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는 마흔셋의 나이에 포르투갈 총리직을 맡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가 여든 살이 될 때까지 계속 그 자리에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다.
길고도 길었던 36년간의 살라자르 시대의 종결은 어느 날 예기치 못한 사고와 함께 시작되었다.
1968년 8월 3일, 휴양지 에스토리우에서 휴가를 보내던 살라자르는 의자에 앉다가 넘어져 땅바닥에 머리를 강하게 부딪치는 사고를 당했다. 그 의자는 해먹처럼 나무에 천을 걸어놓는 형태의 휴양용 의자였는데, 그가 앉을 때 낡은 의자가 그만 균형을 잃고 뒤집어졌던 것이다. 그는 머리에 강한 충격을 받고 일시적으로 정신을 잃었지만, 금방 다시 일어나서 별일 아닌 듯이 평소처럼 활동했다.그러나 그 이후로 머리에서 계속 심상치 않은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며칠 후, 살라자르는 점점 심해지는 두통 때문에 주치의를 찾았고, 외상성 뇌출혈 진단을 받고서는 그 즉시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
살라자르가 낙상사고를 일으킨 의자는 이런 형태의 휴양용 의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극비 사항이었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방송과 언론을 통해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혹자는 그가 의자 때문에 넘어진 게 아니라 해먹에서 발을 헛디뎌 바닥에 떨어졌다고 말하기도 했고, 그의 이발사는 살라자르가 화장실에서 미끄러졌다고 상반되게 주장했다. 하지만 그건 사고를 제대로 목격한 사람이 사실상 아무도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좌우지간 그가 병상에 누워있는 사이를 틈타, 해군 제독 출신 대통령 아메리쿠 토마스를 비롯한 정부 고위 관료들은 비밀리에 비상 회의를 소집했다. 그들은 살라자르가 더 이상 직무를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그를 총리직에서 제명시키는 안건을 일사천리로 통과시켜버렸다. 일종의 의회 무혈 쿠데타였던 셈이다. 그렇게 살라자르는 홀로 병실에 입원한 채로, 평생 굳건하게 쥐고 있던 권력을 한순간에 허무하게 잃고 말았다. 36년 동안 굳건했던 살라자르 정권이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살라자르의 뒤를 이은 마르셀루 까에따누 총리(좌)와 당시 대통령 아메리쿠 토마스(우)
1968년 9월 27일, 국민투표 절차 없이 아메리쿠 토마스 대통령의 지명으로 마르셀루 까에따누가 포르투갈의 새로운 총리로 임명되었다. 살라자르가 병원에 입원한 지 약 한 달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까에따누는 살라자르 치하에서 각종 정부 요직을 두루 거쳤지만,2인자의 성장을 경계한 살라자르에 의해 정계에서 밀려나서 리스본 대학 총장을 지내기도 한 인물이었다. 당연히 살라자르와는 껄끄러운 관계였다. 까에따누가 총리 자리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살라자르가 알게 된다면, 어떤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지 모를 상황이었다. 하지만 수십여 년 동안 살라자르 치하에 있던 관료들은 마치 이런 상황을 예견이라도 했던 것처럼 완벽한 대비책을 완성해놓고 있었다.
이들은 살라자르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난리가 날 테지만, '계속 모른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그래서 신임 총리 까에따누 휘하의 관료들은 도무지 상식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계획을 세웠다. 바로 살라자르로 하여금 죽을 때까지 계속 자기가 총리라고 믿게 만든다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작전이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 같았지만, 놀랍게도 그것이 충분히 실제로 가능할 여건들이 모두 갖춰져 있었다.
첫째로, 살라자르는 평생토록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직계가족이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그의 관저조차도 36년간 독재를 했던 사람의 집 치고는 그렇게 크거나 사치스럽지 않았다. 보통 독재자들이 돈과 여자를 대놓고 밝히는 것과는 무척 대조되는 부분이다. 죽을 때까지 그에게는 배우자는 물론이고 사생아조차 없었다.
오늘날 살라자르를 찬양하는 일부 지지자들은 이것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가 '국가와 결혼'할 정도로 국정에 충실했던 증거라고 포장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지만...) 하지만 실제로는 살라자르에겐 젊어서부터 수많은 여성편력이 있었다. 심지어 그중 대다수는 불륜이었다. 그가 결혼을 하지 않았던 진짜 이유는 여자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게 되면 거의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각종 친인척 비리 스캔들이나 권력의 분산을 피하고 싶어서였다는 설이 유력하다.만약 그런 이유 때문에 결혼을 안 한 게 사실이라면,살라자르는 진정 순수한 권력욕의 화신이라고 불릴만하다.
살라자르에게 직계가족이 있었다면 그를 그렇게 오랫동안 완벽하게 속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곁에 가족이라고는 아무도 없었고, 거의 사십여년간 그의 집안일을 돌보며 시중을 들어준 마리아 드 제수스 여사라는 나이 든 가정부 한 명 밖에 없었다. 평생 살라자르는 그녀에게 이성으로서의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의 스캔들은 전혀 없었다.
일각에서는 마리아 여사가 남들이 안 보는 위치에서 살라자르를 남몰래 쥐었다 폈다 했던 비선 실세였을 거라고 추측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랬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무슨 생각에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늙고 병든 살라자르를 기만하기 위해 부하들이 2년 동안 벌인 진지한 연극에 마리아 여사는 끝까지 잘 협조했다. 결과적으로, 관료들이 꾸미는 사기극의 진실을 살라자르에게 실토할 만한 충성심을 가진 자가 살라자르의 주변에 단 한 명도 없었던 셈이다.
살라자르의 가정부였던 마리아 여사를 다룬 책
둘째, 처음부터 대중에게 자신을 드러내기를 꺼려했던 살라자르는 평소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언론에 공개하는 것 또한 극도로 싫어했다. 그래서 36년의 독재기간 동안에 기자회견이나 방송국 연설, 지방 순회 같은 외부 일정을 거의 하지 않고 평생 관저에 틀어박혀서 정무에만 골몰했다. 그래서 그가 몇 달 정도 자취를 감추더라도 포르투갈 국민들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셋째, 낙상사고로 유발된 뇌출혈은 까에따누에게 훨씬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주었다.살라자르는 퇴원한 뒤에도 거동이 불편해진 탓에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다. 건강 관리를 잘 해온 덕분에 80세의 고령이 될 때까지 변함없이 의욕적으로 국정을 운영해왔지만, 뇌출혈이라는 심각한 질환 앞에서는 그도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살라자르가 임기 초기에 증축해서 평생을 보낸 총리 관저. 오늘날에도 여전히 포르투갈 총리 관저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조건들을 고루 갖춘 살라자르를 속이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요양지와 관저에 머무는 그에게평소처럼 정무적인 안건과 보고서를 꾸준히 올리고, 나날이 신문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충분했다. 물론 모든 보고서와 신문들은 내용을 일부 수정하고 위조한 가짜 문서들이었다. 시간이 지나 살라자르의 건강이 약간 호전되어서 몇 차례 간단한 외부 일정을 가지기도 했는데, 그마저도 모두 정교하게 기획된 가짜 행사들이었다. 하지만 늙고 병든 살라자르는 그게 전부 가짜라는 것을 죽을 때까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결국 옆에서 보다 못한 가정부 마리아 여사가 그에게 이제 총리직을 내려놓고 여생을 편하게 보내는 게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레 말을 꺼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살라자르는 "포르투갈 국민 중에서 그 누구도 자기만큼 완벽하게 총리직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며 마리아 여사의 동정 어린 제안을 단칼에 거절해버렸다.
그저 하나의 추측일 뿐이지만, 어쩌면 살라자르는 그때 이미 자신이 더 이상 포르투갈의 총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기력이 쇠하고 병들었다고는 해도, 그처럼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데다 암살 위기까지 여러 차례 넘기면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련한 정치인이 자기 직속 부하들의 농간을 무려 2년 동안이나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었기에, 자신이 실권을 잃었음을 어느 순간 깨달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사람들이 자신을 총리처럼 대우해주고 있는 현실과 타협해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일평생 손에 쥐고 있던 최고지도자의 권력을 허무하게 잃어버린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기가 두려웠을 지도 모른다. 늙고 병든 몸으로 성공할 리가 없는 쿠데타를 구태여 일으키기보다는, 이제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삶이 끝날 때까지 아직 남아있는 한 줌의 가짜 권력과 명예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가짜 총리직을 수행한 지 거의 2년이 다 되어가던 1970년 7월 27일, 마침내 독재자 안토니우 살라자르는 세상을 떠났다.
당시 신문의 1면에 게재된 살라자르의 부고
이미 권력을 완전히 상실한 81세 노인의 장례식이 열렸을 때, 과연 그동안 독재 치하에서 고통받던 사람들이 그의 관짝에 돌을 던지러 모였을까? 그렇지 않았다.
그와 평생을 함께한 가정부 마리아 여사를 비롯한 어마어마한 인파가 눈물을 흘리며 살라자르의 장례 행렬을 따랐고, 그는 자신의 고향인 작은 시골 마을 비미에이루의 묘지에 자랑스럽게 안장되었다. 훗날 대한민국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했던 독재자 박정희의 장례식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통곡하며 추모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이상하게만 볼 일도 아니다.
오늘날 포르투갈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극과 극으로 나뉜다. 이는 거의 박정희의 공과 과에 대한 객관적 평가에 비견할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