행과 그와 관련된 책들, 오랜 만에 읽어 본 <돈키호테>, 두 번씩이나 읽게 된 워싱턴 어빙의 < 알함브라 이야기>, 그리고 최근에 재미있게 본 장편 TV 시리즈 <그라나다 진혼곡(Requiem por Granada)>등이 점점 안달루시아에 관한 나의 관심을 불러 일어켰다.
어빙이 이야기하던 알함브라궁전, 라흐만 1세가 지은 코르도바의 야자수 기둥의 그 유명한 메스퀴타(Mesquita), 어느 사진에서 본 중세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톨레도는 어떤 모습일까? 별로 할 일도 없는 나는 언젠가부터 슬그머니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했고 스페인 여행의 꿍심(?)을 은근히 품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아내가 스페인 여행에 바람을 넣지 않는가? 가우디의 도시 바르셀로나를 가 보고 싶다며.
언제는 돈 있어서 여행 갔나? 아직 다리 성할 때 가자하고. 젊은 시절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던 나라, 그런데 지금은 모두가 열망하는 나라 스페인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