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가 공기처럼 들어왔다
요즘 젊은이들은(?)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학교 급식이란 게 없었다.
그래서 우리 엄마는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오빠와 내 점심 도시락을 싸셨다.
엄마의 아침 루틴에는 늘 라디오가 있었다.
굿모닝팝스를 들으면서 아침식사와 도시락을 동시에 준비하셨고, 나는 거의 매일 아침 오성식 아저씨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일어났다.
오성식 아저씨는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그달의 영화와 유행하는 팝송을 소개해 주셨는데, 나는 학교갈 준비를 하면서, 아침을 먹으면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영어에 귀를 쫑긋 세우곤 했다.
듣다보면 학교에서 배운 단어가 가끔 나오는데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영화 속 유명한 대사를 짤막하게 들려주면 그 짧은 영어 한 줄을 들으면서 머릿속으로 영화의 한 장면을 마음대로 상상해 보았다.
같은 구간을 반복해서 들려주어서 귀에 들리는 소리들을 따라 하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힘들이지 않고 쉐도잉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굿모닝 팝스에서 매달 나오는 교재가 있었는데, 이것도 매달 사서 아는 단어들을 찾아보곤 했다.
우리 집은 9시 뉴스 및 EBS 외의 TV시청은 금지였었다.
그래서 방과 후 집에 돌아오면, 자연스럽게 어쩔 수 없이 EBS를 틀어놓고 보게 됐다.
그중에는 영어 발음을 가르쳐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내 기억으로는 성인을 대상으로 한 방송이었다.
화면에는 금발머리 원어민 여성의 옆모습이 크게 잡혔다.
그분이 영단어를 하나씩 발음하면서 입 모양과 혀의 위치를 아주 자세히 보여줬다.
한국 사람들이 헷갈려하는 l, r 발음, 그리고 한국어에는 없는 th 발음을 발음할 때 혀가 정확히 어디에 닿는지, 어디까지 나와야 하는지 슬로우 모션으로 찬찬히 반복해서 보여줬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 외국인이 흔하지 않던 때라, TV 화면을 가득 채운 원어민의 옆모습은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 당시에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라니, 그 원어민도 대단하다!)
핸드폰도, 노트북도 없던 시절이라 딱히 딴짓할 거리도 없던 나는 그 화면에 완전히 홀려서 온 신경을 다 집중해 따라 했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입 모양을 최대한 똑같이 만들고, 혀도 따라 움직이며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자발적으로 발음 교정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