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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nk in Sociology Jul 28. 2020

독일의 아픈 과거, 베를린 장벽

베를린 장벽의 건설과 철폐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은 연합군의 점령 지역이 되었다. 그 결과 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에 의하여 4개의 점령구역으로 나뉘어졌다. 하지만,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이 심해짐에 따라서 영국, 프랑스, 미국은 자신의 점령구역을 통합하여 이 후 서독이 되었으며, 소련의 진영은 동독으로 발전하였다. 자본주의 국가가 된 서독은 동독에 비하여 영토도 2배 이상 넓었으며, 경제력이 높았기 때문에 수많은 동독의 청년, 지식인, 기술자가 서독으로 이주하였다. 동독에서 서독으로의 이주의 중심지에 있는 곳은 베를린이었는데, 이는 베를린의 동쪽은 동독, 서 베를린은 서독의 국토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구감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동독의 공산당 지도부는 베를린 장벽을 건설하였다. 


베를린 장벽이 건설된 지 약 30년이 지난 후 동독 정부는 여행자유화를 요구하는 동독 국민들의 요구를 해결하기 위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하지만, 기자의 과잉해석과 대변인의 말실수로 인하여 여행자유화가 국경 개방을 의미한다는 신문기사가 퍼지게 되어 동독과 서독의 국민이 베를린 장벽을 직접 부수게 되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후 약 11개월이 지난 후 독일은 통일하게 되었다. 


동서독 간 경제적 차이 


독일은 현재 수준의 경제 대국이기 이전에, 동독과 서독의 통일을 거치며 경제적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막대한 통일비용을 지출하고 있다. 그렇다면 통일 이전의 동독과 서독은 어떤 모습이며, 어떠한 경제적 관계를 이어오고 있었을까?


독일의 통일 이전 모습은 현재 한반도의 대치 상황과는 상이하다. 훗날 통일 독일의 수도가 되는 베를린을 공유하고 있는 탓에 통신, 전력 문제 등에서 불가피하게 논의하고 공유되어야 하는 경우도 빈번했고, 그 외에도 동서독을 넘나드는 교류와 다양한 차원의 경제적 지원이 함께 이루어졌다. 1972년 양국이 동서독 기본조약을 체결하며 분단 현실을 인정했고, 그 이전까지는 서독이 동독을 국가적 실체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 조약 이후 동독에 대한 사실상의 국가 승인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조약 이후 서독 주민들이 베를린으로 향할 수 있게 되었고, 양국의 교류와 지원도 함께 이루어졌다. 독일연방하원 조사위원회가 1973년부터 통일 직전인 1990년까지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당시 약 1천 44억 5천마르크 정도를, 환율을 감안했을 때 이미 70조 원이 넘는 수준의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동서독을 연결하는 고속도로의 건설과 철도 건설과 보수 비용을 부담했고, 이후에 다룰 프라이카우프 동독 정치범의 서독 이주 대가에 따른 물품 지원 역시 이에 포함되었다. 특히나 고속도로와 같은 경우에는 동독이 요청한 베를린에의 대규모 경제적 지원 중 하나로, 서독의 마리엔보른과 베를린을 연결하는 철도 및 도로의 보수 사업의 투자 요청에 서독이 이를 받아들였다. 이 확장사업에 서독이 12억 마르크를 부담함과 동시에 동독은 1억 마르크를 들여 서독의 현대식 건설장비를 구입했고 건설 자체도 동독에 일임했다.


이러한 동독에 대한 막대한 지원과 투자는 서독 내에 반발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동독의 체제를 유지하게 도와주는 것이 아니냐, 서독의 지출이 너무 과다하는 지적이 계속해서 등장했지만, 큰 틀에서 서독 동독 모두의 이익을 충족시키는 일이었다. 현재까지 독일 통일 전문가로 활동하는 데트레프 퀸 전 독일문제연구소장은 독일 통일 이전 동독과 서독간의 교류에 대해 이러한 의견을 보였다. 그는 "동독의 첫 번째 관심은 공산체제의 안정이며 이를 위해서는 서독의 경제적인 협조가 필수적"이라며 "서독의 입장은 통일을 향한 긴 안목에서 동족 간의 이질화를 막고 인도적인 측면에서 독일인이 바라는 바를 충족시켜 주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합뉴스 인터뷰 인용)


동독의 경제교역 측면을 보면 동독과 서독 간의 교역량 자체도 통일 전부터 상당했다. 1980년대 이후 동독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느끼면서 서독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던 모습의 한 가지 근거이다. 서독의 기준에서 본다면 동독과의 거래가 차지하는 비중은 1955년 2.3%, 1987년 1.5%였는데, 동독의 의존도는 12.3%, 7.6%에 달했다. 동독에게 서독은 소련에 이는 두 번째 규모의 교역 상대국이었다. 또한 진영 논리를 떠난 동독의 교역 모습도 서독과 동독의 경제적 관계를 보여준다. 수치상 유럽연합의 전신인 유럽공동체(EC) 회원국들과 동독이 상당한 교역을 이룬 것으로 현재 보여지는데, 이는 서독이 동독과 EC회원국들을 연결해주며 관세 장벽 없이 상품을 수출할 수 있게 해주었다. 서방 국가나 서독 내부의 반발도 있었으나, 서독이 경제적 지원과 교역을 통해 동독 경제의 기반을 1980년대까지 구축해주고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프라이카우프(Freikauf)는 양국의 관계를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다. 독어로 ‘자유를 사다’라는 의미를 갖는 말인데,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전까지 동독 정부에 현물 또는 현금을 교회를 통해 전달하면서 동독의 반체제 인사를 데려온 서독 정부의 행보를 일컫는 말이다. 서독에게는 인도적인 동포애 차원에서, 동독에게는 반체제 인사를 퇴출하고 외화벌이를 동시에 해내는 수단으로 작용하며 서독은 프라이카우프에 총 당시 기준 20억 달러를 지불했다. 더불어 1985년 동독 몰락의 단초로 작용했던 동독주민의 제한적 서독 여행 허용도 외화벌이, 체제 유지를 위한 궁여지책이기도 했다. 동독의 경제적 어려움은 점점 서독과의 거리를 가깝게 만들었고, 서독은 민족적 유대성을 근거로 조금씩 경제적 격차를 줄여나갔다.


베를린은 그 속에서 베를린 장벽으로 대표되는 분단의 고충, 통일을 위한 노력과 그 이후 통일독일이 되어가는 과정을 절실히 보여주는 도시이다. 소련과 동독 진영을 향한 한 마디와 이들의 침략으로부터 두려움에 떨던 서베를린 시민들을 격려하는 말을 전했던 1963년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서베를린에서의 연설은 케네디 대통령의 최고의 명연설로 꼽히고 있고, 여기서의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라는 말은 훗날 통일독일의 수도로서 시민의 도시라는 일종의 베를린의 도시 정체성과 연결된다. 아래는 연설문 중 일부.


2000년 전,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나는 로마 시민입니다(라틴어Civis romanus sum)’였습니다. 오늘날, 자유세계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단연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일 것입니다. (중략) 모든 자유민은, 그 사람이 어디에 살건 간에 그 사람은 베를린의 시민입니다. 고로, 자유민으로서, 전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라는 이 말을 자랑스레 여길 겁니다!


독일 통일 이후 베를린은 개정된 기본법 제 12조 22항에 수도 베를린의 역할과 위상을 베를린 특별조항으로 명시하며 경제적인, 특히 문화적인 정책이 집중되었다. 그 결과 냉전과 분단이라는 기존의 상징이나, 동독과의 경제적 차이를 고려했을 때 베를린이 문화적으로 이미지를 충분히 회복하고, 매력 있는 도시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케네디 대통령의 연설에 포함된 나는 베를린 시민이라는 자부심과 시민들의 철학은 대규모의 재개발 없이 전통을 유지해 도시를 재건하는데에 큰 역할을 했다. 통일 이후 문제점 중 하나인 100만 채 정도의 비어 있는 주택은 베를린에서는 경제 정책과 시민들의 ‘수축하는 도시들’이라는 프로젝트로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


통일 이후 30여년이 지난 현재, 독일은 EU의 주요회원국이자 세계적인 경제대국이 되었지만, 동서 간 경제적 격차로 인한 통합과 갈등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독일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분기마다 평균 0.5%의 성장을 꾸준히 유지하였으며, 전체 실업률 3%로 완전 고용을 달성하였지만, 신연방주 및 동 베를린 지역의 실업률은 6%, 서독 지역의 실업률은 3%로 실업률 차이가 여전히 심각한 문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독일 정부의 연례보고서에 의하면 구 동독 지역이 경제력은 통일 당시에 비하여 상당 부분 개선되었지만(서독의 43%-> 75%) 현재까지 경제적 격차가 존재하고 있다. 독일의 할레경제연구소에 따르면 독일의 상위 500개 기업 중 90%가 넘는 464개의 기업이 서독에 본사를 두고 있다는 점을 보면, 동서 간 경제적 차이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독일은 통일비용을 GDP의 1,5%로 예상하였지만, 현재 독일 비용으로 지출된 비용은 약 2600조원으로 독일 GDP의 4%를 차지한다. 이러한 막대한 동일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독일은 서독 지역의 주민과 기업에게 통일세를 부과하였다. 통일세 덕분에 동서독 간 경제적 격차가 상당부분 개선되었지만, 통일세가 역차별적이라는 서독 지역의 비판이 거세지자 독일은 2021년 통일세를 폐지하겠다는 입장이다. 반면 동독 지역의 사람들은 서독에 비해 경제, 정치, 사회적으로 열위에 있어 소외감을 느낄 수 있다는 우려를 하고 있고 지역 간 갈등 또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동서독 간 경제적 격차


동서독 간 경제적 간극의 완화

해결방안


독일은 통일을 위해서는 제도적인 통합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통합도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통일 이후 통합을 위한 여러 정책을 실시하였다. 첫 번째로, 신연방주 특임관 (이하 특임관)이라는 직책을 신설하였다. 특임관의 역할은 구 동독지역을 재건하고, 이와 관련된 업무를 다루는 부처 간 업무를 조정하는 것이었다. 앞에서 이야기하였듯이, 통일 이후에도 동독과 서독 간 경제적 격차는 여전히 좁혀지지 않았으므로, 경제력 차이에 의한 주민의 이주문제를 해결하고 화폐통합을 통하여 신연방주 경제를 회생시키고자 하였다. 당시 동독과 서독의 화폐가치 비율은 약 1:4이었는데, 이를 1:1로 조정하여 동독의 인구감소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특임관 실에는 서독 출신의 의원보다는 동독 출신 의원의 수가 더 많았기에 동독과 서독 간 정치적 간극은 줄어들게 되었다. 서독의 경제적 지출이 더 많았지만, 의원내각제라는 정치체제 덕분에 동독과 서독에서 골고루 대표자들이 선출되었기 때문에 특임관이 동독 출신인 것에 대한 불만이 야기되지는 않았다. 통일 후 독일은 인권문제가 있었던 사람들은 공직에 오르는 것을 막고 처벌하는 규정이 있었기에 대통령, 총리, 장관 등은 동독 출신의 사람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구 동독지역과 서독지역을 막론하고 최상위 직위는 서독 출신이 많다는 비판도 제기되었지만, 경제, 무역 부분의 여러 경제사회단체의 지도자는 동독 출신 사람들의 비중이 높았다. 사회 전반적인 부분에서 동서독 간 정치적 입지 차이를 줄이기 위하여 신연방주 특임관이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 현재 독일은 동서독이 정치적 측면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 


두번째로 사회적인 통합을 이루기 위한 방법은 슈타지 문서관리청의 설립이다. 기존 슈타지청은 통일 이전 동독의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 주된 역할을 했던 기관이었다. 대중의 슈타지청에 대한 분노가 상승하자, 슈타지청은 동독과 관련된 문서를 파기하기 시작했고, 이를 알게 된 대중은 슈타지청을 점령하고 문서를 보존하도록 하여 이러한 문서를 관리하기 위한 기관인 슈타지 문서관리청을 설립할 것을 요구한다. 슈타지 문서관리청은 기존에 자주 사용되었던 감청과 같이 시민의 이해관계와 관련된 문제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과거 슈타지청에서 근무하며 인권문제를 행한 사람들이 고위공직에 오르지 못하도록 하며 동독을 통치하기 위하여 비밀경찰이 했던 행위를 밝히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슈타지 문서관리청의 설립으로 인하여 독일의 독재청산 작업이 시행되었다. 


이 외에도 독일은 2008년부터 ‘Be Berlin’이라는 도시 슬로건을 내걸며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독일분단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으로 인한 어두운 이미지를 타파하고 통일 이후 완벽하게 융합되지 못한 동독과 서독 사람들의 삶을 통합하고자 캠페인을 진행하였다. ‘Be Berlin’은 ‘Ich bin ein Berliner’라는 ‘나는 베를린 사람이다’라는 문장으로부터 있는 그대로의 베를린을 보여주겠다. 나는 내가 사는 베를린이 자랑스럽다. 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문장이다. 빨간색의 심플한 로고와 함께 ‘CITY OF OPPORTUNITIES’라는 말풍선을 통하여 베를린 시민과 관광객이 어우러지는 캠페인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베를린은 ‘Be Berlin’ 캠페인의 일환으로 ‘Come to Berlin with your children. One day they’ll be here anyway.’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베를린은 창조적인 일을 한다면, 각국의 사람들을 수용할 것이라는 의지를 보였다. 그들은 베를린을 “Digital Capital”이라고 부르는 마케팅 캠페인을 통하여 스타트업 기업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실시하고 있다. 그 결과 ‘Be Berlin’ 캠페인은 1600만 명 이상의 Facebook 팔로워와 4.7만 개 이상의 인스타그램 게시물을 통해 베를린의 이미지를 탈바꿈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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