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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향 Apr 15. 2024

"너는 미국에 가야 하는 사람이야"

한국을 떠날 생각을 했던 계기는 8년이 지난 지금 떠올려봐도 생생하다. 대학생 시절의 나는 꿈이랄 게 없었다. 이룬 것 하나 없고 이루고 싶은 것도 없어서 당장 죽음이 닥친대도 아쉬울 게 없었다. 항상 똑 부러지고 맘만 먹으면 다 해낸다고 어른들이 평생에 걸쳐 칭찬을 했을 만큼 매 순간 최선을 다했음에도 나는 내가 왜 열심히 살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생을 끝내고 싶을 만큼 사는 게 싫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죽음을 두려워할 만큼 살아있는 게 좋지도 않았다. 머리가 자라서 생각이란 걸 조금 할 수 있게 된 10살 무렵부터 수능을 치르기 위한 19살 수험생이 되기까지 10년 가까이를 나는 여느 한국 학생들처럼 억압된 상태로 버텼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고 세뇌되어 10년 내내 나는 공부밖에는 할 줄 몰랐다.


학창 시절 때 예쁜 내 친구들은 학교에서 인기가 많았고 연애도 여러 번 했다. 어린 마음에 그게 참 부러웠다. 나도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드라마 주인공들처럼 가슴 떨리는 연애를 하고 싶었고 인생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관심이 그런 쪽에 쏠릴 때마다 어른들은 내게 주의를 주며 당부했다. 대학교 가고 나면 젖살 빠져서 예뻐지고 연애도 실컷 할 수 있으니 지금은 공부에나 집중해라. 그래서 그 말을 되뇌이며 공부했다.


공부란 것도, 학교에서는 나름 여러 과목을 가르쳐주지만 그 과목들이 학생 입장에선 내신이나 수능 등 점수를 따기 위한 선택과 집중의 영역에 속할 뿐이므로 나는 과감하게 과학, 역사 등 중요한 과목을 손에서 놓아버리고 국어, 수학, 영어 등 성적 면에서 내게 유리한 과목만을 가져갔다. 그렇게 성실하게 고등의무교육을 마친 나는 정작 세상을 사는 데 필요한 지혜가 결여된, 성적 좋은 개살구가 되어 사회에 나왔다.


그렇게 애써 공부했음에도 초등학생 때 꿈꿨던 하버드나 중학생 때 꿈꿨던 연세대는커녕 고등학생 때의 나는 탑 10도 아닌 겨우 인서울에 만족해야 했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였던 것 같다. 어떤 박탈감이랄지 상실감이랄지, 그 허탈한 기분 말이다. 끝도 없는 경쟁에서 매일 뒤로 밀려나는데 손 쓸 도리 없는 허망함이 내 삶을 지배했다. 겉으로 티 낸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냥 속에서 들끓는 감정이었을 뿐.


매사에 이유 없이 열정적인 나는 대학생활도 미친 듯이 했다. 여기서 미친 듯이란, 지난 10년간 억눌려있던 유흥욕구를 다 분출하기라도 하듯 친구, 선배, 후배들과 어울려 노는 데에 눈이 돌아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다녔던 내 대학시절 4년을 통칭한다. 학점은 최소한 3.5를 넘길 수 있게 맞춰놓고 남는 모든 시간은 술 마시고 연애하는 데에 썼다. 술 마시려면 돈이 필요하니 아르바이트도 열심히 했다.


지금은 술을 안 마시니까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지만 실제로 그 시절 200회 이상은 필름이 끊겼다. 원래도 과격한 내가 술을 마시면 더 통제불능이 되니 동기들, 선배들과 큰 싸움도 잦았다. 아침에 눈 뜨고 나면 후회와 이불킥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그 고통을 잊기 위해 해가 지면 또다시 술을 마셨고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술 마시는 순간만큼은 즐거웠으니 그 쾌락을 찾아서 다시 가고 또 가고, 그렇게 현실에서 도망쳤다.


모든 술자리에 끼어있다 보니 말이 와전되고 퍼지는 동안 친했던 친구들과 오해도 생기고 갈등도 빚어지고, 그렇게 나는 대부분의 사람을 잃게 되었다. 목적 없이 달리던 나와 달리 다른 사람들은 삶에 대한 태도가 명확해보였다. 그들은 현명하게 얼른 더 중요한 가치를 향해서 길을 틀었고 우린 제각기 다른 곳을 향했다. 그즈음이었을 것이다. 내가 다시 헛헛한 기분으로 주저앉게 된 것은.


내게 전부와 같던 그 대학시절을 흘려보내는 게 내겐 참 힘겨웠다. 내가 마음을 다해 아끼던 사람들이 나를 오해하거나 부끄럽게 여겨 나를 떠나가게 됐을 때 그 뒤에 남겨진 마음을 보듬어주기가 쉽지 않았다. 나도 내가 미워서 상처를 핥아주지도 않았다. 그냥 곪게 내버려 뒀다. 그렇게 취준생활을 시작했다. 나름 또 열심히 준비했는데도 1년 가까이 서류심사에서 광속탈락하는 날이 계속됐다.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나는 나 자체로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멘탈을 붙들고 있고 싶은데 너무하리만치 계속되는 경쟁과 심사, 패배에 잇따르는 좌절감을 견뎌내기란 만만치가 않았다. 그렇게 무의식 중에 도망치자는 생각이 깊이 뿌리내렸던 듯하다. OECD 행복순위가 낮다는 건 한국에 나 같은 사람들이 많다는 뜻 아닐까, 한국을 벗어나면 나도 행복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 비겁한 생각에 힘을 보탠 건, 내가 정신없이 술을 마시고 다니던 시절 뜬금없이 만나자고 연락을 해 온 나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친했던 언니다. 12살 이전의 기억이 거의 없는 나에게 유일하게 있는 기억이라면, 내게도 공부가 중요하지 않던 시절이 있다는 사실이다. 나에겐 이모가 세 분 계신데, 그중 한 분이 서양화가를 업으로 삼고 계신다. 이모는 파주에 화실이 따로 있어서 그 곳에서 작업활동을 하신다.


내가 어렸을 때 나와 1살 터울인 사촌동생과 함께 주말마다 미술을 배우러 이모 화실에 갔었는데, 그때 이모 지인분 자제인 이 언니도 우리랑 수업을 들었다. 나와 1살 차이인 언니, 웃을 때 보조개가 깊게 파여 매력적인 언니는 항상 당차고 잘 웃어서 우리 집 어른들이 예뻐했다. 친언니처럼 따스했던 언니와 우리는 주말마다 시간을 함께 보내며 같이 울고 웃고 제법 긴 시간을 함께했다.


그러다 인생에 공부만 남게 된 후로 어렸을 적 기억은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결국 나는 언니를 어쩌다 한 번조차 떠올리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서로 연락처도 모르고 각자 살게 된 지 10년은 더 지난 그 시점에 언니가 우리 이모를 통해 생전 처음으로 연락을 해 온 것이다. 갑자기 나를 만나야겠다고 했다. 신기한 동시에 이름만 들었는데도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 둘은 서울 어느 칵테일집에서 만났다. 언니는 미술 전공을 살려 그쪽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얼마 전에는 미국 라스베가스를 갔다 오게 됐는데, 자기도 모르게 그 화려한 네온사인을 보는 순간 내 생각이 났다고 했다. '여긴 걔가 꼭 와서 봐야 돼. 걔는 작은 한국에 갇혀 있어선 안 돼. 꼭 미국에 와 보라고 말해줘야겠어. 세상은 엄청 엄청 넓다는 걸 알려줘야겠어.'라고 생각했단다. 그 때 내가 어디서 뭘하고 살고 있는지도 몰랐으면서. 언니는 내게 말했다. "너는 미국에 가야 하는 사람이야."


당시 나는 가까운 일본조차도 가본 적이 없었고 대학 졸업을 앞두고 공무원준비를 해야겠다고 맘먹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을 벗어난 나 자신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정말 뜬금없게도, 10년 전의 내 모습을 기억하고 이 사람이 라스베가스에서 나를 떠올렸다는 사실, 그리고 조언을 해주러 연락처를 물어 나를 만나러 왔다는 사실이 내겐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단순히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가 아니지 않은가. 내가 세상에 막 나온 날 것의 상태였을 때의 내 모습을 객관적으로 목격한 거의 유일한 사람. 내가 세상과 타협하기 전, 좌절하고 무너지고 작아지기 전의 나를 겪었던 사람. 오직 그 모습만으로 나를 기억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자신의 세상에 빗대어 해석한 나를 알려주러 내게 직접 오지 않았는가.


사실 이 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너무 뜬금없는 일화지만 그날 하루가 내 인생을 뒤바꿨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기이한 감정과 충격이 뒤섞여서 그날 이후 나는 실제로 해외에 관심이 생겼고 더 넓은 세상에 나가봐야겠다고 결심하게 됐다.


다만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나만 맘먹는다고 내가 곧장 미국으로 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열심히, 실은 어쩌면 설렁설렁, 취업준비를 하는 기간 동안 나는 해외취업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고 그렇게 나는 결국 괌에 있는 호텔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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