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은 스페인과 더불어 대항해시대의 주역이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들이 선진국의 기틀을 닦는 데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로부터 시작된 제국주의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정작 이 두 나라는 오늘날 '서유럽 속의 동유럽'이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국력이 쇠퇴했다.
스페인은 오랜 내전을 겪으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지만, 이웃나라 포르투갈에서는 그와 전혀 다른 학자 출신의 독재자 살라자르가 독특한 방식으로 국가경제를 서서히 무너트렸다. 그의 악명은 다른 폭군들에 비해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지만, 살라자르의 행보도 여느 독재자 못지않게 지독하기 그지없었다. 오죽하면 포르투갈에서 3년간 살았었던 [해리포터 시리즈]의 작가 조앤 K. 롤링이 작중 어둠의 마법사 살라자르 슬리데린의 이름을 안토니우 살라자르에게서 따올 정도였다.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1889~1970)
살라자르는 다양한 학문을 두루 섭렵한 이력을 가졌다. 10대 청소년기에는 성직자의 길을 걷고자 가톨릭 신학교를 다녔던 독실한 소년이었지만, 스무 살이 되자 진로를 바꿔 코임브라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서른 살에는 같은 대학에서 사회경제학과 정치경제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다. 그러다가 1926년에 쿠데타를 일으킨 파시스트 군부 정권에서 그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함으로써 서른일곱 살의 나이로 정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하지만 겨우 2주 만에 스스로 장관직을 사임했는데, 그에게 맡겨진 재무장관의 권한이 지나치게 협소하다는 불만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2년 뒤에 오스카 카르모나 장군이 정권을 잡았고, 재차 그를 불러 재무장관 자리를 역임해달라고 요청했다. 살라자르는 이번에는 모든 정부부처의 예산집행과 지출을 담당할 권한을 요구했다. 이 당돌한 요구는 결국 받아들여졌는데, 이것이 신의 한 수였다. 살라자르는 재무장관으로 부임하자마자 세금 수입을 늘리고 정부 지출을 줄이는 동시에 임금을 동결시켜 국가재정을 짧은 시간 안에 건실하게 만들었다. 그 덕분에 이듬해인 1929년 미국에서 경제 대공황 사태가 벌어졌을 때에 포르투갈은 그 직격탄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경제가 급성장했다.
당시 포르투갈 언론은 군부 정권에 의해 철저하게 장악되어 있었다. 군부에서는 대중의 지지를 영합하기 위해 언론을 적극 이용했다. 살라자르를 포르투갈을 구한 영웅이자 구원자로 내세운 것이다. 심지어 미국과 유럽의 외신들마저도 대공황에 맞서서 슬기롭게 대처한 살라자르를 칭송하는 기사를 쓸 정도로, 그의 초기 경제정책은 실제로 꽤 성공적이었다. 그의 위세와 인기는 기존 군사정권의 실세들마저 압도해버릴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고, 마침내 1932년에 살라자르는 포르투갈 제2공화국의 총리, 즉 국가 최고권력자의 자리에 올랐다.
참고로 포르투갈은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정치권력을 막기 위해 대통령제가 가미된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다. 원래 취지는 총리와 대통령이 서로를 견제하게 만드는게 목적이었지만, 점차 그 명분은 희석되어버리고 모든 실질적인 권력은 총리가 쥐게 되었다. 그래서 포르투갈의 대통령은 오늘날까지도 외교 부문에만 권한이 한정된 명예직에 가깝다. 코임브라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던 살라자르 교수는 정계에 발을 디딘 지 겨우 6년 만에 국가수반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살라자르는 권력의 달콤한 맛에 중독되었다. 그는 포르투갈에 자기처럼 너무 똑똑한 사람들이 많으면 장기 집권을 하는데 방해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내각의 고위관료들을 비교적 어리석고 고분고분한 예스맨들로 교체하는 동시에, 전국적으로 우민화 정책을 강하게 추진했다. 여러 정황을 감안할때 그가 총리로 취임할 시점부터 이미 독재를 꿈꾸고 있었다는게 거의 확실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포르투갈 최고 명문 코임브라 대학의 경제학 교수 출신답게 그가 경제에 대해 아는게 너무 많았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총리직에 올랐던 1930년대는 전 세계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의 폭풍전야를 맞이하는 시대였고, 모든 나라들이 공업화에 집중하여 각종 공산품들을 생산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살라자르는 다른 나라에서 산업화 직후에 발생되는 각종 사회문제들, 예를 들면 사회계급 양극화, 지역 격차, 실업률 상승, 노사 갈등, 각계에서 일어나는 파업과 공산주의 운동의 확산 등을 경제학자의 시각으로 면밀히 살펴보았고, 보통 사람이라면 생각지도 못할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포르투갈은 산업화에서 탈피하여 농업국가로 회귀해야 한다!
경제발전을 이루려면 국가 차원에서 산업화를 강하게 추진해도 모자랄 판이었지만, 살라자르가 내린 결론은 시대를 역행하는 너무나 황당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살라자르의 목표는 부국발전이 아닌 장기집권이었다. 산업화를 막아버리면 각종 사회문제와 더불어 정권에 대한 불만까지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살라자르는 포르투갈을 농업국가로 회귀시킨다는 정책을 실제로 실행에 옮겼고, 성공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36년 동안 집권하면서 늙어 죽을 때까지 권력의 정점에 설 수 있었고, 그와 동시에 포르투갈의 국력은 꾸준하게 쇠퇴했다. 우리나라의 일제강점기 기간과 맞먹었던, 지긋지긋하게 길었던 독재정권의 시작이었다.
살라자르가 추진한 우민화 정책은 "3F"로 요약된다. 이른바 'Futebol(축구)', 'Fado(파두)', 'Fátima(파티마)'로 대표되는 [스포츠, 대중가요, 신비주의 종교]를 적극적으로 장려하여 국민의 관심을 정치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는 정책이다. 그로 인해 제조업과 인프라 사업에 투입되어야 할 공적 자금은 대부분 스포츠 산업,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가톨릭 교회로 빠져나가고 말았다. 이에 힘입어 정치 혐오 혹은 무관심을 조장하는 우민화가 빠르게 이루어졌고, 1980년대에 우리나라에서도 전두환의 제5공화국 정권이 이를 벤치마킹하여 3S(Sports, Screen, Sex) 정책의 기반으로 삼았다.
살라자르는 어렸을 때 성직자가 되기 위해 8년 동안 신학교를 다녔을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리고1917년에 포르투갈 파티마에서 일어난 성모 발현 사건이 널리 알려지면서 가톨릭에 대한 전국민적 관심이 높아진 것도 그에게는 호재였다. 성모 발현 기적을 기념하여 건설 중이던 파티마 대성당이 때마침 살라자르가 집권 중이던 1953년에 완공되자, 정부는 국민들에게 파티마 성지순례를 적극 홍보하며 장려했다. 당시 신비주의를 신봉하던 포르투갈 가톨릭 교회는 절묘하게 이해관계가 잘 맞아떨어진 독재정권으로부터 뜻밖의 수혜를 얻었다.
파티마는 원래 인구 1만 명에 불과한 조그만 시골 동네였지만, 오늘날 수십만 명의 순례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숙박시설을 갖춘 관광거점이 되었다. 참고로 파티마는 프랑스의 루르드, 멕시코의 과달루페와 함께 세계 3대 성모 발현지로 유명하다. 지난 2017년에는 성모 발현 100주년을 맞이하여 특별 기념 미사를 위해 프란치스코 교황을 비롯한 50만 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파티마 대성당 광장에 운집하기도 했다.
성모 발현 기념일인 5월 13일에는 매년 전 세계에서 온 가톨릭 신자들이 파티마 대성당을 순례한다.
3F 중 하나인 '파두'는 포르투갈 전통 가곡의 한 종류이다. 원래 구전으로 내려오던 음유시인들의 시에 구슬픈 가락을 붙여 흥얼거리는 노래였다가, 살라자르 시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퍼지기 시작했다. 서민들의 삶과 사랑에 대한 가사와 함께, 먼바다로 나간 뱃사람 남편을 기다리는 아낙네의 애달픈 심정과 애환을 담은 멜로디가 합쳐져 통속적인 가요로 발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파두가 서민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룬 노래임에도 정작 옛날부터 서민들 사이에서 구전되던 가사들은 독재정권의 검열을 피하지 못했다. 모든 파두 공연자들은 정식 라이선스를 정부로부터 발급받아야만 했고, 이를 통해 파두 공연의 형식, 내용, 복장, 장소마저도 모두 정부에 의해 관리받고 통제받아야만 했다.
살라자르 자신이 대학 교수 출신이었음에도, 고등학교나 대학교 등의 고등교육기관에 공적 투자를 거의 끊다시피 하여 의도적으로 전 국민이 고등교육을 접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다만 농촌에서도 일을 하려면 글을 읽고 쓸 줄은 알아야 된다고 생각해서 초등교육만은 전 국민이 모두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그의 집권 기간 동안 포르투갈의 문맹률이 3% 이하로 떨어지기도 했지만, 기초과학과 첨단기술의 발전은 현저하게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집권 막바지에 와서야 심각성을 깨닫고 뒤늦게 대학에도 투자를 늘렸지만, 경제성장의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살라자르 정권이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데에는 옆 나라 스페인보다 비교적 온건한 방식의 독재를 한 것도 한몫했다. 그는 다른 독재자들처럼 군인 출신도 아니었다. 스페인에서는 반대파를 잔인하게 축출하고 처형하여 '피의 도살자' 또는 '인간 백정'이라고 불리던 살인마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독재 하에서 내전을 겪으며 수십만 명이 비참하게 죽어나간 반면에, 살라자르의 포르투갈은 그에 비할 바가 되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이렇게 집권 스타일이 달랐어도 살라자르가 프랑코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건, 단순히 외교적인 이유에서뿐만 아니라 독재자들 사이에서만 향유할 수 있는 묘한 동질감이 있었던게 아닐까.
악명 높은 독재자 프랑코의 집권을 가장 먼저 공개적으로 지지한 살라자르. 둘의 사이는 무척 친밀했다.
국제 정세도 살라자르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살라자르 정권은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동안 공식적으로는 연합국과 추축국 사이에서 중립을 취하면서도, 은근히 연합국 측에 군사적 지원을 하는 실리적인 외교 정책을 폈다. 또한 처음부터 일관되게 반공주의 우파 노선을 택한 덕택에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암묵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살라자르는 굳이 자국의 지식인들을 대놓고 탄압하거나 대량학살 같은 짓을 벌여서 국제 여론을 악화시키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민들을 감시하는 비밀경찰이나 고문치사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그는 총리직에 오른 바로 이듬해인 1933년에 나치 독일의 게슈타포와 비슷한 사복경찰단을 창설했으며, 여타 독재 국가들과 별로 다를게 없는 악랄한 언론 탄압과 시민 감시 체제를 이어갔다. 그로 인해 억압 당하던 시민들이 조직한 정권 전복 시도가 36년 동안 수십여 차례 있었지만, 전부 실패하고 말았다.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된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바로 그 숨막히던 독재 시절을 살아가던 사람들의 아픔을 다루고 있다. 앞장서서 살라자르 정권을 옹호하던 독재의 앞잡이도, 그들에게 탄압받고 상처 입던 평범한 시민들도 모두 살라자르 한 사람의 권력욕이 빚어낸 비극의 희생자들이었음을 보여준다.
독재가 훼손한 인간의 존엄성과 무너진 사랑에 관한 슬픈 이야기, [리스본행 야간열차]
살라자르의 집권이 무려 30년 넘게 지속되면서, 대부분의 국민들은 점차 농경화되는 사회에 익숙해지며 자연스레 귀농을 선택했다. 제조업의 퇴보로 국가재정은 연일 악화되어갔지만, 살라자르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중립을 지키면서 양측에 전쟁물자를 수출하여 얻은 막대한 수익금이 있었고, 종전 이후 마셜 플랜을 통해 미국에게서 받은 경제지원금도 있었다. 또한 앙골라와 모잠비크 등의 아프리카 식민지를 꾸준히 착취했기 때문에, 살라자르는 국가 농경화 정책을 계속 추진할 수 있었다.
독재체제에 불만을 가진 청년들과 지식인들마저도, 점차 국력을 상실해가는 조국에 미련을 두지 않고 대부분 해외로 망명하거나 이민을 떠났다. 심지어 2차 대전 이후 포르투갈의 가장 큰 수출품은 포트와인도, 코르크도 아닌 바로 포르투갈인이었다는 자조적인 한탄까지 나올 정도였다. 청년들이 자유와 일자리를 찾아 대거 해외로 떠나버린 포르투갈은 살라자르 정권이 종식된지 5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유럽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을 가진 초고령화 사회가 되고 말았다.
살라자르의 장기 집권 플랜은 그의 계획대로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36년간의 길고 긴 독재를 종결시킨 건 다름 아닌 살라자르 본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