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수많은 독재자들이 존재했다. 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각자의 말로를 맞이했다. 평생 호의호식하면서 천수를 누리는 경우도 있었고, 어떤 이는 암살이나 독살을 당하기도 했고, 일부는 권력을 잃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형태로든 독재자의 죽음은 필연적으로 기존 국가 체제의 전복과 사회 혼란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안토니우 살라자르의 죽음이 가져온 결과는 다른 독재자들과는 달랐다.
1970년, 마침내 살라자르가 노환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포르투갈의 총리 자리는 살라자르가 사망하기 전에 이미 까에따누에게 조용하게 이양된 상태였다. 따라서 살라자르 잔당의 권력 쟁탈 시도 같은 대혼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살라자르의 죽음은 까에따누의 지위를 확고히 하는 이벤트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을 거라고 단정짓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살라자르가 36년간 공고히 쌓아 올린 독재 체제는 아무나 따라 할 수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를 완벽히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포르투갈에 아무도 없을 것"이라던 살라자르의 단언이 어떤 면에서는 아주 틀린 말이 아니었다.
신임 총리 까에따누는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추어 국가경제 및 정부조직의 개혁을 시도하면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어느 정도는 수용하려 했다. 특히 포르투갈 남부 시느스 지역에 대규모 석유화학산업공단과 항만시설을 건설함으로써 그동안 많이 뒤처져 있었던 산업인프라 수준을 보완하고자 했다.
까에따누 정부가 건설한 해안도시 시느스의 석유화학공단
하지만, 경제개혁보다도 오랫동안 고착되어버린 권력구조를 변화시키는 쪽이 훨씬 더 어려웠다. 아메리쿠 토마스 대통령을 비롯한 기존의 고위 관료들은 민주화 세력에게 권력이 분산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결국 까에따누의 의회 정당 개편 시도는 무산되고 말았다.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에서도 까에따누 정부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1960년대 포르투갈 경제가 순조롭게 성장했던 비결은 살라자르의 탁월한 정책 덕택이라기보다는사실상 미국의 경제 지원(마셜 플랜) 덕분이었다. 하지만 살라자르가 산업화를 등한시한 결과, 마셜 플랜의 효과가 점점 줄어듬과 동시에 포르투갈은 다시 저성장의 늪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국방 예산 또한 줄어든 탓에 아프리카 식민지들에서 일어나는 반란의 진압이 연이어 실패했다.
2차 대전 이후 대부분의 제국들이 식민지를 독립시켰지만, 포르투갈은 1975년까지 아프리카 식민지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살라자르는 포르투갈이 농경국가로 유지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아프리카 식민지들이 금방 쉽게 독립하지 못할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필수적인 공업시설들을 모조리 본국이 아닌 아프리카에 건설해놓았는데, 그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실책이었다. 국가의 근간인 공업단지들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던 포르투갈은 2차 대전 종전 이후에도 다른 나라들처럼 해외 식민지를 독립시켜줄 수가 없었고, 독립세력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막대한 국방 예산을 지출했다. 살라자르가 집권 중이던 1961년부터 이미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앙골라 등지에서는 식민지 해방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고, 까에따누 정부가 들어서자 이들의 저항은 한층 더 거세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포르투갈의 국가 재정은 꽤 튼튼한 편이었다. 살라자르가 펼친 긴축 정책은 세금 지출을 틀어막았고, 2차 대전 당시 포르투갈이 직접 참전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면서 전쟁물자를 양측에 판매하며 벌어들인 외화가 미국의 마셜 플랜과 더불어 국가 경제를 넉넉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1970년대가 되자 경제적 호재들은 모두 사라졌고, 아프리카 식민지의 막대한 전쟁비용으로국고가 빠르게 소진되기 시작했다. 반란 진압에 강제로 동원된 젊은 군인들에 대한 처우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고, 제때 봉급을 주지 못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심지어 자금 문제의해결책이랍시고 내놓은게, 장교들더러 부잣집 딸들과 결혼하라고 제안하는 게 전부일 정도였다. 당연하게도 군인들의 엄청난 불만은 하늘을 찔렀다.
설상가상으로 1973년에 전 세계를 강타한 제1차 석유 파동은 포르투갈 경제에 결정타를 날렸다. 특히 시느스 지역에 새로 건설한 석유화학공업단지는 어마어마한 적자를 낳았다. 실업률은 날로 치솟았고, 국가 재정에는 큰 구멍이 뚫렸다. 국민의 지지를 잃은 까에따누의 독재정권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사상누각이 되어버렸다.
결국 이듬해인 1974년 4월 25일, 포르투갈 민주화의 물꼬를 튼 카네이션 혁명이 일어났다. 부당한 대우를 참지 못한 군부의 젊은 장교들이 주축이 되어 기존의 정부 인사들을 모조리 축출하였고, 이후 군인들이 정권을 독차지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민주정부에 주권을 이양하면서 혁명은 성공적으로 완수되었다. 군사적 충돌 없이 평화적으로 진행되었던 무혈 쿠데타로서, 이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희귀한 민주화 사례로 손꼽힌다.
혁명이 발발하던 날, 군인들은 시민들이 위험한 상황에 처할까봐 모두 집 안에 머물러 줄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민주화에 동조하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거리에 달려나와서 혁명에 가담한 군인들의 옷과 총에 카네이션을 꽂아주었다. 4월은 카네이션이 만개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날을 가리켜 '카네이션 혁명'이라 부르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그 날 아무도 피를 흘리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카네이션 혁명 당시에 정부군의 발포로 네 명의 시민들이 사망하고 45명이 부상당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전면적인 군사충돌로 확대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 큰 무고한 희생은 막을 수 있었다. 이로써 포르투갈의 민주화는 매우 신속하고 안전하게 이루어졌다. 축출당한 마르셀루 까에따누 총리는 모든 지위를 박탈당하고 포르투갈의 옛 식민지였던 브라질로 망명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1980년에 74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죽어서도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지금도 브라질 히우 지 자네이루의 한 묘역에 묻혀있다.
안토니우 살라자르가 진심으로 포르투갈의 안위와 발전을 위해 평생을 바쳐 헌신했다고 생각하는 포르투갈 국민들이 놀라우리만큼 많다. 다른 나라들이 급격한 산업화로 인한 각종 사회문제와 노사갈등, 어지러운 세계화의 물결에 휩쓸리는 동안, 포르투갈은 살라자르의 강박적인 농경화 정책 덕분에 그 혼란에서 한 발짝 벗어나서 비교적 평안하고 안정적으로 목가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다른 서유럽국가들이 이룬 경제성장의 결실을 짐짓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몇몇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은 살라자르가 결혼도 마다할 정도로 금욕적인 삶을 살면서 가톨릭 교회의 부흥을 이끌었다고도 평가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많이 다르다. 수 차례 불륜을 저지른 살라자르가 금욕주의자라니, 가당치도 않다.
살라자르 사후에 포르투갈 사회가 세속화되면서 많은 국민들이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가치를 많이 상실했다고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오늘날 포르투갈은 전반적으로 강한 진보 성향의 마인드를 가진 국가 중 하나로 손꼽힌다.
다른 이유는 차치하고서라도, 자기 자신이 직접 겪은 실질적인 삶의 변화 때문에 살라자르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다. 마셜 플랜이 한창 진행되었던 60년대에 해외자본의 유입으로 경제성장이 이뤄지면서 삶의 질 상승을 체감했었던 사람들이다. 당연히 그들 입장에서는 국가가 잘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형성된 콘크리트 지지층의 존재는 살라자르의 36년 장기집권을 유지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독재 체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주로 이런 데서 나온다. 나와 우리 가족이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었으면 됐지, 그런 훌륭한 나랏님이 통치를 좀 더 길게 하시겠다는 게 뭐가 문제냐는 논리다.
하지만언론이 철저히 통제된 사회에서 자유와 민주화를 갈망하던 사람들에게 살라자르의 존재는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36년의 독재기간 동안 비밀경찰에 의해 사망하거나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수는 공식적으로는 60여 명으로 집계된다. 당연히 비공식적으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박해 당해 죽거나 쫓겨나거나 사라졌다. 비밀경찰의 활동과 이웃의 감시 때문에 마음대로 숨쉬기조차 힘겨웠던 민주운동가, 언론인, 지식인, 그리고 양심을 가진 대다수의 국민들이 오랫동안 박탈당한 자유와 권리는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스페인 내전 중에 융단폭격당한 마을 게르니카를 그린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
옆 나라 스페인에서 '인간 백정'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일으킨 내전으로 목숨을 잃은 50만 명에 비하면 60명은 무척 적은 수로 느껴지기는 하지만, 단 한 명을 죽였건 백만 명을 죽였건, 또는 직접 죽였건 간접적으로 죽였건,살라자르가 살인자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결국 독재를 지지하는 사람은 남의 목숨이 희생될 때에 그 뒤에 숨어서 남의 피로 키워낸 달콤한 과실만을 따먹길 바라는 무임승차자일 뿐이다.
유신독재라는 강력한 리더십 하에 전 국민이 하나가 되어 경제성장을 이뤄낸 경험을 한 차례 맛본 바 있는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엘리트주의 정치체제는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는 강한 매력을 지닌 듯하다. 살라자르의 '친구'였던 아돌프 히틀러 치하에서도 나치 독일은 1차 대전에서 겪은 패전의 상처를 딛고 빠른 경제 회복을 이루면서 온 국민을 하나로 단합하여 단기간에 강대국을 만들었다.
반발하는 소수를 악마화하거나 희생시키면서 다수를 만족시킨다는 발상은 일견 편리하고 빠르고 합리적인 지름길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 말로가 어떠했는지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한국의 젊은 30대 여당대표였던 이 모씨의 행보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아보인다.
한 치 앞의 미래도 내다보지 못했던 살라자르가 추구했던 농경국가의 꿈은 허망한 결과만을 남겼다. 그가 오늘날의 포르투갈에 실질적으로 남긴 것들을 손꼽아보면, 서유럽 최저 수준의 저임금, 저물가, 저성장, 저출산, 높은 실업률, 빈약한 인프라, 서유럽 최빈국이라는 낙인, 그리고 500년 전 한때는 세계를 호령했지만 지금은 2등 국가로 전락했다는 자조와 함께 오늘날 포르투갈 국민들의 가슴속 깊숙이 남겨진 집단 열등의식이다.
정말이지 잔인하고도 혹독한 대가가 아닐 수 없다.진정 이 모든 게 겨우 살라자르 한 사람의 권력욕과 거기에 빌붙어먹던 몇몇 사람들의 욕심 때문에 한 국가의 국민 전체가 치르는 죄값으로서의 가치가 있을까? 독재의 향기는 달콤하지만, 그 열매는 너무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