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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정 Jul 29. 2024

물의 흐름: 유동성과 건축

바슐라르의 해석학적 현상학 이해하기

물의 유동성이라는 주제를 논의하기에 앞서 바슐라르의 철학에 관한 대화를 먼저 나눠볼까 합니다. 해석학적 현상학 분야에서 마르틴 하이데거와 장 폴 사르트르가 중요한 두 인물로 언급되곤 합니다(Spiegelberg, 1978). 해석학적 현상학은 외적 대상의 감각을 통해 축적한 감각자료로서의 경험과 구분되는 체험(lived experience)에 대한 생생한 설명(현상학)과 그 의미에 대한 성찰적 해석(해석학)을 결합한 이론, 성찰 및 실천의 조합입니다. 연구 방법론으로서의 해석학적 현상학은, 개인의 삶의 세계에서 선택된 현상의 경험에 대해 풍부한 설명을 조직적으로 생성해내는 것을 목표로 하며, 이러한 설명이 다른 사람의 집단적 경험과 연결될 수 있도록 합니다(Godden & Kutsyuruba, 2023). 하이데거는 “현존재(Dasein)” 논의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장 폴 사르트르는 질료의 정신분석적 작업으로 해석학적 현상학 분야에 혁신을 일으킨 철학자 중 한 명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바슐라르는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 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으나, 사실 장 폴 사르트르 철학의 바탕에는 바슐라르가 있습니다(Rizo-Patron, 2017).


상상과 질료, 흐름의 불연속성

바슐라르의 저서 ‘불의 정신분석’(1938)과 ‘물과 꿈’(1942)에 나타난 질료에 관한 그의 초기 철학은 현상학적 묘사만으로는 충분히 분석할 수 없는 인간 체험의 심오한 구조와 의미를 이해하려 했다는 점에서 사르트르에 앞섭니다. 바슐라르는 그러한 시도에 ‘상상’이라는 방법론을 통하여 감각의 표면 그 아래에 존재하는 현상에 성찰, 통찰적으로 접근하고자 합니다. 바슐라르의 ‘상상’ 혹은 ‘시적 몽상’은 현실적이지 못하거나 실현될 가망이 없는 것을 막연히 그리어 본다는 의미의 ‘공상’과는 구별됩니다. 바슐라르의 상상은 명상적으로 사고하는 상태로서 대상에 대한 의식을 증폭시키고 통찰력을 더욱 날카롭게 합니다. 그리하여 영혼을 담금질하고 명상적 의식 상태 가운데 집중함으로써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질료의 가치를 드러내고 신비로움으로 가득찬 이미지들이 다채로운 모습으로 변용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제 바슐라르의 질료 개념을 살펴보겠습니다. 바슐라르가 연구에서 깊이 관심을 가졌던 부분은 상상의 대상이 되는 사물의 물질성입니다. 이것은 이미지를 제공하는 사물을 형태에 집중하여 살펴보는 것이 아닌 그것을 이루는 질료로서 파악하는 사물과 현상을 해석하는 방식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바슐라르는 사물의 형태는 질료가 특정 방식으로 굳어진 모습을 하고 있지만, 질료 그 자체는 특정 형태나 이미지에 갇혀 있지 않다는 점, 고착화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바슐라르에게 질료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존재 이전의 가능성, 유동적이고 추상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성은 곧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 생성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바슐라르는 사물의 형태는 질료가 만들어낸 산물이며, 형태를 결정짓는 사물의 본질이 질료라고 평가했습니다.

바슐라르에게 질료는 존재의 ‘리듬’과 관계합니다. 바슐라르에 따르면 질료는 ‘존재의 리듬-습관(rhythm-habits of being)’인데, 즉 존재가 가지고 있는 일정한 패턴이나 움직임의 반복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은 바슐라르의 사고 방식 내 존재하는 ‘단위’들 그 기저에 자연스럽게 불연속성을 내포합니다. 여기서 ‘흐름’에 대한 바슐라르 철학의 특징이 드러납니다.

액체 외에 흐름을 대표하는 또다른 개념, ‘시간’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바슐라르가 리듬의 개념을 본격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한 것은 ‘순간의 직관(L'Intuition de l'instant, 1932)’과 ‘지속의 변증법(La Dialectique de la durée, 1936)’에서부터입니다. 그는 이 두 저서에서 베르그손이 주장하는 방해 받지 않는 흐름으로서 시간의 연속성과 지속의 개념을 비판하며 시간의 불연속성을 주장합니다. 바슐라르는 시간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베르그손의 ‘시간의 연속성’ 개념을 극복하는 ‘단절된 시간’ 개념을 제시합니다. 단절된 시간 개념의 핵심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시간이 아니라 감정의 차원이 개입된 주관적 시간 개념입니다. 바슐라르는 시간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의뿐만 아니라 존재론적 차원의 ‘체험된 시간(temps vécu)’ 개념도 제시합니다.

베르그손과 바슐라르의 시간 개념에 대한 대립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베르그손은 시간이 지속이라는 절대적 내용을 가진 견고한 개념이며, 그 안에 존재하는 순간들은 인위적인 구분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반면 바슐라르는 시간이 비연속적이며, 서로 단절된 순간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봅니다. 단순히 시간의 정의에 대한 상반된 견해로 보이는 이 대립은 사실 더 근본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베르그손은 시간을 변형이 불가능한 절대적 개념으로 여기지만, 바슐라르는 변형과 측정이 자의적인 물리적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점입니다.

바슐라르의 시간 개념이 베르그손과 다른 출발점을 갖는 이유는 그가 제시하는 ‘단절된 순간’ 개념이 단순한 형이상학적 전제가 아니라 현대 물리학 이론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슐라르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의 기본 원리인 시간-공간 개념을 도입하면서 상대적 ‘단절된 순간’ 개념을 주장합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베르그손이 시간의 근본 원리로 생각하는 지속의 개념은 고정되고 불변하는 절대적 사실이 아니라 언제든지 변형 가능한 물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슐라르가 주장하는 단절된 불연속적인 순간들의 집합으로서의 시간은 이러한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적 근거를 따릅니다.

그러나 바슐라르의 시간 개념은 단순히 아인슈타인의 물리적 시간 개념을 무비판적으로 차용한 것은 아닙니다. 불연속적인 순간이라는 시간 개념은 물리적으로 증명되지 않으며, 불연속적 순간에 있어서도 그 순간을 구성하는 또 다른 최소 단위를 전제로 합니다. 이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성이론은 거시물리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고전 물리학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즉, 아인슈타인은 시간-공간 개념에서도 여전히 지속의 개념을 고정된 연속성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불연속적 구조를 가지고 있고 각 순간이 간격을 가지고 있더라도, 더욱 미세한 세계로 들어가면 그 순간들도 고정된 지속의 모습을 하게 될 것입니다.

바슐라르는 이러한 모순에 대한 해결책을 양자 물리학에서 찾습니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에 양자역학의 기본 개념인 운동과 변화를 받아들입니다. 양자 물리학에서는 물질의 특성을 고정된 입자나 절대적인 불변 요소로 보지 않고, 운동과 그 결과인 파동에서 찾습니다. 바슐라르는 시간을 포함한 물질의 운동과 파동을 전제하면서도 이들의 움직임이 무작위적이 아니라 규칙적인 리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단절된 순간들이 상호작용에 의한 ‘리듬’을 가지며, 이 리듬에 의해 연속적인 시간으로 체험된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체험된 시간(temps vécu)은 필연적으로 상대적일수 밖에 없고, 개인의 감정이 개입된 주관적 시간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시간 이해 가운데 삶이란 몸, 역사, 인지된 세계 속에서 개인의 체험이 만들어지고, 또 그것의 뼈대, 조직이 다른 체험들로 파열되고 끊어지다 또다른 리듬의 습관들로 다시 엮이는 과정의 이어짐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리듬으로 설명하는 질료란, 맥동하는 상대적, 주관적 시간을 구성하는 구조 혹은 뼈대로서, 의식적이고도 멈춰 있지 않는 인간 존재의 흐름, 삶 가운데, 생명의 투사, 인간적 욕망과 가치들의 의도적 축을 따라 인지되고 깨달아지는 순간들에서 창조할 수도, 파괴할 수도 있는, 가능성의 약속입니다. 형성과 동시에 퇴락하기 시작하지만, 인간적 체험과 손길을 만나면 언제든지 새롭게 태어나고 변화할 수 있는, 리듬 있는 결정화의 과정, 열림과 생성의 유동적 상태로 존재합니다.


되짚어보기 혹은 돌아가기 - 질료를 따라가는 상상의 회귀법

바슐라르는 질료가 형상을 만드는 과정을 창조로 보았으며, 이렇게 사물의 물질성에 주목하여 만들어지는 이미지를 '질료적 이미지'라고 불렀습니다. 바슐라르가 말하는 질료적 이미지는 객체와 주체의 상상력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이미지로, 대상의 형상이 아닌 사물의 질료적 특성을 파악하여 상상력을 통해 변형시킨 결과입니다. 사물의 형상을 이루는 질료로 돌아가 상상하는 과정은 지나간 일을 되돌아보거나 살피는 일을 의미하는 성찰과는 다릅니다. 질료적 상상은 창조로 나아가기 위한 되돌아감입니다. 사물의 본질로 돌아가 “존재의 밑바닥을 파고드는 힘”(p.7)을 가진 “회귀”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형상들의 상상 저 아래에서 실체들의 상상이 열리는 것”(p.15)을 느끼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사물의 질료성은 주체가 만들어낼 창조적 이미지의 재료가 됩니다. 형상에 국한되지 않고 질료성을 파악하고 변형하면 더 자유로운 이미지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주체의 적극적 개입을 바슐라르는 ‘참여’(p.14)라고 했습니다. 이미 존재해 오던 방식에 따르는 재현적 지식으로서가 아닌, 주체의 상당한 상상을 통해 끊어지고, 파괴되며, 해방되어 태어나는 이미지들입니다.

질료적 상상은 기존에 존재하던 이미지, 기존에 존재하던 앎의 체계에 “의도적인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그에  “대응”하여 도달하기에 “해석학적”이기도 합니다. 해석학이라는 것이 이미 존재하는 텍스트를 새롭게 읽어 현재에 지혜를 줄 수 있는 의미를 도출하는 것으로, 기존의 것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 그러합니다.

상상 혹은 시적 몽상의 의식에서는 질료가 형상보다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창조의 과정은 형태를 미리 규정하는 틀이 없으며, 질료의 독자적인 생산입니다. 따라서 대상이 가지는 질료는 대상의 잠재적 특성으로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잠재적 특성은 상상력과 만나 이미지가 자유롭게 발생하는 계기가 됩니다.


물의 흐름: 유동성에 대한 질료적, 해석학적 이해

유동성은 액체와 같이 흘러 움직일 수 있는 성질을 의미합니다. 유동성은 물리적 의미와 상징적 의미,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 물의 흐르는 특성은 도시와 건축에서 물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근본적인 계기가 됩니다. 물은 도시와 건축에서 적절하게 통제해야 할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는 물 없이는 살 수 없지만, 건물 내부에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물이 새거나 흘러서는 안 됩니다. 홍수나 침수로 도시 공간이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됩니다. 철저한 배수와 방수가 필요하지만, 물을 적절하게 공급하여 화장실, 욕실, 조리공간, 정원 등 물이 필요한 공간에 물을 흐르게 하면 삶의 질이 크게 향상됩니다. 물길을 잘 관리하고 저수지와 상하수도 시설을 체계화하면 도시 공간은 안전하고 쾌적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선사시대 유적에서도 주거환경에서 물을 통제하려는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더 넓은 범위에서 바라보자면 역사적으로 문명이 세워지고 도시와 농경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수자원의 지속적인 운용 능력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중해 환경의 기후처럼 뜨겁고 건조한 환경에서는 물을 잘 관리하는 것이란 좀 더 편안하고 안정적인 생존을 의미했습니다. 이에 고대 그리스인들은 물을 모으고 저장, 운반하기 위해 고급 수자원 관리 기술을 개발하는 데 힘썼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수자원 관리는 초기 미노아시대(기원전 3500년-2150년경)에 시작했습니다. 이 기간에 최초의 우물, 빗물 저장소, 분수가 등장했습니다(Angelakis et al. 2013, 2016). 이러한 기술들은 기원전 2900년-2300년경부터 상용됩니다. 수자원 관리는 건물, 지역, 도시, 국가 등 여러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을 텐데, 여기서는 건물로 물을 끌어들이고 담아 저장, 관리하는 기술에 좀 더 집중하면서 살펴보겠습니다.


미노아 인들의 빗물저장 및 분배 시스템

미노아 인들은 고대 그리스의 크레타 섬에서 위대한 청동기 문명을 꽃피웠습니다. 미노아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의 고전기, 혹은 헬레니즘 시대의 도시들보다 1,000년 이상 앞서 빗물을 모으고 저장하는 시스템을 활용했습니다. 물은 수처에서 테라코타로 만들어진 관을 통해 수 킬로미터 이상을 걸쳐 운반되었습니다.

미노아 인들은 “궁전”이라고 불리는 다층 건물을 건설했습니다. “크노소스 궁전”이라고 부르는 이 건물에는 중정과 슬라이딩 도어, 외부 계단과 같은 특징들이 있고, 대부분 석재가 쓰였지만 부분적으로 목재가 보강재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궁전이라기보다 실제로는 올리브 오일, 와인, 곡물 등 대량의 생산품을 분배하는 곳에 가까웠습니다.)

크노소스 궁전의 수도 시스템은 크레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놀라운 기술력을 보여줍니다. 테라코타 관을 통한 가장 복잡한 수자원 관리 시스템 중 하나가 크노소스 궁전에서 발견되는데요. 청동기시대 기술력의 절정을 보여주는 이 궁전에는 적어도 세 개의 개별 수도 관리시스템이 존재합니다. 공급수로, 빗물 배수로, 오폐수로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렇게 물을 관리하면 여러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먼저, 기후 상황에 관계없이 안정적으로 물을 일상에서 활용할 수 있습니다. 한 방울 한 방울 모은 물을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선행 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물길을 내는 것입니다. 오늘날 물은 어디에서나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원래부터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는 사람이 만든 시스템 덕분입니다. 물을 활용한 건축이 가능해지기 전에, 먼저 물을 활용하기 위한 시설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만든 물길: 고대 로마의 송수로 시스템

고대 로마의 송수로 시스템은 지하수를 활용한 인류 문명사의 초기 사례 중 하나입니다. 일부는 지표수를 통해 공급되었지만, 대부분의 수원은 샘물이었으며, 지하수 유량을 늘리기 위해 터널을 통해 보강되었습니다. 여행이나 역사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고대 7대 불가사의(Seven Wonders of the Ancient World)'라는 용어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의 "미쉐린 가이드"나 "00 선정 몇 대 핫플"처럼 순위를 매기거나 선정하는 것의 원조 격입니다. '고대 7대 불가사의'라는 용어는 그리스 역사철학자 디오도로스 시큘루스(Diodorus Siculus)가 기원전 1세기에 처음 언급했습니다. 원래는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이라는 의미를 담은 "반드시 봐야 할 것들(Things to be seen)"이라는 표현이었지만, 후대 역사학자들이 '고대 7대 불가사의'로 정착시켰습니다.

고대 로마의 송수로 시스템은 지하수를 활용한 인류 문명사의 초기 사례 중 하나입니다. 대부분의 수원은 샘물이었으며, 지하수 유량을 늘리기 위해 터널을 통해 보강되었습니다. 이 시스템은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물 공급을 통해 도시 생활의 질을 크게 향상시켰습니다. '고대 7대 불가사의(Seven Wonders of the Ancient World)'는 그리스 역사철학자 디오도로스 시큘루스(Diodorus Siculus)가 기원전 1세기에 처음 언급한 개념으로, 후대에 '고대 7대 불가사의'로 정착되었습니다. 이 목록에는 이집트의 쿠푸왕 피라미드,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바빌론의 공중 정원,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과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레움,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 그리고 로도스 섬의 거대한 청동상이 포함됩니다. 많은 학자들은 만약 이 선정 시기가 100-200년 늦어졌다면 로마의 송수로 시스템이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박물학자인 대(大) 플리니우스(Pliny the Elder)는 그의 저서 <<자연사>>에서 로마의 송수로를 "비교할 데 없이 비상"하다고 극찬했습니다. 그리스의 수사학자이자 역사가 헬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소스(Dionysius of Halicarnassus)도 로마의 송수로 시스템을 "로마에서 가장 웅장한 세 가지 중 하나"로 평가했습니다. 로마의 송수로 시스템은 국가의 막대한 비용으로 건설되었고, 이를 통해 로마인들의 생활 편의를 극대화했습니다. 그리스 지리학자이자 역사가 스트라보(Strabo)는 "수로에서 공급되는 물이 풍부하여 마치 도시와 하수도를 흐르는 강과 같으며, 거의 모든 집에 송수관과 분수가 갖추어져 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몰락과 패배의 역사(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의 저자로 유명한 에드워드 기본(Edward Gibbon) 또한 로마의 수로를 "사업의 대담함, 실행의 견고함, 그리고 그것이 제공하는 활용도"라는 측면에서 "로마의 천재성과 권력을 드러내는 가장 웅장한 기념물 중 하나"로 묘사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고대 로마의 수로 시스템을 능가하는 급수 시스템은 건설되지 않았습니다.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프리카 원정 당시 파노에 바실리카를 세웠고, 기원전 33년부터 <<건축십서(De Architectura)>>를 저술하여 아우구스투스에 헌정했습니다. <<건축십서>>는 현존하는 고대 유일의 건축서적으로,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 출판되고 있습니다. 이 책에는 로마 수로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어, 당시의 삶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필요와 즐거움을 위한 물길

물은 로마 문화에서 매우 중요했습니다.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물이 모든 실용적 필요를 충족시키며 "모든 것이 물의 힘에 의존한다"고 말했습니다. 로마인들은 물을 즐길 줄 알았고, 목욕과 장식용 분수를 통해 물의 즐거움을 찾았습니다. 수로를 통해 풍부하게 물을 공급할 수 있게 되면서 로마는 크게 성장하고 번영할 수 있었습니다. 약 5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고대 로마에는 11개의 수로가 건설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건설된 수로는 감찰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가 기원전 312년에 세운 '아쿠아 아피아(Aqua Appia)'입니다. 공화정 시대에는 '안이오 베투스'(Anio Vetus, 기원전 272년-기원전 269년), '아쿠아 마르치아'(Aqua Marcia, 기원전 144년-기원전 140년), 그리고 '아쿠아 테푸라'(Aqua Tepula, 기원전 126년-기원전 125년)가 추가로 건설되었습니다.

기원전 1세기에는 로마의 정치적 혼란으로 수로 건설이 주춤했습니다. 이 시기는 로마의 지배를 받던 이탈리아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유력한 장군들이 권력을 잡고 삼두정치의 시대가 열렸던 때입니다.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크라수스가 로마를 분할해 다스리며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겪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 동안 대부분의 수로는 방치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가 등장하면서 혼란의 시기가 종식되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로마의 평화시대를 이끈 아우구스투스는 고대 로마의 초대 황제로서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입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격파함으로써 정권을 확보했습니다. 그의 통치 아래 수로가 새롭게 건설되기 시작했습니다.

제정 시대 초기, 마르쿠스 아그리파의 감독 아래 '아쿠아 율리아(Aqua Julia, 기원전 33년)', '아쿠아 비르고(Aqua Virgo, 기원전 19년)', '아쿠아 알시에티나(Aqua Alsietina, 기원전 2년)' 등의 수로가 건설되었습니다. 프론티누스에 따르면, 아그리파는 또한 "망가져버린 아쿠아 아피아, 안이오 베투스, 아쿠아 마르치아를 재건하고" 도시에 다수의 장식용 분수를 공급했습니다.

프론티누스는 수원에 따른 물의 특징에 대해서도 기술했습니다. 예를 들어, 아쿠아 알시에티나의 물은 샘이 아니라 호수에서 왔으며, "건강에 해롭다"고 적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생수를 잘 마시지 않았고, 아쿠아 알시에티나의 물은 주로 정원이나 모의 해상 전투인 나우마키아에 사용되었습니다.

기원후 52년, 황제 클라우디우스(기원전 10년-기원후 54년)는 이전 황제 칼리구라(AD 12년 ~ 41년)가 시작한 '안이오 노부스(Anio Novus)'와 '아쿠아 클라우디아(Aqua Claudia)를 완공합니다. 안이오 노부스의 물의 경우, 안이오 베투스(Anio Vetus)와 마찬가지로 안이오 강에서 공급되었습니다. 안이오 노부스 물은 침전조 탱크가 설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강우가 많을 때마다 탁한 상태로 로마에 도달”했습니다.(Ibid. p.19) 반면, 아쿠아 클라우디아의 물은 샘물인데, 프론티누스의 기록에 따르면 매우 맑았다고 합니다.

'아쿠아 트라이아나(Aqua Traiana)'는 트라야누스(기원후 53년-117년)의 통치 시기인 기원후 109년에 시작됩니다. 고대 로마의 11개 수로 중 마지막인 '아쿠아 알렉산드리나(Aqua Alexandrina)'는 기원후 226년에 건설되었습니다.

송수로 시스템이 점차적으로 확대되며 로마 곳곳으로 물이 공급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습니다만 사실 고대 로마의 평범한 시민들 모두가 혜택을 받았는지에 관해서는 전적으로 확실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우물과 저수지가 주요 수원이었습니다.

확실히 로마인들은 우물도 잘 팠던 것으로 보입니다. 과거 로마 요새였던 독일 튀링겐주에 속한 도시 잘부르크-에베르스도르프(Saalburg-Ebersdorf)에서는 99개의 우물이 발견되었으니까요. 지금의 북이탈리아·프랑스·벨기에 등을 포함하는 고대 켈트 사람들의 땅 갈리아(Gaul) 지역에서는 로마인들이 점령했을 당시에 판 것으로 보이는, 깊이가 80m에 달하는 우물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Wilson, Op. cit. p.286). 로마의 단독 혹은 집합주택 건물에는 보통 우물이나 저수지가 있었고, 공공 우물 또한 도시 곳곳에 있었습니다(Hodge, Op. cit. p.57).

한편, 물이 생활에서 필수인 것은 사실이나 음료로서는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고대세계에서는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물을 구하는 게 쉽지 않았기에 많은 사람들이 대신 알코올음료를 많이 섭취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Vallee, 1998). “맥주와 와인은 병원균으로부터 자유로웠다”는 것입니다(Ibid. p.81). 와인의 경우, 마시기 전에 항상 물로 희석하여 농도를 옅게 만들기는 했지만요. 그런 반면, 고대 로마인 상당수가 정기적으로 알코올음료를 구입할 경제적 여유가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플루타르코스는 감찰관 카토(Cato)가 군무 중이었을 때 “보통 물을 마셨다”며, 기력이 없을 경우에만 와인을 소량으로 섭취했다고 전합니다.

물 없는 삶. 상상하기 힘듭니다.

이처럼 로마의 수력공학은 로마를 키운 힘이며 당대인들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과하게 오해하면 안 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Deming, 2000). 오늘날 일부에서는 현대 수력공학과 위생 기술 분야의 성과와 로마의 시스템을 동등시하려는 경향이 있으나, 이는 지나친 평가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로마인들의 업적이 어떻든 간에, 건강과 위생의 현대 기준으로 보자면 상당히 미치지 못한 면이 있습니다. 여기의 삶과 거기의 삶이 같을 수 없을 거예요. 고대 로마의 기술력이 대단했지만 그때의 삶은 현대와 매우 달랐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물의 유동성과 건축적 형태 및 공간 구성의 다이나믹

다시 바슐라르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질료적 상상은 근본적으로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질료로 돌아감으로써 우리는 “표면적인 이미지들 아래에 점점 더 깊어지고, 점점 더 달라붙는 일련의 이미지들이 있음”(p.15)을 관조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질료가 가진 창조의 가능성을 무한하게 새로운 형상으로 불러일으키는 과정에서,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존재의 실체를 끊임없이 변모시키는 하나의 본질적 운명”이라는 유동적 특성을 가집니다.

바슐라르는 이미 만들어진 것보다는 변화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유연하고 움직이며 거의 흐르는 것 같아서 항상 직관의 변화하는 형태에 맞출 준비가 된 표상들’을 발견하며 이를 유동적 개념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오늘날의 건축은 전통적 논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공간의 개념을 받아들이며, ‘고정적이지 않은’, ‘움직이는’, ‘영원성에 무관심한’ 등의 특징을 가지고 가설적인 일시성으로 표현됩니다. 또한, 공간은 사람들이 마주하는 장소를 넘어서 ‘지각한 것, 지각하는 것, 지각하리라 기대하는 것’의 복합체로 의미를 갖습니다.

결과적으로, 유동적 공간은 먼저 부유하거나 흐르는 것 같은 공간을 지각하여 액체가 흐르는 듯한 형태나 시각적 착시를 통해 유동적 특성을 경험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공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공간이나 공간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움직임과 시각적 대상의 움직임을 통해 가변적이고 일시적인 공간의 유동성을 부여하고, 움직임의 요소가 없는 대상이라도 관찰자의 움직임과 시점의 변화에 따라 지각이 변하거나, 형태상의 내·외부 상호작용을 통해 역동성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유동적 공간은 다목적 공간 구성을 가능하게 하며, 내·외부의 상호작용으로 관계 형성에 중점을 두거나, 공간의 대비와 빛을 통한 다양한 감각을 제공하여 변화하는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건축에서 유동성 개념은 현대에 새롭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17세기 바로크 시대 건축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Francesco Borromini, 1599­-1667)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 성당(San Carlo alle Quattro Fontane, 1662­-1667)의 파사드를 물결치는 형태로 표현했습니다. 18세기에는 이러한 운동감을 더욱 발전시켜 공간을 연결하고, 움직이고, 상호작용하는 형태로 표현하였습니다.

20세기 초, 수학자 헤르만 민코프스키(Hermann Minkowski, 1864­-1909)는 4차원 세계의 개념을 통해 공간과 시간이 분리할 수 없는 연속체로 작용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시점의 이동과 복수화에 따라 공간에 시간성을 도입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건축평론가 샌포드 퀸터(Sanford Kwinter, 1955­)는 “실제로 우리의 지구와 건축을 위한 대지로서의 지각표면 자체는 고체가 아니라 유동성의 반고체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며 유동적 관점을 제시했습니다.

유동적 공간은 부유하거나 흐르는 것 같은 공간을 지각하여 액체가 흐르는 듯한 형태나 시각적 착시를 통해 유동적 특성을 경험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공간으로 구분됩니다. 또한, 공간이나 공간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움직임과 시각적 대상의 움직임을 통해 가변적이고 일시적인 공간의 유동성을 부여합니다. 움직임의 요소가 없는 대상이라도 관찰자의 움직임과 시점의 변화에 따라 지각이 변하거나, 형태상의 내·외부 상호작용을 통해 역동성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유동적 공간은 다목적 공간 구성을 가능하게 하며, 내·외부의 상호작용으로 관계 형성에 중점을 두거나, 공간의 대비와 빛을 통한 다양한 감각을 제공하여 변화하는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건축 분야에서 유동성을 주로 공간의 느낌으로 다루었으나, 현대에는 점차 동적인 형태를 통한 주체의 경험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자유롭고 화려한 형태로 유동성을 표현한 바로크 양식처럼 장식적 요소를 사용했습니다. 이후, 건축적 요소를 통해 유동성의 개념이 발전하면서 실제로는 움직이지 않지만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표현 요소가 사용되었습니다. 실제 움직임을 가진 대상을 통해 유동성은 더욱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관찰자는 대상이나 공간을 경험할 때, 시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연속적인 흐름으로 관찰하게 됩니다. 이는 유동적 공간이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관찰자의 이동과 시각적 경험에 따라 변하는 동적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현대 건축에서는 이러한 유동적 특성을 반영하여, 공간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움직임과 변화를 통해 새로운 경험을 제공할 수 있도록 설계되고 있습니다.

현대 건축가 스티븐 홀과 SANNA, 자하 하디드의 경우를 예로 들겠습니다.

스티븐 홀(Steven Holl, 1947-)은 "건축을 지각의 문제로 사유하기 위해, 우리는 불신을 없애고 마음의 반쪽인 이성에서 해방되어 단순히 유희하고 탐험해야 한다... 직관이 우리의 여신이다"라고 말하며, 종합을 위한 직관의 중요성과 신체를 이용한 지각의 현상학적 접근방식을 강조합니다.

스티븐 홀은 건축 내부 공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특정 형태나 스타일에 얽매이지 않으며, 공간에서의 현상학적 체험을 중시합니다. 특히 단단하게 고정된 독립적인 물체 형태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연속된 공간들의 현상을 경험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는 다공성을 통해 사용자가 다양한 경험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의 다공성 구조는 시간에 따른 빛의 다양한 확산과 그림자 효과를 통해 실내 형태를 지배하며, 공간의 특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핀란드 헬싱키에 위치한 키아스마 현대 미술관(Kiasma Museum of Contemporary Art, 1998)에서 스티븐 홀은 프로그램과 태양의 궤적, 그리고 도시 환경을 분석하여 문화적 구조 축을 두 개의 이질적인 볼륨으로 통합했습니다. 이를 통해 건물의 내외부에서 공간적이고 다양한 경험을 창출했습니다. 그 결과, 도시의 기하학과 자연의 기하학이 얽히는 관계는 두 개의 볼륨이 태양의 궤적에 맞춰 점진적으로 통합되면서 빈 공간(틈)을 형성했습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조망을 통해 다양한 공간적 시퀀스를 체험하게 되고, 내부에서 보이는 외부 경관은 미술관과 대도시 헬싱키의 연결성을 증대시킵니다. 이는 건축, 미술, 그리고 문화가 각각 독립된 개체가 아닌 도시와 환경의 아우라로 함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Kiasma Museum of Contemporary Art

또한, 그는 공간을 고정된 시점으로 파악하는 대신 관찰자의 이동에 따른 유동적인 시점으로 바라봅니다. 스티븐 홀의 작품 속 다공성 구조는 현상학적 지각 경험을 통해 사용자에게 물리적, 심리적 자극을 주며, 즉각적인 경험에 의한 건축 공간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장소적 의미를 형성합니다. 이는 무의미한 공간에서 벗어나 새로움을 경험하는 의미 있는 장소로 변모하게 합니다.

미국 워싱턴에 위치한 벨뷰 미술관(Bellevue Art Museum, 2001)에서는 홀은 신체의 움직임에 의한 시차의 변화를 통해 연속적인 공간 흐름을 만들어냈습니다.

세 개의 갤러리 층은 각각 다른 시간 개념을 상징하며, 서로 다른 세 가지 빛이 이를 표현합니다. 1층의 포럼과 로비 공간은 에워싸는 공간 효과가 강하게 드러나며, 2층 갤러리 층의 통로에서는 개구부의 틈을 통해 얻어지는 시점의 변화와 연결 기법으로 인해 여러 층에서 오르내리는 관찰자의 움직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3차원의 벽면은 벽의 기울어짐에 따른 음영 변화를 극적으로 만듭니다. 중정을 이루는 구조물의 결절부는 방문자의 시점 이동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하는 외부 공간을 접하도록 의도되었습니다. 이처럼 다층화된 경계들로 경험되는 사이 공간의 효과는 상호적으로 다양하게 관계를 맺고 있는 틈들의 현상학적 효과와 이를 경험하는 사용자의 위치 및 시간의 변화에 의해 한층 더 확장된 범주로 진화되었습니다.

스티븐 홀은 물질 자체의 감각보다는 공간의 깊이와 시간성에 대한 감각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의 건축 세계는 특정 장소의 분위기, 색채감과 같은 요소를 이용해 신체 감각을 강조합니다. 특히, 빛의 현상과 공간의 깊이를 다루며 신체의 움직임을 유도하는 중요한 요소로 사용합니다. 이러한 건축 공간 안에서의 시각적 요소는 그림자와 함께 볼륨을 형성하거나, 비움과 채움, 투명성을 통해 사용자에게 시지각적 경험을 제공하고, 공간에 시점을 부여해 심리적 작용을 유발합니다.

다음으로 살펴볼 건축가는 SANAA (Sejima and Nishizawa and Associates)입니다. SANAA는 일본을 대표하는 현대 건축 설계사무소로, 1995년 카즈요 세지마(Kazuyo Sejima)와 류에 니시자와(Ryue Nishizawa)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SANAA의 작업은 투명함, 유동성, 관계성 등의 개념을 중심으로 하여, 사용자 경험과 공간적 맥락을 중시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SANAA는 "각 방은 그 자체로는 두드러지지 않아도 사람들 스스로 공간들을 연결 지을 수 있게 해준다. 누군가 공간에 들어오는 매 순간마다 다른 것을 느끼게 하고 싶다. 건물을 실제로 이루는 것은 이와 같은 모든 경험의 집합이다."라는 말을 통해, ‘분위기’가 공간에서 다양한 경험을 창출할 수 있는 잠재적 표현임을 설명합니다.

Grace Farms
SDA Bocconi School of Management

SANAA가 지향하는 공간은 매 순간마다 새로운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공간으로, 풍부한 잠재성을 지닙니다. 다양한 공간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SANAA의 건축 작업은 '관계'를 만드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으며, 내외부의 관계, 위계 간의 관계, 프로그램 간의 관계를 포함하여, 사용자가 다채로운 경험을 만들어내도록 촉진합니다.

특히, SANAA는 건축 공간에서 다른 요소보다도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투명함'을 사용합니다. 이를 통해 사용자는 건축 공간 내에서 설정된 관계 구조 속에서 다양한 경험과 행위를 발생시킬 수 있습니다. SANAA는 이 '투명함'이 시각적으로만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을 수용하는 잠재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새로운 위계 표현이나 프로그램의 관계를 통해 일시적으로 발생하는 우연한 사건들이 사용자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유도하며, 이러한 건축적 요소들의 관계 구조를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 '투명함'의 분위기를 표현한 것입니다.

The Rolex Learning Centre, EPFL 로잔

또한, 이러한 '투명함'은 내외부 공간의 연계를 촉진합니다. 사용자는 열린 내외부 공간의 관계 속에서 자율적으로 사건을 만들고 다양한 경험을 창출할 수 있습니다. 스위스 로잔 연방공과대학(EPFL) 캠퍼스에 있는 다목적 학습센터 및 도서관(The Rolex Learning Centre)은 내부가 경사판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 거대한 원룸 공간에는 도서관, 정보센터, 자습실, 연구실, 레스토랑, 카페 등이 마치 다양한 풍경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각 프로그램은 물리적 경계 없이 배치되어 있어, 사용자들이 다양한 활동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설계되었습니다. 이처럼 SANAA의 투명한 건축 공간은 사용자가 자유롭게 탐험하고 다양한 경험을 축적할 수 있는 몽상적 공간으로 기능 합니다.

자하 하디드(Zaha Hadid, 1950-2016)는 런던의 AA스쿨(Architecture Association)에서 렘 콜하스(Rem Koolhaas, 1944­), 엘리아 젱겔리스(Elia Zenghelis, 1937­) 등 자신의 실험적인 작업을 이해하고 지원해주는 교수들로부터 교육을 받았습니다. 졸업 후, OMA(Office for Metropolitan Architecture)에서 근무하며 러시아 아방가르드 이론의 절대주의 수법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되었습니다. 하디드의 졸업 작품인 “말레비치 텍토닉(Malevich’s Tektonik, 1977)”은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Severinovich Malevich, 1878­-1935)의 텍토닉 개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자하 하디드는 텍토닉 개념을 통해 ‘건축에서 기능을 제외하면 과연 무엇이 남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구성주의가 실제적인 3차원 공간에 집중했다면, 절대주의는 실험적 시간의 4차원에 대한 종합적 위치를 주장했습니다. 이는 자하 하디드가 시간성을 포함한 4차원의 공간을 독창적으로 표현하며 구성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출발을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레비치 텍토닉

하디드는 기존의 관습적 방법에 저항하고, 다양한 흐름에 부합하는 새로운 표현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실험적인 공간 구성을 시도했습니다. 협력 작업을 통해 첨단 기술과 신재료를 활용하며 예측 불가능한 다양한 형태를 만들어내어 유동적인 형태와 공간을 생성했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전 세계로 확장되었습니다.

자하 하디드의 대표작인 ‘비트라 소방서(Vitra Fire Station, 1993)’는 그녀를 세계적인 건축가로 만든 작품 중 하나로, 이질적인 축에 의한 긴장감, 여러 선의 중첩에 따른 다방향성과 역동성, 내·외부 공간의 상호관입 등을 특징으로 합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란데스가르텐샤우(Landesgartenschau, 1999)’, ‘호엔하임 노드 터미널(Hoenheim-Nord Terminal & Car Park, 2001)’, ‘BMW 중앙 공장(BMW Central Building, 2005)’ 등의 작품에서 계속 나타나며, 복잡하고 무질서한 환경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고자 합니다.

하디드의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는 ‘라파엘 로페스 드 에레디아 와인 파빌리온(R. Lopez De Heredia Wine Pavilion, 2006)’, ‘노드케텐바흐(Nordkettenbahn, 2007)’, ‘서펜타인 갤러리 파빌리온(Serpentine Gallery Pavilion, 2007)’ 등이 있으며, 이 작품들은 중력에서 벗어나 영원성과 완결성, 중심성을 해체하는 형태로 착시 효과를 꾀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뉴라지크 현대미술관(Nuragic and Contemporary Art Museum, 2006-)’, ‘아부다비 공연센터(Abu Dhabi Performing Arts Center, 2007-)’,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ongdaemun Design Plaza, 2007-)’ 등은 도시의 랜드마크적인 역할을 하며, 현대의 문화, 휴식, 레저 등을 위한 공공의 안식처로 변모시키고 있습니다. 이들 작품은 하디드의 건축적 특징들을 포함하며, 도시적인 규모로 확장되어 유기적인 결합을 통해 다양한 유동적 표현 특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뉴라지크 현대미술관
아부다비 공연센터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이탈리아 로마 플라미니오 지역에 위치한 약 30,000㎡ 규모의 대지에 자리한 MAXXI는 도시 맥락의 연장선에서 매스의 이미지를 형성했습니다. 대지의 흐름과 반대되는 방향성을 갖는 매스가 특이하게 나타납니다. 이질적인 축과 비선형 요소를 사용하여 강력한 방향성과 불균형에서 오는 긴장감 및 역동성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지와 주변 맥락에서 발생한 흐름을 따라 전시실이 형성되며, 그 흐름이 내부 공간으로도 연장됩니다. 이로써 도시 맥락의 힘을 내부로 끌어들이고, 이질적인 축의 방향성을 취하며 무한히 순환하는 공간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관찰자의 시점이 아닌 평면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한계가 있습니다.

MAXXI는 주변 환경과 도시 맥락에서 파생된 다양한 흐름들에 볼륨을 더해 공간을 형성했습니다. 이러한 공간 형성 방식은 구조와 결합하여 별도의 지지체가 필요 없는 콘크리트 터널형 매스를 만들었으며, 형태가 곧 구조가 되는 일체성을 갖습니다. 이는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안정성에 대한 도전이자 무게와 중력에 대한 기존 사고방식을 변화시키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말레비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말레비치는 1928년 '비대상의 세계(Die Gegenstandlose Welt)'라는 저서에서 “우리가 공간을 지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지지점이 사라지고 지구의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이다.”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하디드는 이러한 반중력적 개념을 수용하면서, 중력장 내에서 구축되던 견고한 건축을 도시의 흐름을 폭발적인 이미지로 표출하는 방식으로 변화시켰습니다.

또한 주목할 점은 공간을 체험하는 사람들이 전시실의 관람 순서를 선택하여 이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박물관 내부의 흐름이 처음부터 끝까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전시실로의 이동 또한 계단과 경사로를 통한 선택적 관람이 가능하며, 이는 유동적 공간의 특성 중 연속성과 연관이 있으며 더 나아가 가변성과도 연결됩니다. 연속성의 개념은 기존의 투명한 외피를 통한 모호한 경계로 얻어지는 시지각적 연속, 공간 구성에 있어 유기적으로 연결된 공간의 흐름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체험자의 공간 경험의 연속, 프로그램의 연속이나 동선의 연속을 통한 무한한 공간, 무한한 동선의 순환 등 다양한 의미를 갖습니다.

실제로 이 건축물의 전시 공간 내부에는 기둥이나 벽, 심지어 각 전시실을 구분하는 문 등의 장치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대신, 천장에 매달 수 있는 전시물이나 설치와 제거가 용이한 가변형 패널을 이용하여 전시실을 구분할 수 있도록 하여 목적과 계획에 맞는 공간을 제공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또한 건물 외부에서 내부로 이어지는 다양한 선들은 벽, 바닥, 지붕의 그리드, 조명 등을 통해 외부 형태가 그대로 내부 공간에 노출되도록 하여 상호관입이 일어납니다. 프로그램상의 간섭이 예상되는 곳에는 홀이나 경사로, 계단, 복도 등을 배치하여 프로그램과 기능의 혼란을 최소화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유기적인 공간의 연속과 그 과정에서 관찰자의 체험적, 시각적 연속이 더해지면서 강력한 공간의 연속성과 변화의 움직임에 대응할 수 있는 가변성을 취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무한한 공간을 느끼게 합니다.

MAXXI의 형태 구성에 영향을 미친 지역적, 환경적 요인들과 그 형태를 따라 발생하는 흐름 속에서 관찰자의 이동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상호작용성은 실제로 움직임의 요소가 없는 대상의 형태가 주위 환경이나 관찰자의 움직임에 의해 변화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반응하는 특징으로, 인간과 주변 환경의 관계, 주변 환경과 형태 또는 공간과의 관계, 내·외부 공간과 인간의 관계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유기적 변화를 가져옵니다. MAXXI에서는 상호작용 혹은 상호연계의 과정이 주변 맥락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주변 맥락과 건물의 관계에서도 상호작용성이 발생하지만, 관찰자와 주변 맥락, 관찰자와 건물의 관계에서도 다양한 상호작용이 발생합니다. 관찰자가 주변 환경을 바라보는 시점의 변화나 직접적인 움직임을 통한 다면성의 인식은 건축의 실재에 더욱 근접하게 합니다. 움직임을 통한 다양한 측면의 인식은 앞서 언급한 유동적 개념의 등장 배경이기도 하며, 이를 통해 주변 환경과 공간, 관찰자 사이의 상대적인 시점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됩니다.

이처럼 현대 건축에서 유동성은 고정된 형태가 아닌, 다양한 경험과 변화를 반영하는 동적 특성으로 표현됩니다. 다목적 공간 구성을 가능하게 하고 이러한 공간은 내외부의 상호작용을 통해 변화하는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공간에서 사용자의 지각과 직관이 활발히 활동할 수 있게 작동하기도 하며, 사용자가 다양한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그로 인해 다양한 현상적 경험을 느낄 수 있게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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