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직 종사자가 되고 보니
어른들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다. 전문직이 최고라는 말. 어린 나는 전문직이 뭔지를 아예 몰라서 네이버 지식인에 전문직 종류를 검색하곤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면 장의사, 변리사, 노무사, 프로그래머, 조종사, 세무사, 보험계리사 같은 직업들이 나왔고 나는 그중 절반은 또 무슨 뜻인지 몰라 그냥 검색창을 닫았었다.
시험공부만 하기에도 벅차서 적성이나 관심사를 찾을 여유가 없었다. 수능 직후부터 20대 절반 이상을 서비스직에 몸 담고 살았다. 10대를 다 바쳐 공부한 결과라기엔 연봉이 너무 적어 불만이던 괌에서의 첫 직장을 다닐 때, 옆 직장에 근무하던 친구는 내 연봉의 2배를 넘게 받고 있었다. 우리 둘 다 한국에서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호텔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보수 차이가 그렇게 많이 날 수 있다는 걸 처음 목격하게 된 셈이다.
다른 글에 이미 적었지만 이후 어쩌다 보니 미국에서 공인회계사, 정확히는 감사인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현재 내 첫 직장 연봉의 4배를 받고 일하고 있다. 내가 몸 담고 있는 조직은 일반 기업이 아닌 회계법인이고 이는 굳이 비교하자면 로펌과 비슷한 형태의 구조적 특성을 띤다. 우리는 연봉을 받는 회사원이지만 그 몸값은 1년간 얼마나 많은 고객에서 이익을 창출했느냐로 매겨진다. 고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돈을 청구하는 걸 ‘빌링(billing)’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서비스를 투여한 시간만큼을 개인별 시간당 요금으로 계산해서 고객에게 청구한다.
법률자문서비스를 받고 청구서를 받아본 적이 있다면 요금 명세서 하단에서 봤을 수도 있다. 일반 개인은 회계법인에 일을 의뢰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회계팀 직원이 아니고서야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겠지만, 회계법인의 회계서비스도 같은 방식으로 제공된다. 예를 들어 내 시간당 청구요금(billing rate)이 $150이고 내가 한 고객을 위해 컨설팅을 2시간 동안 해줬다면, $150 * 2 hr = $300이 고객에게 청구되는 것이다. 물론 연차가 쌓이고 능력치가 올라갈수록 청구요금은 올라간다.
각 개인의 회계사가 빌링한 시간만큼이 곧 회사의 매출이다 보니 우리 회계사들이 1년간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타 잡일이 아닌 빌링하는 데에 쏟았느냐가 성과평가의 지표가 된다. 하루에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우리는 자율적으로 그날 무슨 일을 할지 결정하고 각 프로젝트에 쓴 시간을 크게는 15분에서 작게는 1분 단위로 추적해 기록한다.
주간회의, 회사 이벤트, 교육 프로그램 등 특정 고객과 관련 없는 업무는 청구불가능(non-billable)한 시간으로, 특정 고객을 위한 상담, 세금 보고, 감사 등은 청구가능(billable)한 시간으로 나뉘고 이는 우리가 매주 제출하는 시간기록시스템에 입력된다. 이를 바탕으로 고위직급 파트너와 매니저는 고객에게 보낼 청구서를 작성하고 또한 직원의 성과를 평가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회사의 경우 매 10월 1일 - 9월 30일이 1년, 일요일 - 토요일이 1주로 운영되고 각 신입 직원에게는 매년 1,750시간의 billable hours가 목표로 설정된다. 주당 의무근로시간은 non-billable과 billable을 합쳐 40시간인데 매년 1월부터 4/15(세금 납부 기한)까지는 비지시즌(busy season)이기 때문에 세무팀은 주당 55-60시간, 감사팀은 최소 50시간의 billable hours를 맞추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다. 다른 큰 회계법인들은 비지시즌 때 감사팀도 훨씬 바쁜 걸로 알고 있지만 우리 회사는 상장기업이 아닌 플로리다의 HOA(주택 소유주 협회)나 비영리단체가 주요 고객이기 때문에 감사보고서 마감기한의 규정이 빡세지 않다.
그래도 일주일에 non-billable을 제외하고 billable만으로 50시간을 채우는 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아서 매주 일요일마다 집에서 6시간 정도 미리 일을 좀 해놓고 월-금 직장에 나가서 하루 9시간씩 업무를 보면 겨우겨우 주당 50시간을 채울 수 있었다. 열흘 전쯤 나의 첫 비지시즌이 무사히 끝났다. 어찌나 홀가분하고 기쁘던지.
비지시즌을 제외하면 나머지 9개월은 나름 편하게 근무할 수 있다. 일의 독립성이 높은 만큼 직원 개개인의 근로 스케줄상 유연성이나 자율성도 높은 편이라서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회사에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근무할 수도 있고, 회사에 나간다 해도 자유롭게 출퇴근시간을 설정할 수 있다. 우리 사무실에는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이 많아서 새벽 6시에 출근해서 오후 2시에 퇴근하는 직원도 있을 정도다. 치과예약이 있다거나 친구가 놀러 와서 공항에 데리러 가야 한다거나 반려견을 돌봐야 한다는 등 어떤 사소한 핑곗거리라도 있으면 연차를 쓰지 않고 평일에 일을 빼는 것도 쉽다. 주말을 이용해서 주당의무근로시간을 채우기만 하면 되니 말이다.
점심은 보통 싸와서 업무를 보는 도중에 먹거나 Door dash 같은 어플로 배달을 받아서 먹는다. 가끔 다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가는 날에는 그 시간을 다 같이 write-off (시간기록에서 제외)시켜야 하기 때문에 동료들과 점심을 함께 하기란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개인주의 끝판왕의 세계랄까.
어떻게 보면 참 자유롭고 어떻게 보면 또 숨이 턱 막히는 그런 시스템 속에서 나름대로 돋보여야 하고 성장해야 하고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 내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 그냥, 어렸을 때 하도 전문직, 전문직 듣고 자랐음에도 전문직이 뭔지조차 모르고 산 세월을 돌아보니 어이가 없어서, 어쩌다 보니 전문직 종사자가 되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또 웃겨서, 내가 살고 있는 전문직 일상에 대해 적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