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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년교생 Jul 15. 2021

노오오력도 쉽지가 않습니다

<세습 중산층 사회>(조귀동)을 읽고

학교 도서관에서 눈에 띄는 책 하나를 찾았다. 책은 90년대생이 느끼는 불평등을 담고 있었다. 몰려드는 세특 문의를 잠시 제쳐두고 하룻밤을 새워 모두 읽어버렸다. 책을 붙잡고 있는 내내, 내심 나의 위치가 중산층이길 바랬다. 그러나 마지막 장이 다가올수록 나는 '중산층'과 거리가 너무나도 먼 곳에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 배웠던 사회문화에서 기능론과 갈등론의 내용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중산층'이란 단어를 너무 만만하게 봤던 것일까.




나는 거창한 담론은 모른다. 사회의 계층이나 구조적 갈등은 알지를 못한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주 예전부터 그런 쪽으로는 눈과 귀를 닫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교원으로서 지켜야 할 정치적 중립을 손쉽게 실천하는 방법이라 생각했고, 내가 다치지 않는 최선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도 공석이든 사석이든 이런 이야기는 최대한 피한다.


그러나 매일매일 피부에 와닿는 작고 작은 담론에는 꽤나 지대한 관심을 갖는 편이다. 하루에도 몇 차례나 해대는 입시상담 탓일까. 최소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대학에 목을 맨다는 것과, 그들에게 있어서 대학은 취업과 미래를 약속받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로 취급받는다는 것은 안다. 1등급대 학생의 학부모부터 7등급 학생의 학부모까지 거의 절대다수의 학부모들은 '우리 아이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라고 외친다. 며칠 전만 해도 저녁에 한 학부모로부터 장문의 톡을 받았다. 요약하면, 왜 상위권 학생만 신경 쓰고 우리 딸은 봐주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님, 애석하게도 반의 여학생 중에서 귀댁의 따님만 대입 상담을 위해 준비할 것들을 하나도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시원스레 말하지는 못하고 그저 최선을 다하겠다 답장하고야 말았다.


우리는 도대체 왜 그렇게 학벌에 목을 맬까. 책에서는 우리 사회가 크게 두 번의 선발을 요구한다고 한다. 첫 번째는 명문대 진학을 위한 선발, 두 번째는 소위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한 선발이다. 두 번의 선발에서 그나마 선방할 수 있는 비율을 10% 남짓. 등급으로 치면 2등급대까지다. 일반적으로 좋은 대학에 진학한 사람들이 좋은 직장을 얻는다고 한다. 여기서 좋은 대학은 서울 주요 12개 명문대와 과학기술원, 교대 정도를 가리킨다. 그리고 좋은 직장은 월 급여로 300을 넘길 수 있는 안정적인 직장을 말한다. 물론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건 그야말로 '개천에서 용이 나는' 상황이다. 나는 저 두 번의 선발에서 과연 합격점을 받았을까.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이후로 이십 대 전부를 통틀어 한 번도 대충 산 적은 없었다. 그렇게 도달한 위치가 여기라면 이 정도가 내 능력인 것일까.


나는 책을 읽으며 교실을 떠올린다. 스물네 명이 있는 반에서 10%면 세명이 채 못 된다. 나머지 스물한 명은 어디로 가야 할까. 생각해보니, 고등학교 시절 그 많던 친구들은 다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책에서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중소기업에 취직할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지금까지 연락하는 고등학교 친구들 중 절대다수는 중소기업에서 일을 하고 있다.


무엇이 아이들의 학업 성취를 결정짓게 하는 것일까. 담임을 하다 보면 확실히 가정의 수준과 학생의 학업 및 품성 수준이 비례한다는 것을 느낀다. 대졸자+고소득 맞벌이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좀처럼 엇나가지 않는다. 간혹 부유하지 못한 배경에서도 훌륭한 학업 성취를 이루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아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이가 가정의 경제적 배경 때문에 악영향을 받지 않도록 부모가 세심한 노력을 기울인 흔적을 살펴볼 수 있었다. 학생이 자신의 노력만으로 사회가 요구하는 두 번의 선발에서 모두 훌륭히 성공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교사로서 인정하기 싫으나 사실이 그러하다.


학부시절 들었던 교육학 과목 중, 내 마음에 가장 깊이 남아있는 과목은 교육사회학이다. 교육사회학에서는 끊임없이 학생의 인지/정의적 성장에 영향을 주는 사회적 요인들이 무엇인지 되묻고, 교사와 학교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답할 것을 요구한다. 한 학기가 다 끝날 때,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부르디외가 외친 '문화자본'이라는 단어였다.


여러 학자들의 여러 이론들이 제각기 논리를 세우고 있었지만, 내게 있어서 풍부한 '문화자본'을 가진 학생이 우수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성공한다는 말보다 더 설득력이 있는 말은 찾지를 못했다. 교육의 역할과 기능은 차치하고서라도, 부모의 학력, 집안의 배경, 가족 간의 유대감, 집안의 교양 수준 등이 학생에게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 중 하나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학생의 성취와 품성은 어느 정도 세습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순수하게 학교 교육을 통해 변화될 수 있는 것들은 어느 정도일까.


아마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교육을 계층 이동의 사다리로 여기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교육을 통해 자신의 자녀는 중산층으로 이동하길 원할 것이다. 그러나, 같은 교사가 수업을 해도 누군가에겐 동아줄로, 누군가에겐 에스컬레이터로 다가온다. 당장 내게 자녀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그 녀석이 학교의 정련된 언어를 오롯이 받아들일지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지난밤에는 3등급인 학생이 와서 본인은 죽어라 공부를 하는데 등급이 오르지 않아 너무 속상하다며 펑펑 울다가 갔다. 사교육 하나 없이 일요일에도 학교를 나와 홀로 공부하고, 교과서가 닳아서 낱장이 뜯어지도록 책을 보는 학생이었다. 농사를 짓는 부모님과 달리 서울에서 살고 싶다는 제법 야무진(?) 꿈도 품고 있었다. 너도 중산층이 되고 싶구나. 꼭 그렇게 되고만 싶어 하는구나. 아이를 보며 마치 고등학교 시절의 나를 보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편치를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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