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교육용 드라마
그저 그런 싸구려 로맨스겠거니
주변에 워낙 보는 사람들이 많으니 분위기에 맞춰서 ‘응 그래 3월 25일에 시작한다더라’ 하는 정도로 말하고 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시즌1도 짧은 광고 영상만 본 상태였는데 너무 많이 들어서 이 드라마를 다 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할리퀸 따위의 싸구려 로맨스라고 치부해버리고 무시한 내 편견이 부끄러워지는 드라마였다.
다채로운 사고를 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공공연하게 말하면서도 사회 비판적 메시지는 진중하고 고급스러운 형태여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이런 드라마는 눈길도 주지 않았었다. 희망하는 사회에 관한 메시지는 어떤 형태로도 사회에 스며들 수 있는 것인데 상자 안에 갇혀서 통속 드라마로 제한하고 구분한 주제에 영상 콘텐츠의 수준을 논하고 있었다는 게 부끄럽게 여겨졌다.
시대극인가 시대극 코스프레를 한 현대극인가
브리저튼 시즌2는 ‘피부색과 국적으로 차별받지 않는 영국’의 런던 귀족들에 관한 이야기다. 철저하게 신분과 경제력 그리고 성별로 사람을 평가하니 어찌 보면 중세의 옷을 입은 현대사회 풍자 드라마라 볼 수도 있겠다.
8편의 드라마 전편에 깔려있는 여성의 서사는 투명한 코르셋과 질척하게 휘감기는 몰래카메라 속에서 살아가는 2022년의 여성들을 투영한다.
통용되지 않는 삶에 대해 좌절하면서도 도전을 멈추지 않는 청년들이 등장한다. 가부장제의 무게에 짓눌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 제대로 마주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장남의 모습은 지금도 분명 존재하는 삶이다. 여자는 할 수 없는 일로 규정된 분야에 발을 내딛는 여성들의 모습도 이상할 정도로 익숙하다. 도약을 제한하는 수많은 장애물들 사이에서 자신의 재능과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청년들의 모습은 내 아이들의 10년 후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피로 이어지지 않은 가족의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고, 조금만 약점을 보여도 추문에 휩싸이는 삶에서 오는 고단함을 안고 살아가는 모습은 현대사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언론이 어떻게 최고 권력에게 도전장을 내밀고 위협받으며 어떤 방식으로 자본주의에 잠식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은 슬펐다. 우정을 위해 내린 결단이 칼날이 되어 돌아와 맨손으로 받아내야 하는 등장인물의 눈물은 가슴 아팠다.
ㅅㅂ교육
겉보기에는 비단 드레스처럼 화려하고 그럴듯해 보이는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하고 불안한 고리들을 고약한 추문처럼 하나하나 끄집어내는 드라마는 성역할을 바탕으로 한 고정관념마저 은유하듯 부드럽게 깨부순다.
ㅅㅂ같은 사회를 살아가려면 유아기부터 시민교육이 필요하다고, 노무 경제 성 윤리 연대 리터러시 등등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시빅 교육 Civic education으로 어린 시절부터 정신무장을 시켜야 적어도 똥과 된장과 초콜릿은 구분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친구들과의 이야기가 드라마 화면 위를 둥둥 떠다녔다.
공정하고 행복한 사회를 위한 거대담론은 현실 속을 파고드는 섬세함과 치밀함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그의 저서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에서 작은 이야기가 가진 거대한 힘에 대해서 말한다.
드라마가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소비자에 불과한 내가 보고 느낀 것이 기획의도와 맞아떨어졌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는가. 하지만 b급 감성이 세상을 바꾼다는 말처럼 어쩌면 ‘여자들이나 보는 시대극’이라는 비아냥을 받을 수도 있는 로맨스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것들이 유행처럼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처럼 커다란 혁신도 없지 않을까 싶다.
세상은 누가 바꾸나
살다 보니 현직 서울시장이 임기 전에 갈리는 것도 보고 대통령 탄핵도 경험했다. 눈물을 흘리며 시장직을 내려놓은 사람은 다시 시장이 되었고 탄핵으로 대통령을 갈아치운 유권자들은 다시 그 힘으로 정권을 교체했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수많은 정책들이 왔다가 사라지는 것을 감흥 없이 바라보는 와중에 뇌리에 박혀있는 정책이 딱 두 개 있다.
황산성 씨의 쓰레기 종량제
정혜승 씨의 국민청원
‘남자 밭’이라는 정치권에서 나온 정책들 중 몇 안 되는 여성들의 제언에서 비롯된 정책이라서인지 아니면 정말로 세대를 뛰어넘어 오래 남을 정책이라서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 편향의 우를 범할 수도 있으니까. 그럼에도 강에 돌멩이를 던져 유의미한 파동을 만들어낸 것이 두 여성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본다. 2021년 기준으로 여성 국회위원의 비율은 19%라고 한다. 과거에는 더 낮았겠지. 비율이 더 높았다면 내가 기억하는 훌륭한 정책도 더 많아졌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양이 꼭 질을 보장하진 않으니까.
대한민국에서 산다는 것은 구조적 차별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애인과 여성할당제의 제거가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도 초등교사 중 남성의 비율이 너무 적어 성역할에 대한 편견이 생길 수 있어 교육적으로 바르지 못하다는 식의 모순 속에서 균형을 잡고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양복과 넥타이로 무장한 중년의 남성이 고위간부를 독식하는 모습을 보고 자랄 아이들의 사회적 인식은 도대체 누가 바르게 잡아줄 수 있을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